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좋은 징조
이른 새벽.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챙겨 나온 로아와 에이젠은 사용인들과 함께 마차 앞에 섰다.
“에이젠과 함께 루베른에 다녀올 거야.”
깊은 밤, 가족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로아를 배웅하러 온 사람은 큰 오빠 셰인데릭뿐이었다.
“대공님과 함께?”
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결혼할 사이니까. 제일 친한 친구인 벨라니스에게도 대공님을 소개해주고 싶어.”
셰인데릭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친구에게 결혼할 사람을 소개해주는 건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 깊은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마치 야반도주라도 하는 듯 은밀하게.
거기다 친구 벨라니스를 만나러 갈 때면 기분 좋은 설렘을 품고 있던 로아는 평소와 달리 비장한 얼굴이었다.
셰인데릭은 로아를 지나쳐 에이젠의 앞으로 걸어갔다.
“귀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무 일정이 많으실 텐데요. 차질 없이 괜찮으십니까.”
에이젠은 한창 바쁠 시기였다.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념식에 참여하거나 황실령으로 하사를 받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을 터였다. 바쁜 일정을 쪼개 겨우 로아를 만나러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아의 친구까지 만나러 간다니. 여유롭지 않은데도 굳이 피할 수 있는 일정을 무리해서 끼워 넣는지 의문이었다.
“루베른 영지는 여기서 굉장히 멉니다. 대공님이 이곳으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긴 여정에 오르기엔 많이 힘드실 겁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한 후에 가시는 게…….”
“로아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셰인데릭의 걱정에도 에이젠은 굳건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의지를 보일 정도면 ‘피할 수 있는 일정’은 아닌 듯했다.
셰인데릭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만의 사정이 있을 거라 이해하기로 했다.
“오늘 새벽에 바로 출발할 거야. 늦지 않게 돌아올게.”
두 사람은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셰인데릭은 그들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서 서서 작아지는 마차를 지켜봤다.
***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주변에 어둠이 짙게 깔려 빠르게 이동할 수도 없었다. 주변의 소음도 없어 적막함만이 가득했다.
다각다각다각.
규칙적으로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로아는 새벽 공기를 마시고 싶어 창문을 열어젖혔다. 찬 기운이 들어와 몸이 으슬으슬 떨렸지만 공기는 상쾌했다.
에이젠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로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온기가 묻어나는 옷자락 끝을 꼭 쥐었다.
아직도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실재인지 허상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에이젠.”
오랜 시간 울어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창밖만 보던 에이젠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여 로아를 향했다.
로아는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 교환했다.
충분히 서로를 갈망하는 마음을 주고받았을 즈음, 로아가 입을 열었다.
“너의 모든 것이 알고 싶어.”
세 번이나 같은 시간을 반복했지만 아직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다 알지 못했다. 특히 마지막엔 진심을 숨기느라 급급해 오해는 점점 커지기만 했다.
“너의 저택에 있을 때 사용인들이 하는 말을 엿들은 적 있어.”
에이젠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들의 대화 내용 중 로아의 기억에 남을 만한 것으로 짐작되는 게 있었다.
“어릴 때 학대당하고 자랐다면서. 사용인들에게까지 무시당할 정도로.”
그가 본처의 자식이 아니란 이유로 차별받고 자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았을까, 정도로 생각했던 건 안일한 착각이었다.
“그렇게 널 괴롭히던 마를레나 부인은 어디로 간 거야?”
에이젠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마를레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에겐 괴로운 기억이었다. 로아는 아차 싶어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아보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물어야 했고, 그도 털어놓을 기회가 필요했다.
“제인은 마를레나 부인이 스스로 저택에서 나갔다고 했어. 하지만 황실수사단의 조사 결과, 사용인들이 전혀 다른 진술을 했고.”
스스로 나간 게 아닌 쫓겨난 신세라고.
제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었단 걸 미리 알았더라면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까. 무릎 위에 올려진 로아의 두 손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로아는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동자로 에이젠을 응시했다. 그러나 에이젠의 시선은 로아가 아닌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죽이지 않았어.”
