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90)화 (90/107)

90. 무식하고 저급한

“저주를 풀어달라고?”

두 눈을 크게 뜬 마를레나는 에이젠을 위협하듯 노려보았다.

“크하하하하하하하!”

그러더니 목청 높여 웃어대기 시작했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고막을 찌르는 데시벨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일순 안면근육을 굳힌 마를레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마를레나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휘어질수록 에이젠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내가 지옥불에 떨어지고 사지가 녹아내려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겐 못 해.”

독기를 품은 두 눈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겪게 해줄 거야.”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뒷말을 이었다. 치가 떨릴 정도의 분노가 치밀었으나 지금 당장은 억누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에이젠은 마를레나의 위협에도 하찮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마를레나는 에이젠이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할 만한 약점까지도 간파하고 있었다.

“너뿐만 아니라 네가 목숨 걸고 사랑하는 그 여자까지 말이야.”

자기 자신은 어찌 되든 사랑하는 여자만은 지키고 싶어 했던 에이젠. 여러 번의 회귀를 통해 저를 찾아낸 모든 과정이 집요하고 지독한 사랑의 증거였다.

“내가 그랬거든. 내가 그 고통 속에 살아왔거든.”

에이젠의 생모가 마지막으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저에게 걸었던 저주. 마를레나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을까 수십 년을 불안에 떨며 살았다.

그리고 저에게 저주를 걸었던 여자의 아들까지 맡아 키워야 했다.

“……너 하나 때문에.”

그때 죽였어야 했다. 아무리 아이가 미웠어도 그 아이가 죄를 진 건 없다는 생각에 목숨만은 살려두었다.

여자의 말대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나서야 후회했다.

그 여자의 핏줄을 제대로 처단했다면 과거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마를레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가혹한 신은 그 여자의 저주를 완벽하게 이루어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에이젠에게 건 저주는 완전하지 못해 그에게 자꾸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그 차이를 굳이 따져보자면, 아마도 로아 때문일 것이다.

마를레나는 에이젠뿐만 아니라 생면부지인 로아에게까지 저주를 걸었다. 증오감조차 품지 않고 남을 음해하기 위하려는 저주는 온전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죽어도 정해진 운명이 아닌 흐름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만큼 여러 번 고통 속을 돌고 있다는 거니까.”

사랑했던 사람이 죽고 나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그 사람이 죽는 걸 손 놓고 바라봐야만 하는 입장이라면, 무능력한 자신에 자괴감을 느끼고 점차 피폐해질 것이다.

마를레나가 바라는 것 그 자체였다.

“영원한 죽음도 사치야. 죽어도 살아나고 계속 살아나서 고통을 느껴!”

마를레나는 에이젠의 안면에 대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내가 느꼈던 고통을 너한테 다 돌려줄 거야!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것만큼 가지곤 만족 못 해. 넌 나보다 백배 천배는 더 괴로워하다 죽어가야 한다고!”

저주가 온전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에이젠에게 더한 고통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스러웠다. 에이젠이 시간을 돌아 자신을 위협하러 찾아온다 한들 죽이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넌 태생부터 사랑받을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운명이었어. 그런 네가 감히, 감히, 읍, 으으읍!”

더는 그녀의 발악을 들어줄 수 없었다. 에이젠은 다시 마를레나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손발이 모두 결박된 마를레나는 이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그래. 당신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진 않았겠지.”

에이젠은 마를레나의 턱을 꽉 붙들고 제 눈을 똑바로 보게 했다. 섬찟한 붉은 빛깔이 기세등등하던 마를레나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그 고통, 누가 더 괴롭게 겪는지 어디 한번 대보자고.”

***

밤은 깊어가고 달이 기울어가는데 로아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벨라니스가 호화스러운 방을 준비해주었는데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

벨라니스는 상태가 이상한 로아가 걱정되어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로아는 바깥이 보이는 테라스에 딱 붙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곧 사용인 한 명이 노크를 했다. 로아는 바깥만 보느라 그 소리도 듣지 못했다. 벨라니스는 방을 나와 사용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로아.”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벨라니스가 로아를 불렀다. 그제야 미동도 없이 있던 로아가 고개를 돌렸다.

“대공님께서 데리러 오셨어.”

에이젠이 돌아왔다는 말에 로아는 얼른 뛰어나갔다. 복도로 나와 저택 앞을 내려다보았다. 클라리온가에서 데려온 사용인들이 마차 정비를 마친 채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대공 각하.”

