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우리 아기
“도대체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힘없이 말라비틀어진 입술이 물었다.
“에이젠을 살리고 싶었던 거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야 하는 거야?”
이 남자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위해준 것. 이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이라고 이렇게 괴로운 시련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걸까. 이 굴레의 끝이 있긴 한 걸까.
로아는 눈물을 흘렸다.
끔찍하게 처형당했지만 제 앞에 살아 돌아온 에이젠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언제 또 연기처럼 사라질지 몰라 두려웠다.
잠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로아는 문득 에이젠의 얼굴을 바라보다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잘게 떨리던 손끝이 자신의 아랫배로 내려갔다.
“아이…….”
안 그래도 하얀 로아의 낯빛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아이가 없어졌어.”
당연했다. 임신을 하기 전 시점으로 돌아와 버렸으니까.
두 사람이 사라진 시간 속 아이는 당연히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로아는 아이만 사라진 채 두 사람만 돌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 내 아기. 우리 아기…….”
고통의 가시밭길에서 고고하게 피어난 한 송이의 꽃 같은 존재였다.
로아는 그 지옥 같은 순간에도 에이젠의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아이의 존재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아에겐 그런 인과관계 따위 중요치 않았다.
“안 돼. 안 돼. 우리 아이가…….”
“로아…….”
로아는 정신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이 울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듯 희번덕이는 두 눈이 갈 곳을 잃어 헤맸다.
“흐아아악, 아아윽!”
정신적 고통에 휩싸여 몸부림치던 로아는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에이젠은 로아의 두 팔을 붙잡아 스스로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그녀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로아. 진정해.”
“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
그간의 시간이 물거품이 되었다. 에이젠을 만나기 위해 몇 년의 시간을 외로이 보냈다. 다시 만나고서 알 수 없는 저주에 의해 지옥의 굴레를 몇 번이나 굴렀다. 서로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질게 굴었던 시간까지 겨우 이겨내고 두 사람은 마음을 확인했다.
아기는 그렇게 얻어낸 산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기가…….
로아는 순간적으로 정체성을 잃었다. 무얼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가. 나는 왜 숨 쉬고 있는가. 이럴 자격이 있긴 한 건가.
아이를 잃고도 일말의 신체적 고통도 없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로아, 제발…….”
에이젠은 로아의 두 팔을 끌어당겨 제 허리를 감게 했다. 그러곤 제 품에 쏙 들어온 가녀린 그녀를 힘껏 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조그만 틈도 없을 정도로 밀착했다.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에이젠이 주는 따뜻한 위로는 안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모순적인 감정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흐으윽, 흐아아아, 아아아…….”
에이젠의 품에 안긴 로아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칼에 몸통을 관통당한 적도, 순식간에 숨통을 끊어놓는 총을 맞아보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았다.
***
두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로아는 울고 또 울었다.
울다 지쳐 잠들었나 싶을 즈음 로아의 앞머리를 들춰보면 버젓이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아무리 지쳐도 잠도 오지 않았다.
에이젠은 로아의 옆에 누워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결혼하자, 로아.”
아주 고요한 분위기 속, 에이젠은 은은한 손길로 로아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말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한 장면 같은 자연스러움이었다.
“황실 무도회 초대장이 오기 전에 대공비가 되면 돼.”
결혼식을 서두르면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의무가 아니게 된다. 유다르와 로아를 마주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미래는 크게 바뀔 것이다.
“그렇게 유다르와 얽히지만 않으면…….”
“유다르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까?”
그러나 로아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자식이랑 마주쳤던 건 우연이 아니었어.”
후원에 가지 않으면 유다르와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다르는 의도적으로 로아를 노리고 중정으로 나왔다.
에이젠의 저택에 은신하고 있을 때도, 유다르는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로아를 찾아 나서기 위해 황실수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결국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저와 만나려 할 게 뻔했다.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나 하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제국 전체 귀족들을 불러모으는 무도회 따위를 연 미친놈이라고.”
로아는 유다르를 떠올리기만 해도 줄지어 연상되는 괴로운 기억에 치를 떨었다.