그의 붉은 눈동자엔 살벌한 살기가 품어져 있었다. 으득, 하고 이를 꽉 깨무는 소리도 들렸다.
“죽였어야 했는데.”
마를레나를 살려 보냈을 때부터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저주’를 소위 얕본 셈이었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면 저주 따위도 소멸했을 테고, 지옥의 굴레에 들어서지 않아도 됐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유는 전부 그 여자의 저주 때문이야.”
에이젠은 아직 포춘텔러의 신분을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아온 시점도 이상해.”
죽임을 당한 후, 로아는 매번 클라리온 백작 저의 정원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났다. 그리고 에이젠은 같은 시각 한창 달리는 마차 안이었다. 에이젠은 왜 수많은 시간 중 그 순간인지에 주목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난 황실에 잠시 머물다가 카일론과 함께 클라리온 백작 저로 가기로 했어. 중간에 나만 빠져나와 본가에 들렀고.”
미간을 좁힌 로아는 에이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한바탕 소통이 있었지. 마를레나는 내가 아버지와 형을 죽인 거라 의심했어.”
가주가 바뀌는 것을 선포한 첫날. 에이젠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사람은 마를레나였다.
“그 여자만 죽이면 나를 괴롭게 했던 모든 게 사라질 수 있었어.”
그때도 마를레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겉으로는 안 그래 보였을지 몰라도 에이젠은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드디어 내 손으로 마를레나를 죽일 수 있는 순간이 왔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어.”
이미 전쟁터에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았다. 그도 사람인지라 그 이상의 불필요한 살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싫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자신을 괴롭힌 마를레나가 죽도록 미웠던 만큼, 마를레나도 저에게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 역시 방해물에 불과한 자신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을 터였다. 어린 소년을 괴롭힐지언정 목숨까지 해하려 한 적은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그치자 마음이 약해졌다.
지하실 신세의 소년일 때, 마를레나가 저를 죽였다면 그 뒤의 제 인생은 없어야 했다.
사랑하는 로아를 만난 것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죽이지 않고 저택 밖으로 쫓아냈어.”
그래서 에이젠은 마를레나의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제 눈앞에 다시는 알짱거리지 않길. 다시는 각자의 인생에 얽히지 말길.
그 약속만 지켜준다면 굳이 마를레나의 목숨 따위 앗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그리고 저택을 나가기 전에 나한테 한 마디를 남겼어.”
에이젠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로아는 뜸들이는 에이젠에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날 저주하겠다고.”
기왕이면 돌아온 시간이 마를레나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로 돌아갔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자리에서 그녀를 죽여버렸다면 이 저주는 끝날 테니까.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마를레나를 쫓아낸 후 본가를 나와 클라리온 백작 저로 향하는 마차 안이었어.”
그러나 에이젠은 매번 저주에 걸린 직후로 돌아갔다. 저주를 걸어둔 사람이 나름대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에이젠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끔찍한 생의 마감과 함께 고통의 순간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과 마를레나의 저주를 연관 짓는 데에만 세 번의 인생을 허비했다.
그의 머릿속은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 로아로만 가득 차 있었다. 온 신경이 그녀를 구하는 데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만일 이대로 둘 중 한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잃는 굴레가 계속됐다면 여전히 원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네 번째 회귀에서는 두 사람 모두 기억을 되찾았다.
좋은 징조였다. 덕분에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고 이 회귀 현상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볼 틈이 생겼으니.
이제 이 원인만 찾아서 제거한다면 저주는 풀릴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지금 루베른 영지로 가는 건…….”
의문점을 남긴 로아의 말에 에이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만났다는 그 포춘텔러.”
로아는 그제야 에이젠이 해준 이야기의 결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정확한 답변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마도 마를레나일 거야.”
에이젠의 해답을 끝으로 두 사람은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다각다각.
또다시 차오른 정적 속에 말발굽 소리만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