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85)화 (85/107)

85. 반역자의 핏줄

간곡한 울림은 유다르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성미를 돋울 뿐이었다.

“그는 오늘 새벽에 광장에서 공개 처형을 당할 예정이다.”

머리 위로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로아는 불안하게 쿵쿵대던 심정이 철렁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정신없이 눈물로 호소하던 것도 멈추었다. 차게 식은 머리가 이 이상의 격한 반응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요. 안 됩니다.”

로아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백지장이었다. 수많은 고비를 넘겨오며 온갖 잔머리를 굴려 왔다. 그런데 왜 이 순간만은 몸도 머리도 고장나버린 것처럼 말을 듣지 않을까.

“저하, 늦었지만 이실직고하겠습니다.”

로아는 유다르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달달거리는 입술을 겨우 떼곤 목소리를 냈다.

“나는 트로네 대공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없어요.”

임신 사실을 알린다는 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로아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되돌리려 했다.

유다르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도 한 번 더 고하는 로아의 태도에 또다시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도대체 에이젠 트로네가 뭐길래. 이 여자가 도대체 그를 위해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아이를 가진 것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신붓감이었다. 탐이 나면 탐이 날수록 더욱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제 여자가 될 수 있었는데. 거의 다 왔는데.

“그러니 이만 저를 포기해주세요. 그리고 트로네 대공을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죽음까지 무릅쓰고 그녀가 청하는 것의 목적은 여전했다.

“그래. 알고 있다.”

아깝지만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 유다르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로아에게 다가갔다. 상체를 굽힌 그는 무릎을 짚고 로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색욕에 미쳐버린 트로네 대공이 감히 황태자비가 될 여자를 임신시켰다.”

유다르의 억지스러운 추측에 로아는 표정을 굳혔다.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반역을 뒤집어씌웠던 것처럼 이번에도 상황을 제 입맛대로 지어내고 있었다.

“그놈의 죄는 더 중해졌다. 나는 그를 살려둘 생각이 추호도 없어.”

틀어 올라간 그의 한쪽 입매가 시리디시렸다. 로아는 얼빠진 사람처럼 초점을 잃은 두 눈동자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로아 클라리온.”

상체를 일으킨 유다르는 한 손으로 로아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자네 역시 내 아내가 될 수 없겠지.”

제 손에 들어올 뻔했던 여자. 하지만 불운하게도 지조를 잃어버린 여자. 아름답지만 안타까운 영혼을 놓아주기로 했다.

“너도 같이 지옥으로 떨어뜨려줄 테니 아무 걱정 말아라.”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로아의 머릿속엔 지옥 같았던 과거의 시간과 회귀 후 에이젠과의 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직 에이젠과 제대로 마음을 확인하지도 못했다. 운명을 바꿔보기 위해 엇갈린 행동을 하며 서로를 상처입히기 일쑤였다.

그를 살리기 위해 저의 목숨은 기꺼이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의 죽음이 그를 살리는 데 아무런 일조를 할 수 없다면 죽고 싶지 않았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홑몸이 아닙니다. 제발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더는 제 몸뚱이를 멋대로 굴릴 수 없었다. 아이가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 에이젠의 아이. 아직 세상의 빛도 제대로 보지 못한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로아는 제 목숨을 아껴야 했다.

“아이?”

섬찟하게 웃던 유다르는 일순 웃음기를 지워냈다. 고개를 기울인 그는 로아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반역자의 핏줄이라면 모조리 처단해야지.”

일말의 희망조차 나락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안됐지만 그놈의 핏덩이를 품은 자네도 무사할 순 없어.”

잔인한 확인사살이었다. 로아는 벌써 숨이 멎어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심하게 쿵쾅대던 심장박동은 오히려 잦아들었다. 입은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네와 에이젠 트로네의 지독하고 광적인 그 사랑, 내가 이루어주겠네.”

***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여명이 낮게 깔릴 즈음, 황궁의 문이 열렸다.

황제와 황태자 유다르는 광장에서 진행되는 그의 공개 처형을 위해 이른 아침 궁 밖으로 나갔다.