“우리가 결혼해도 유다르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우릴 음해할 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라면 결혼한 유부녀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가장 처음 유다르에게 불려갔을 때도, 로아는 이미 에이젠과 결혼한 몸이었다.
“그리고 언젠간 또 우리 둘 중의 한 명은, 아니면 우리 둘 다 죽게 될 거야.”
부정적인 생각은 뿌리를 뻗어 좌절스러운 결말을 도출해냈다. 퉁퉁 부어 더는 차오를 것도 없을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맺혔다.
“그렇게 끝나지 않겠지.”
이미 미래를 세 번이나 겪은 몸이었다. 이 인생에 더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또 시간이 되돌아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무한대로 반복하고…….”
로아는 뒷말을 다 잇지 못했다. 로아의 뺨을 감싸 잡은 에이젠은 그녀의 입술을 단번에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핥아 올리고 누구의 것일지 모를 타액이 뒤엉켰다. 로아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에이젠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따라 그 리듬을 조금씩 맞추어갔다.
훅 들어온 키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입술을 뗀 에이젠은 로아의 뺨을 감싼 채 이마를 맞댔다.
“로아.”
그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상황이 바뀌면 분명 달라지는 게 있어.”
불길한 걱정에 얽매여 아무것도 해보지 않는다면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어떻게 될지 모를 모험의 길을 택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단 결혼을 서두르자.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
에이젠은 로아와 같은 경험을 하고도 훨씬 이성적이었다.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품에 폭 안아 제 온기를 온전히 나누어주었다. 입술로는 로아의 이마부터 콧대, 뺨, 입술, 목덜미까지 연이어 입을 맞추었다.
네 옆엔 언제나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 달라고 전하는 행위였다.
“곧 루베른 영지에 갈 예정이잖아. 취소해.”
일정을 당길 수 있는 대로 당겨야 했다. 그러나 에이젠의 제안에 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루베른 영지에 가야 해.”
뜻밖에 의견이 엇갈렸다. 에이젠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로아는 루베른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수상하게 둘러대곤 했다. 그곳에 무언가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던 로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벨라니스를 만나러 루베른 영지에 갔을 때, 점성술을 봐주는 곳에 들른 적 있어.”
에이젠은 네 번째 만에 로아에게서 루베른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시간을 예언한 포춘텔러가 그곳에 있어.”
“……포춘텔러?”
“그 여자라면 분명 뭔갈 알고 있을 거야.”
로아의 이야기에 에이젠은 무언가 턱 걸리는 것처럼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이 모든 시간을 예언했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에이젠과 결혼을 앞두었을 땐 그 여자가 에이젠이 곧 죽을 거라고 예언했어.”
로아는 다 이해하지 못한 에이젠을 위해 부가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에이젠과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라고 말했어.”
그 여자의 앞에 섰을 때부터 싸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 불쾌한 감각을 전신으로 퍼뜨렸다.
이 시간의 흐름에서 수상한 것은 전부 다 들춰내봐야 후회하지 않을 듯했다.
“잠깐.”
불편하게 거슬리는 무언가의 정체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점성술로 미래를 선명하게 내다보는 것. 에이젠은 로아의 이야기에 연관지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저에게 저주를 내리겠다는 새어머니 마를레나.
그녀는 평소에도 흑마술이나 오컬트적인 요소를 매우 좋아했다.
“그 여자 행색 기억나는 거 있어? 생김새라든지.”
에이젠은 로아가 만났다는 포춘텔러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었다. 안타깝게도 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두건으로 머리카락이나 눈까지 전부 가리고 있었어.”
생김새를 전혀 보지 못했다는 로아의 증언에 에이젠은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마치 제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듯 아주 감쪽같이.”
흑마술에 관심을 가져 황실의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쫓겨난 황녀, 마를레나.
새어머니가 내린 저주는 자신뿐만 아니라 로아에게까지 퍼져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늦었다간 그녀의 행방이 묘연해질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먼저 일어난 에이젠은 로아를 끌어당겨 일으켰다.
“루베른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