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네 번째 재회
총성이 울렸다. 여러 발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 같은데 로아의 머릿속엔 최초의 총성만이 들렸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포근한 누군가의 온기가 제 몸을 감싸는 것만 느껴졌다.
눈을 가린 안대 밑으로 축축한 액체가 새어 나왔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처형대에 선 자신을 온몸을 던져 막은 사람은 에이젠이란 걸.
“에이젠…….”
눈을 가리고 있던 시야로 갑작스러운 빛이 들어왔다. 에이젠은 마지막 힘을 다해 로아의 안대를 벗겼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로, 아…….”
아직도 총성의 잔음이 울리고 있는데, 로아의 귓가엔 그의 목소리만 또렷이 들렸다. 재갈을 물린 채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텐데도 마지막까지 로아의 이름을 불렀다.
“아, 에이젠, 에이젠, 안 돼…….”
의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음보다 더욱 잔혹하게 죽어가는 에이젠을 마주했다. 몸뚱이는 차게 식었는데 속에서는 뜨거운 감정이 들끓었다.
에이젠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도 눈꺼풀에 줄 힘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남은 힘을 다해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로아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두 사람의 아이. 비록 잘못된 운명 속에서 빛 한 줄기 보지 못했다. 그래도 서로를 사랑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 살아있는 산물이었다.
에이젠은 보이지 않는 생명체에게 말을 걸어볼 틈도 없었다.
“윽.”
몇 발의 총성이 더 울렸다. 로아 역시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온몸을 빠르게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쓰러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눈물 젖은 푸른 눈동자와 피에 물든 붉은 눈동자는 이번 시간에서도 고이 감지 못했다.
***
댕, 댕-
눈이 번쩍 뜨였다. 여명이 사라지던 마지막 순간과 달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몸은 가벼워서 낯설 정도였다.
“어…….”
로아는 이 순간을 알았다.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시간을 되돌리면 꼭 이때로 돌아왔다.
클라리온 백작 저의 자연풍경식 정원. 그곳에 앉은 로아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에이젠을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든 참이었다.
로아는 무언가를 인지할 새도 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생생한 처형의 순간이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아가씨, 아가씨!”
로아를 발견한 쥬디가 그녀를 향해 다급히 뛰어왔다. 로아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직도 제 이름을 속삭여주던 에이젠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헉, 헉, 아가씨. 한참 찾았어요.”
씩씩거리며 다가온 쥬디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쥬디는 아무 기척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는 로아의 앞에 손바닥을 흔들어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그녀의 양 뺨이 촉촉이 젖은 것을 발견했다.
“아가씨, 우세요?”
화들짝 놀란 쥬디가 그녀의 앞에 꿇어앉았다. 얼른 앞치마에서 손수건을 꺼내 로아의 뺨과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오랜만에 재회하는 날이라 곱게 화장을 해둔 터라 아무렇게나 닦아낼 수도 없었다.
“웬일이야. 대공님 오셨다는데 갑자기 우시면 어떡해요.”
속상한 마음에 툴툴거리는 쥬디에도 로아는 혼을 놓은 채였다.
“이미 대공님 도착하셨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얼른 수습하고 일어나세요.”
쥬디는 로아를 어르고 달래 일으켰다. 에이젠이 얼른 보고 싶어 황급히 달려나갔던 전과 달리 그녀의 걸음은 자신감이 없어졌다. 몇 걸음 가지 못해 중간중간 멈춰서기도 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시야가 선명하지도 않았다.
지금 에이젠을 보면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단순히 그가 살아있단 이유만으로 안심할 때는 지났다. 어차피 돌아온 이 시간 속에 그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건 알고 있다.
다만 과거의 기억 속 괴로웠던 서로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안쓰럽게 죽어가던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일 듯했다.
그래도 로아는 재회의 시간을 외면할 순 없었다. 아무것도 모를 이 시간의 에이젠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로아, 너 어디서 뭐 하느라…….”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 로아에 셰인데릭이 휙 돌아봤다. 잔소리를 쏟아내려다 로아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발견한 그가 얼른 로아 앞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요. 정원에서 너무 서럽게 울고 계셔서…….”