죄인이 된 로아는 두 손목은 뒤로 꺾여 묶이고 두 눈도 안대로 가려진 채로 짐칸에 실렸다.

그녀는 저항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발버둥 칠수록 격해지는 제압에 더는 몸부림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곧 죽어 사라질 운명인데도 배 속의 아기가 다칠까 봐 격렬히 저항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가꾸어지지 않은 숲을 하염없이 지났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으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입고 있던 옷은 해져 있었고, 마구잡이로 도망가고 제압당하느라 팔다리엔 상처투성이였다.

그리고 광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 똑같이 죄인의 신분이 된 에이젠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

“에이젠…….”

로아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고요함이 퍼진 공간 바스락, 하는 아주 작은 기척이 들렸다.

로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에이젠이었다. 그러나 에이젠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고문을 당했을까. 숨통은 트여있는 저와 달리 그의 입은 막아놓기라도 한 걸까.

“에이젠.”

로아는 다시 한번 에이젠을 불렀다. 바스락, 한 번 더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주변 어딘가에 에이젠이 있다.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로아에겐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에이젠과 로아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했다.

“나…….”

로아는 파들거리는 입술에 힘을 주어 소리 냈다.

“아이를 가졌어.”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바스락거리던 소리가 일순 조용해졌다.

“에이젠, 에이젠의 아이…….”

두 사람은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목숨 바쳐 상대를 지키려다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도,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아이가 생겼다고. 비록 태어나지도, 어쩌면 몸속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했지만 그 생명의 씨앗이 피어났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이 시간은 지나더라도 다시 한번 행복해질 기회가 주어질 거라 믿었다.

지금의 끔찍했던 기억은 분명 사라질 것이다.

에이젠이 죽고 시간을 되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죽었던 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삶은 여러 번의 회귀 속, 가장 끔찍한 굴레였다.

차라리 둘 다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새 삶이 주어졌을 때 이 끔찍한 기억은 전부 잊어버릴 테니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땐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힌트 없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끼이익-

쇳덩이 따위가 긁히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로아는 미간을 좁혔다. 어두웠던 공간에 갑작스러운 빛이 닥친 것처럼 시야가 밝아졌다.

누군가 다가와 양쪽 팔을 잡아 어딘가로 끌고 갔다. 로아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앞이 보이지 않아 에이젠이 어느 쪽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고 싶은 본능이었다.

로아의 육신은 처형대 위로 옮겨졌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밧줄로 한 번 더 꽉 묶었다. 살갗을 에는 고통에도 로아는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이보다 더 깊은 고통으로 빠뜨릴 수 없었다.

“이웃국에서 들여온 신무기입니다.”

유다르는 일전부터 에이젠을 처형시킬 새로운 문물을 찾아다녔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로 사용하기 전, 사용수에게 테스트해보자는 의견을 낸 것도 유다르였다.

화약을 이용해 방아쇠를 당기면 빠르게 목표물을 가격하는 신무기, 총기였다.

유다르가 로아를 먼저 처형대에 올린 이유가 있었다. 에이젠을 그녀의 바로 앞에 앉혀둔 채 가렸던 안대를 풀었다. 입에는 찍소리도 낼 수 없도록 재갈을 물렸다.

사랑하는 여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철컥. 총알을 장전한 장총을 든 기사들이 로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직 총의 위력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끊으려면 몇 발을 쏘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로아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을 때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우지끈, 하고 저를 구속했던 줄을 괴력으로 풀어버린 에이젠이 몸을 일으켰다. 처형 과정을 지켜보던 황실 관계자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입을 떡 벌렸다.

돌발 상황이었다. 그가 총을 든 기사에게서 무기를 빼앗으면 상황이 역전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에이젠이 향한 곳은 총기 따위가 아니었다. 처형대에 처량히 앉은 로아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이 순간을 놓치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유다르는 기사들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시간 끌지 말고 같이 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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