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지옥의 수레바퀴
늦은 새벽, 로아는 루베른 백작가를 찾아갔다. 보초를 서던 기사 한 명이 벨라니스를 불러냈다. 자고 있던 벨라니스는 로아가 왔다는 소식에 치맛자락을 붙잡고 저택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가 성에 방문하기로 약속을 해두긴 했지만 정해진 일정보다 훨씬 빨랐다. 거기다 낮도 아닌 깊은 새벽. 로아가 이 시간에 찾아온 건 분명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로아는 기사의 안내에 따라 성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로아?”
어둠 속의 로아를 발견한 벨라니스는 빠르게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로아는 벨라니스가 홑몸이 아닌 걸 알았다. 그녀가 달리다가 탈이라도 날까 제가 더 빠르게 벨라니스에게로 다가갔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벨라니스는 로아의 행색부터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루베른에 오기로 한 날은 아직 며칠 남았잖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혹시 쫓기는 신세가 된 건 아닌지. 벨라니스는 걱정을 담아 물었다.
“미안해, 벨라니스. 사정이 있었어.”
“사정이라니, 도대체 무슨?”
그리웠던 친구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그간 겪었던 서럽고 괴로웠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줬으면 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로아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울지 마, 로아.”
벨라니스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로아가 안심할 수 있도록 꼭 안아주었다. 위기에 닥친 상황에 저를 찾아와준 것이 다행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머물게 해줄 수 있을까?”
“당연하지. 어서 들어와.”
로아는 벨라니스의 부축으로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에이젠이 돌아올 때까지는 안전한 곳에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
에이젠은 모든 사용인과 마차를 로아와 함께 루베른 백작 저로 보냈다. 말 한 필만 데리고 로아가 알려주었던 점성술집 위치로 향했다.
늦은 새벽이라 대부분의 상가는 문을 닫은 채였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밝은 곳이 바로 그 점성술집이었다.
아침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으나 예상보다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어찌나 유명한 포춘텔러인지, 줄을 선 손님들이 이 늦은 시간까지도 점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이 천막을 빠져나갔을 때, 안쪽에서 불이 꺼졌다. 에이젠은 건너편 건물에 몸을 숨긴 채 천막 쪽을 예의주시했다.
곧 천막 안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안에서 빠져나온 한 사람은 이 깊은 밤에도 철저히 신분을 가린 채였다. 에이젠은 몸을 낮춘 채 최대한 기척을 줄였다. 서서히 포춘텔러에게로 다가갔다.
걸어가던 포춘텔러는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오셨군요.”
기척을 줄였는데도 그녀는 직감만으로 제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안타깝지만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포춘텔러는 뒤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끝까지 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셈이었다. 그러나 에이젠은 굳이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됐다. 이미 목소리로 포춘텔러의 정체를 확신했다.
“나는 하루에 정해진 수의 손님만 받습니다. 그 이상 받으면 기력이 달려서 점성술이 잘 안 맞게 되거든요.”
에이젠은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포춘텔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눈치채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쓰고 있던 망토의 후드를 더 끌어올려 얼굴을 가리는 데만 급급했다.
“그럼 오늘은 정해진 수보다 더 많은 손님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에이젠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릴 무렵에야 화들짝 놀란 포춘텔러가 돌아봤다. 갑자기 돈 탓에 반동으로 후드가 벗겨졌다.
세 번의 인생을 불구덩이 수렁에 처박고 나서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새어머니 마를레나 트로네를.
“……에이젠?”
마를레나는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뒷걸음질 치며 물러날수록 두 사람 간의 간격이 좁아졌다.
“그리 유명한 포춘텔러라더니 제 앞날은 전혀 내다보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죠.”
에이젠의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내고 있었다. 그 빛깔은 어둠이 짙게 깔린 위에 올라선 포식자 같은 살기를 띠었다.
마를레나는 잽싸게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한 걸음을 제대로 떼어보기도 전에 에이젠에게 옷깃을 붙잡혔다. 그는 붙잡은 마를레나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쥐곤 건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큽, 젠장.”
등이 벽에 부딪히며 통증이 일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에이젠은 마를레나를 더욱 꽉 붙들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칼날같이 서슬 퍼랬다.
