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루비 펜던트
긴 여정 끝에 로아와 에이젠은 트로네 대공 저로 돌아왔다. 사용인들은 짐칸을 열다가 꽁꽁 묶인 여자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넘어졌다.
그 여인의 정체가 며칠 전 주인이 쫓아냈던 새어머니 마를레나임에 두 번 놀랐다.
에이젠은 사용인들에게 마를레나를 그대로 지하실로 옮기라 지시했다.
로아를 위해 멋들어지게 꾸려놓았던 지하실은 시간을 되돌아 다시 칙칙한 감옥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읍, 으으윽, 으흐윽!”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노마님…….”
눈에 익은 사용인들이 대다수였다. 마를레나는 몇 년 전만 해도 이들이 보는 앞에서 에이젠을 학대했다. 그를 체벌하기 위한 도구를 구해오라 시키기도 했다.
이젠 완전히 에이젠의 사용인이 돼버린 자들은 마를레나를 속박했다.
사용인들은 지하실에 마를레나를 옮긴 후 묶었던 밧줄을 풀었다. 그러곤 지하실에서 멀리 도망갈 수 없도록 족쇄를 채워두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통로 역시 막아야 했다. 급한 대로 나무판자를 가져와 망치질을 해두었다.
사용인들이 다급히 움직이는 동안 에이젠은 벽에 기댄 채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격하게 반항하던 마를레나도 이제 지친 듯 가만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제 좀 제풀에 지치셨습니까.”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그의 목소리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마를레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에이젠은 안대를 풀었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위협적인 눈에도 에이젠은 피식거릴 뿐이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지요.”
마를레나는 할 말이 있는 듯 읍읍,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에이젠은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은 풀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해대는 소리는 루베른 영지에서 들었던 것과 별반 달라질 게 없을 것이다. 아직도 눈에 독기가 죽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당했던 만큼만 돌려줄 겁니다. 그 이상의 에너지를 쏟는 건 아깝거든요.”
마를레나가 말했던 대로 고통을 온몸으로 느낄 때까지 죽일 수 없었다.
다시 마를레나의 눈에 안대를 씌웠다. 지하실에 빠져나갈 공간이 없는 걸 한 번 더 확인한 그가 지상으로 올라갔다. 마를레나는 어둠과 적막만이 둘러싸인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채였다.
위로 올라온 그는 사용인들을 불렀다.
“내가 긴말하지 않아도 이해 못 한 사람은 없겠지.”
처음 그가 사용인들의 기강을 잡으려 할 때처럼 장검을 꺼내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학대당하던 둘째 도련님이 마침내 가주의 자리에 올라 얼마나 미치광이짓을 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사용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가주의 뜻에 반했다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에이젠은 느긋한 시선으로 모여든 사용인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러곤 한 사람의 앞에서 멈추었다. 사용인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에이젠은 묵직한 분위기를 품은 채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제인.”
로아는 뒤쪽에 서서 에이젠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에이젠이 주시한 건 로아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했던 제인이었다.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제인의 앞에서 뿜고 있던 기운은 결코 긍정적인 흐름이 아니었다.
“예, 주인님.”
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 숙여 대답했다. 에이젠은 제인의 앞으로 점점 더 다가갔다. 분위기에 압도당한 제인은 뒤로 조금씩 물러나다 등에 서늘한 벽이 닿는 걸 느끼고서야 멈춰 섰다.
쾅-
갑자기 터진 굉음이 온 저택에 올렸다. 에이젠은 눈에 띄게 힘줄이 돋아난 팔을 들어 올려 제인의 옆 벽을 내리쳤다.
사용인들이 놀라 귀를 막거나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로 앞에서 살기 어린 에이젠을 마주한 제인은 하얗게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에이젠!”
로아는 서둘러 에이젠의 옆으로 뛰어갔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제인은 로아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하녀였다. 로아의 눈엔 에이젠이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걸로만 보였다.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로아의 만류에도 에이젠은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제인을 몰아붙였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제인은 당황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로아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제인을 흘겼다. 에이젠이 애먼 사람에게 이럴 리 없었다. 그들에겐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간이었으니까.
제인이 이 저주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생각하던 찰나.
에이젠의 목소리를 통해 그 해답이 나왔다.
