84. 울고 또 빌어
유다르는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아직 보고할 내용이 끝나지 않은 사용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하, 아직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방법이 있나?”
다급해진 그의 말이 빨라졌다.
“그게 아니라…….”
한시가 아까운 유다르에 비해 그는 보고를 망설였다. 유다르는 미간을 좁히고 사용인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입을 열었다.
“레이디 클라리온을 진료한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지 못해!”
사용인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도저히 자신이 하는 말을 듣게 될 유다르의 반응을 보고 싶지 않았다.
“레이디 클라리온은 지금 홑몸이 아니라 합니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이 머리끝까지 받아 씩씩거렸다. 사용인의 보고 한 마디에 그 열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차디찬 머리가 띵- 하고 울릴 정도였다.
유다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홑몸이 아니란 건 아이를 가졌단 말이냐?”
사용인의 말뜻을 정확히 물었다. 사용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하하…….”
유다르는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누구 아인데.”
유력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유다르는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아 물었다. 사용인은 섣불리 에이젠 트로네일 것이라 대답했다간 유다르가 어떻게 폭주할지 몰라 두려웠다.
“그건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르는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용인의 앞으로 바투 다가갔다.
“에이젠 트로네?”
그러곤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는 게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풍전야 같아 더욱 섬찟했다.
유다르는 겁먹은 사용인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방금 에이젠 트로네의 사형 집행을 이틀 뒤로 정해둔 찰나였다.”
그래서 기분이 한껏 좋아진 상태였다. 정치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눈엣가시였던 자를 해치우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명분을 쌓았다. 그리고 그게 드디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겨우 빼앗았다 생각한 로아 클라리온이 돌이킬 수 없는 에이젠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몸에 에이젠의 핏덩이가 자리하고 있다니, 분노가 치밀어 머리를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근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최대한 빨리 그를 처치하기 위해 이틀 뒤 일정으로 잡았다. 그러나 이틀이라는 시간을 주는 것마저 사치였다.
“당장 사지를 찢어 죽여버리겠어.”
이를 꽉 깨문 그가 발걸음을 뗐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춰선 그는 뒤를 따르는 사용인들을 향해 중얼거리듯 명했다.
“로아 클라리온을 찾아 내 눈 앞에 끌고 와라.”
손톱이 손바닥 안쪽을 깊게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로 말을 이었다.
“이 엿같은 두 연놈을 싸잡아서 같이 죽여버릴 테니까.”
***
로아는 카일론의 도움으로 겨우 궁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둠이 깔린 숲의 짙은 녹음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아, 하…….”
쉴 새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체력 안배를 못 한 탓에 금방 지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음껏 뛸 수도 없었다. 배 속에 아기가 들었다는 걸 인지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멈춰선 로아는 충분히 호흡을 고른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광장까지 걸어 인근 마을에 겨우 몸을 숨긴다 해도 탈것을 타고 이동할 황실 관계자들보다 늦게 도착할지도 몰랐다.
발바닥이 다 까질 정도로 걸어온 로아는 잠시 나무 아래에 앉아 몸을 기댔다. 가만히 있자 숲속의 고요한 공간이 오감으로 느껴졌다.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 하늘 위를 지나가는 구름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로아는 잠시 앉아 자연을 구경했다. 정신없이 걸어오느라 주변을 살필 여유 따위 없었다. 어둠이 깔린 풀숲은 그리 대단한 풍경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예쁘게 보였다.
자신의 눈에 담은 이 그림이, 자신의 귀로 듣는 이 소리가, 전부 아기에게 전달될 것 같았다.
로아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주변 곳곳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주변을 하나씩 뜯어보던 로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꼭 살려줄게.”
로아는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빠도 만나게 해줄게. 약속할게.”
아직 배가 불러오지도 않았다. 입덧을 할 즈음이니 아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세포일 것이다.
그런데도 로아는 눈을 감으면 아기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파스락.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졌다. 로아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예민해진 로아는 수상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온 신경을 세웠다.
로아는 숨소리도 죽이기 위해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못 들었는데요.”