“이거 놔! 놓으라니…….”
마를레나는 에이젠을 뿌리치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밑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에이젠의 손아귀 안에선 멋대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는 노련하게 마를레나의 팔을 꺾어 격한 저항을 제압했다.
“더 발버둥 쳐보시지요.”
팔이 꺾인 채 바닥에 엎드린 마를레나는 발버둥 칠수록 더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 날 죽일 셈이냐?”
고개만 치켜든 마를레나는 살기 띤 에이젠에 정면으로 맞섰다. 마를레나는 자신의 위에서 거만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를 마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너 따위 천한 것은 몰랐을 터이지. 난 황실의 핏줄을 갖고 태어났다. 네가 내 몸에 흠집 하나 냈다간…….”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겠지요.”
마를레나가 던진 회심의 협박에도 에이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출생을 에이젠이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몇 번이나 이 시간을 보냈고, 본의 아니게 마를레나에 대해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됐다.
처음 유다르에게 꼬투리 잡혀 반역자의 신분이 된 것도 마를레나와 관련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에이젠은 준비했던 끈을 허리춤에서 꺼냈다. 마를레나의 두 팔을 좀 더 바짝 당겨 묶기 시작했다.
“아아악!”
마를레나는 팔이 꺾이는 고통에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무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보아도 건장한 기사를 밀어낼 순 없었다.
“아픕니까.”
에이젠은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돌아보려는 마를레나의 머리를 바닥으로 짓눌렀다.
“나는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통의 수십 배, 수백 배는 아픈 고통을 겪었습니다. 육신도 정신도 아주 엉망이 되었죠.”
어릴 때도 그랬고, 그녀가 건 저주에 의해서도 그랬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러운 이 손길로 지옥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당신 꼴을 보고 싶지만.”
에이젠은 격하게 움직이는 마를레나의 두 다리도 묶었다. 어차피 주변에 아무도 없어 소리쳐봤자 도와주러 올 이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마를레나의 입에도 재갈을 물려 단단히 막았다.
“그랬다간 내가 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에이젠은 엎드려 있던 마를레나의 몸을 뒤집어 저를 보게 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당신 손 아래에서 숨통을 옥죄인 채 버둥거리던 그 소년에게 역전당한 기분은.”
에이젠은 비소를 머금은 채 마를레나를 내려다봤다. 마를레나는 두 눈에서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에 잠시 입에 물렸던 재갈을 풀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마를레나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진작 널 죽였어야 할 것을.”
살기를 품은 건 에이젠뿐만이 아니었다. 죽음과 부상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누비고, 반역자로 몰려 억울한 처형을 당한 에이젠과 비교해서도 맞먹을 정도의 짙은 살기를 뿜었다.
“……그렇게 후회하고 있다.”
마를레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서로를 향해 매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것조차도 역겨웠다.
“마찬가지입니다.”
에이젠 역시 같잖은 벌레의 꿈틀거림을 보듯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때 당신을 쫓아내지 말고 숨통을 끊어놨어야 했는데.”
그렇게 세상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게 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혐의를 의심받더라도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당신이 나한테 저주를 씌운 걸 알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무엇이 매개체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정황만큼은 확실했다.
“우연히 이곳에 방문한 로아에게 아주 친절히도 그 저주 내용을 말해주셨더군요.”
그 불안을 혼자 떠안고 괴로워했을 로아를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꼼짝 못 하는 마를레나의 목을 옥죄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죽게 될 것이고,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마를레나는 그들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을 떠올린 에이젠을 보며 살의를 내려놓고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그 지옥의 수레바퀴를 몇 번이고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왔습니다.”
반복적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이상 저주를 걸어봤자 한계가 있었다.
“당신의 저주는 여기까지야. 어차피 나를 죽여봤자 나는 시간을 되돌릴 거고 결국 내 손에 붙잡히게 되어 있어.”
마를레나의 저주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이젠뿐만 아니라 생면부지인 로아에게까지 저주를 걸었다. 애당초 이유 없이 남을 음해하기 위한 저주는 온전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죽어도 정해진 운명이 아닌 흐름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당장 저주를 풀어.”
에이젠의 직접적인 요구에 마를레나의 입꼬리는 흥미롭다는 듯 씰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