“내통했지. 마를레나와.”
제인을 걱정하던 로아의 눈길은 차갑게 식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제인을 마주 봤다.
“…….”
그러나 제인은 간절한 로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아니라는 부정의 말도 하지 않았다.
“주, 주인님. 이러지 마시고 제 얘기도 들어주세요.”
변명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로아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제인은 감히 의심한 적도 없었다.
도망치고 싶을 때도, 에이젠이 아플 때 그의 곁에 갈 수 있게 도와준 것도 모두 제인이었다.
치가 떨리는 배신감에 혼이 다 얽매였다.
“노마님은 결코 나쁜 분이 아니십니다. 좋은 분이세요.”
제인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일말의 신뢰조차 짓밟는 한 마디였다.
“아무리 심성 고운 사람이라 한들, 남편과 아들이 죽었는데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단 말입니까.”
제인은 마를레나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에이젠을 미워했던 이유도, 쫓겨난 이후 극악의 저주를 걸었던 악질적인 행동까지도 전부.
“네 말은…….”
에이젠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꼭 내가 그들을 죽였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잠시 흠칫한 제인은 한 템포 느리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고 한들 속마음은 이미 그렇다고 기정사실화 시켜놓은 듯했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노마님께서 주인님을 의심하는 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제인의 목소리를 자르고 끼어든 건 로아였다. 차갑게 식었던 로아는 서서히 올라오는 열을 참지 못했다. 미칠 듯한 분노에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제인. 너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
제인은 불안한 눈동자를 굴려 시간을 계산했다.
“팔 년 정도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녀가 이 저택에 처음 고용되었을 때, 에이젠은 이미 지하실에 사는 기생인간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에이젠이 마를레나 부인한테 학대당하는 거 봤어, 안 봤어.”
제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물어 새하얗게 질려갔다.
로아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지경이었다.
누가 더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도 가해자 쪽에 붙을 수가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던 로아의 풍부한 인류애가 파사삭 내려앉았다.
“봤잖아. 다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요!”
로아는 저보다 더 목소리를 높이는 제인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원한을 산 사람부터 의심하는 게 평범하지 않습니까?”
뻔뻔한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로아는 이 이상 추악한 인간 앞에서 자신의 체신까지 깎아먹고 싶지 않았다.
심호흡으로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로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그건 죄지은 사람이 제 발 저려서 그러는 거야.”
어르고 달래듯 다정한 투였지만 말 속엔 날카로운 가시를 품은 채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악랄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로아는 제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려 했다. 그러나 제인의 눈동자는 로아를 마주하지 못하고 정신 사납게 굴러다녔다.
“제인. 난 널 믿었어.”
묵직한 숨이 내려앉았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했을 때도 날 위해서 그런 거라 이해하려 했다고.”
마를레나와 똑같이 에이젠에게 악의적인 증오심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언제든 날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줬잖아. 그게 날 위해서가 아니라 에이젠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였어?”
제인은 로아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간 속에서 제인과 로아는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에이젠과 결혼해 로아의 보필을 도맡게 된 것도, 그의 저택에 갇혀 가장 자주 만났던 것도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으니.
“그런데 믿었던 네가 마를레나 부인과 내통하고 있었다니…….”
로아는 분통함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흐느껴 울 것 같은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손바닥을 내린 로아의 낯빛은 180도 바뀌어 있었다.
“더는 널 가만둘 필요가 없어졌어.”
휙 돌아선 로아는 리예드의 앞으로 걸어갔다.
“집사님.”
“예?”
“제인을 마를레나와 똑같이 묶어서 지하실로 데려가세요.”
제인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로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로아의 명령에 사용인들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가씨.”
제인은 불길한 생각에 휩싸였다. 당장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어봤지만 로아와 에이젠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곧 양쪽에서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탓에 원 없이 다 빌지도 못했다.
마를레나는 황실의 핏줄이기 때문에 죽이지는 않겠지만, 한낱 평민에 하녀인 자신은 전혀 달랐다.
그때, 다급한 제인의 눈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 목걸이에요. 이 짙은 붉은빛이 도는 루비 펜던트!”
제인은 로아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가리켰다.
“노마님께서 이 목걸이에 저주를 걸어두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