희미하지만 사람 소리였다. 대화 내용 또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고개를 슬며시 들어보자 멀리서부터 사방을 비추어보는 빛줄기도 보였다.
아직 황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분명 황실에서 보낸 수색대일 것이다.
“이런 건 확실하게 확인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로아는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비추는 랜턴의 빛줄기가 자신에게 닿을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짧은 순간 머리를 굴린 로아는 주변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두 눈 질끈 감은 그녀는 도박을 택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낮게 던졌다.
위로 날지 않은 돌멩이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날아갔다. 그리고 바닥에 착지했을 때 바스락, 소리를 냈다.
“앗, 저쪽이다!”
저에게 다가오던 사람들이 돌멩이가 낸 소리를 향해 뛰어갔다. 로아는 그 틈에 몸을 일으켰다.
“하, 살았…….”
겨우 안도의 숨을 쉬며 방향을 돌렸을 때 하마터면 비명을 빽 지를 뻔했다.
“찾았다.”
바로 눈앞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손엔 랜턴도 없었고,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기척이 없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본 로아는 끔찍한 기억에 휩싸였다.
과거의 시간 속, 황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풀숲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까지 에이젠의 몸통에 칼을 꽂아 넣었던 남자.
펙토르 경이었다.
로아는 그의 앞에서 겁에 질려 도망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펙토르는 로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고통을 느끼고서야 로아는 격렬히 저항했다.
“으윽, 놔! 놓으세요!”
남자는 버둥거리는 로아를 번쩍 들어 올려 제 어깨에 둘러멨다. 로아는 그에게 끌려가는 중에도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그의 등과 팔을 할퀴어댔다. 들어먹지를 않자 어깨를 콱 물어버리기도 했다.
“아악!”
비명을 지른 펙토르는 마차 앞에 서자마자 로아의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안으로 던져버렸다.
쾅.
가녀린 몸이 마차 안에 실려있던 짐에 강하게 부딪혔다. 로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눈앞에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아, 아…….”
하필이면 복부로 떨어진 바람에 통증이 그쪽으로 쏠렸다. 로아는 쏟아지는 복통과 아기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절규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
마차 안에서 정신을 잃은 로아는 짐짝처럼 실려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어두운 방 어딘가로 옮겨졌다. 처음 그녀를 대접해주었던 화려하게 꾸며진 게스트룸 따위가 아니었다.
어둡고 눅눅한 게 꼭 비품을 보관하는 창고 정도로 예측됐다.
로아는 의자에 앉아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사용인들이 준비해둔 양동이 쪽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물이 가득 채워진 묵직한 양동이를 들더니 로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로아를 향해 사정없이 물을 끼얹었다.
“캑, 크흐윽, 캑캑…….”
반강제로 정신을 차렸다. 찬물에 쫄딱 젖어버린 로아는 몸을 파들거리며 깨어났다. 반쯤 먹은 물이 식도로 넘어가 사레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로아 클라리온.”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로아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랑하는 남자 에이젠을 향해 온몸 망가뜨려 가며 달려갔건만, 제 앞에 있는 남자는 에이젠이 아닌 유다르였다.
“정신 차려. 내 눈 똑바로 보거라.”
유다르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올려 저에게 폭행을 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로아는 그가 어떻게 폭주할지 몰라 두려웠다. 제 몸뚱이 하나 정도야 쉬이 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홑몸이 아니었다. 자신이 다치면 아기도 위험해질 수 있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를 회유시켜야 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다르는 대답 없이 피식거리기만 했다. 로아는 꽁꽁 묶인 밧줄에도 몸을 뒤흔들어 두 손을 모으려 애썼다.
“저하.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저를 놓아주세요.”
자존심이고 뭐고 이제 중요한 게 없었다. 제발 그가 자신을 때리지 않기를, 죽이지 않기를. 지금 이 순간 로아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대공님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내가, 내가 황실 무도회에 오고 싶지 않아서, 그와 결혼하고 싶어서 내 의지대로 불복종한 겁니다. 차라리 저를 벌해주세요, 저를!”
자신도, 아기도, 에이젠도. 그 아무도 다쳐선 안 됐다. 로아는 혼이 나갈 정도로 울고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