에이젠은 루베른 백작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먼 루베른 영지까지 찾아오셨는데 벌써 올라가셔야 한다니 아쉽군요.”

아쉽지만 두 사람이 오늘 루베른 영지에 온 건 과거처럼 벨라니스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는 있을 겁니다. 그땐 만찬이라도 함께하는 걸로 하죠.”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마쳤을 즘, 로아와 벨라니스가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베른 백작 부인 벨라니스라 합니다. 로아와는 어릴 적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사이죠.”

벨라니스 역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전했다. 로아는 무사히 돌아온 에이젠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 견디기가 힘들었다.

벨라니스는 로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에이젠만 바라보는 로아를 보자 지난날들이 떠올라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제 친구 로아가 각하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감동에 겨워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다 날 것 같습니다.”

에이젠이 출정한 사이 로아가 얼마나 그리움에 메말라갔는지 벨라니스는 가장 잘 알고 있었다.

2년간 에이젠을 기다렸던 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친구가 훌쩍이는데, 회귀하는 동안 로아는 도대체 얼마나 큰 마음고생을 한 건지.

에이젠 또한 마음이 미어졌다.

“함께 근심해주어 고맙습니다, 부인.”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끌어당겨 친구인 벨라니스의 앞에서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더는 부인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로아를 세상 둘도 없는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겠습니다.”

든든한 말 한마디에 벨라니스는 결국 눈물을 똑 떨어뜨렸다.

“대공 각하만 믿겠습니다. 우리 로아, 더는 아프지 않도록 잘 부탁드려요.”

지금까지는 로아를 너무 고생시켰다. 이 일만 끝나면 이젠 정말로 행복한 시간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에이젠은 굳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덜커덩.

에이젠과 로아가 올라탄 마차는 루베른 백작 저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또다시 깜깜한 어둠을 파고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곧 새벽 동이 틀 것처럼 주위에 은은한 빛이 깃들었다.

루베른 성에 어느 정도 멀리 떨어졌을 때, 로아는 마차를 멈춰 세웠다. 주변엔 키가 큰 교목만이 즐비한 이름 모를 숲속이었다.

로아와 에이젠은 마차에서 내렸다. 뒤쪽에 연결된 짐칸으로 이동했다.

로아는 짐칸의 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직접 잡아당겼다. 짐칸엔 눈이 가려지고, 입이 막히고, 손발이 꽁꽁 묶여 조금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여인이 실려 있었다.

로아는 에이젠을 비롯한 사용인들에게 둘러싸여 여인에게 다가갔다. 가장 먼저 눈을 가렸던 안대를 풀어주었다. 기절해있을 줄 알았던 여인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고개를 드십시오.”

마를레나 트로네.

아주 어릴 적, 처음으로 트로네 대공 저에 방문했을 때 딱 한 번 본 적 있는 여인이었다.

로아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끄집어냈다.

“내 얼굴, 기억하십니까.”

제 입으로 인정하는 꼴을 보아야 했다. 로아는 마를레나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도 풀어냈다.

“나에게 했던 말이 예언이 아니라 저주였던 겁니까.”

로아의 물음에 마를레나는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이 시간 속에선 로아가 마를레나를 찾아간 시점이 아직 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아가 치밀었다. 이 여자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 에이젠이 끔찍하게 죽는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자신의 몸통을 꿰뚫던 칼과 총의 감각도. 마음을 확인하고 겨우 얻어낸 아기를 잃은 고통까지.

“멍청한 년.”

마를레나가 로아에게 처음 꺼낸 첫마디는 욕지거리였다.

“방금 뭐라고…….”

“남자 하나 잘못 골라서 그게 다 무슨 고생이더냐.”

마를레나는 차가운 비소로 로아를 농락했다.

“에이젠 옆에선 너도 똑같이 찢길 듯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너희 둘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

서늘함이 심장에 박혀들어 왔다. 저주를 다시 되새기는 듯한 말에 손끝이 떨려왔다.

“에이젠에게서 도망치는 것만이 너 하나라도 건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를 내치지 않으면 몇 번이고 지옥의 고통을…….”

마를레나는 하려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를레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들어 올린 로아의 손바닥은 마를레나의 뺨을 후려치기까지 망설임이 없었다.

“그 더러운 입 닥치시지요.”

우아하고 고상하게만 자라온 귀족 영애 로아 클라리온.

폭력은 가장 무식하고 저급한 방법이라 배워왔거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로아에겐 끓어오르는 증오감과 복수심에 눈이 멀어 뵈는 게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기 전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