로아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너무 울어서 목구멍이 막혀버린 탓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했다.
“우리 아가씨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우실까? 나쁜 꿈이라도 꾸셨을까?”
셰인데릭은 허리를 숙여 다정하게 로아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사랑하는 트로네 대공님이 행차하셨잖아. 어서 눈물 닦고 인사드려야지.”
로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셰인데릭과 쥬디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발을 내디뎠다.
줄지어 예를 갖춘 사람들 속 가장 빛나는 남자를 발견했다. 다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주변인들에게 겨우 의지해 걸어온 로아는 두 눈을 마구 비벼 눈물을 훔쳤다.
흐릿했던 시야를 선명하게 만들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에이젠의 얼굴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로아.”
분명 저를 사랑스럽게 내려봤던 에이젠이었다.
그런데 에이젠은 저와 같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로아의 이름을 낮게 읊조린 그는 마찬가지로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
다시 만나면 꽉 끌어안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가 믿기지 않아서 손끝만 파들거릴 뿐이었다.
“에이젠, 에이젠…….”
로아 역시 에이젠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렀다.
좋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듯한 두 사람.
설마 고통의 기억을 잊었던 에이젠이, 이번엔 다 기억을 하는 걸까.
로아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과거, 에이젠은 죽은 걸 처음 봤을 때. 다시 시간을 되돌아왔을 때 로아만 그때를 기억할 뿐, 에이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둘 다 죽었는데 둘 다 기억을 하고 있는 거지.
하필이면 가장 고통스럽게 서로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바로 그때를, 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우리 영지부터 찾아주시다니, 클라리온가의 영광…….”
클라리온 백작이 건넨 예의 차린 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에이젠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 로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두 팔에 겨우 힘을 주고 에이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흐윽, 흑, 흐으으윽.”
그러더니 세상에서 가장 처연한 사람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흐윽흑, 흐읍, 흡, 흐아아…….”
울음을 참으려는 의지도 없었다. 오히려 케케묵은 감정을 전부 다 토해내겠다는 듯 쏟아내려 했다.
에이젠은 들썩거리는 로아의 어깨를 마주 안았다.
그 역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바보같이 우느냐고 로아의 어깨를 다독여주지도 못했다.
그녀가 왜 우는지, 자신이 왜 우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아무도 두 사람 사이를 섣불리 끼어들 수 없었다.
***
에이젠과 로아는 클라리온가 가족들과 사용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침실로 이동했다.
한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한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격한 감정을 쏟아내서였다.
잔악하기 그지없는 경험을 하고도 시간을 되돌아오니 사지가 멀쩡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피로감을 이기지 못한 몸뚱이가 잠을 원한다는 게 사람이 아닌 짐승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먼저 잠에서 깨어난 건 로아였다.
로아는 아직 잠든 에이젠의 얼굴을 매만졌다.
두 번이나 그의 죽음을 보고 말았다.
예전처럼 에이젠을 보면 마냥 설레기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그때가 떠올라 눈물을 쏟아낼지도 모른다.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로아의 손길을 느낀 에이젠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에이젠 나 다 기억나.”
로아는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까지 전부 떠올랐어.”
잠을 자고 일어나니 없어졌던 기억까지 돌아왔다. 에이젠은 아무 대답 하지 않았지만,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지금 에이젠과 여기서 재회한 게……. 세 번째가 아니라 네 번째야.”
총 세 번의 회귀.
에이젠의 죽음으로 로아에게 다시 그를 살릴 기회가 주어졌다. 제 목숨 바쳐 에이젠을 구했건만 이번엔 에이젠에게 로아를 살릴 기회가 생겼다.
그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이 죽었던 때의 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세 번째 시간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한 두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됐다.
중간에 자신이 죽었던 기억까지 전부 되찾았다.
“끔찍해.”
그제야 각자의 사정이 이해됐다. 로아는 에이젠을 살리기 위해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고, 에이젠은 로아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억지로라도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진심은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로아는 에이젠의 옆에 있고 싶었고, 에이젠은 로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제 곁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