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기사의 맹약
예상치 못했던 비밀에 로아와 에이젠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인은 저에게 발언권이 주어진 듯한 분위기에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루크티아 성 기사단의 정식 기사로 승인받았을 무렵이었습니다.”
제인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던 로아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견습기사에서 정식으로 서임을 받으려면 관례적으로 본가에 들러 인사를 하셔야 해서 들르신 적 있습니다.”
지금 시점으로부터 약 2년 전. 에이젠은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 기사가 되어 돌아오신 주인님에 대한 소문은 성내에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마를레나는 에이젠이 기사가 되어 출가하겠다는 것에 적극 동의했다. 그가 귀족 가문의 기사가 되어 밑바닥부터 시작하든 말든 한집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가장 혹했다.
“주인님이 성내에서 가장 고귀하고 값비싼 보석 위주로 둘러보았다는 말로 들려왔습니다. 노마님은 주인님께 여자가 생겼다는 걸 그때 눈치채신 거죠.”
마를레나는 에이젠이 집에서 출가하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했다. 정의로운 기사가 되었다는 것은 언제든 명예를 드높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에이젠은 이미 ‘트로네’의 성을 가진 자로서 남들보다 우위에 선 셈이었다. 평범한 기사가 아닌 제국에서 이름을 알려 승승장구하게 될 것이 어렴풋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주인님이 저택에 들러 잠시 방심하셨던 사이…….”
제인은 뒷말을 머뭇거렸다. 로아와 에이젠의 눈치를 한번 살핀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주인님이 가져오신 보석을 저주의 매개체로 사용하신 겁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충격적인 사실에 에이젠은 놓을 뻔한 정신을 겨우 붙든 채 제인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저주였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모한 여자에게 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귀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고심 끝에 고른 선물이었다.
로아 역시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주었고, 소중히 간직했다.
에이젠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던 때에도,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신부가 되었을 때도. 로아는 루비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걸이가 두 사람을 불행으로 이끈 저주의 물건이었다니.
마른침을 삼킨 에이젠은 착잡함에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그 지옥의 굴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저주였습니다.”
그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고통의 굴레에 영원히 갇히기를.
저주의 힘이 처음부터 강한 건 아니었다. 에이젠을 향한 마를레나의 증오심이 커질수록, 그에게 일어나길 바라는 불행이 구체적이 될수록.
저주는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게, 저주의 목걸이였다고?”
로아는 제 목 위에서 고고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루비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사랑하는 남자 에이젠이 처음으로 선물해준 가장 소중한 물건.
죽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가져가고 싶었던 이 목걸이가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그리고 에이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물건이었다.
투둑.
펜던트를 꽉 쥔 로아는 그대로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줄이 끊어지면서 여린 목덜미 살에 상처를 냈다.
꽉 쥐고 있던 손가락을 풀었다. 손바닥 안에 든 펜던트를 내려다봤다. 줄은 형편없이 끊어졌어도 붉은 빛깔을 내는 루비 펜던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로아는 거침없이 펜던트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에이젠이 보는 앞이었는데도 로아의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선물해준 소중한 물건이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도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
휙 돌아선 로아는 2층으로 올라갔다. 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이젠의 눈동자는 제인에게로 돌아갔다.
“가둘 필요도 없어.”
“……네?”
“없애.”
***
제인의 결정적인 증언 덕분에 저주를 걸어둔 매개체는 제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제인을 용서한 건 아니었다. 로아는 본래대로 제인을 지하실에 가두었다. 또한 저주의 루비 펜던트를 눈앞에서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숴버렸다.
그러는 동안 해는 기울고 어수룩한 어둠이 찾아왔다.
로아와 에이젠은 몸을 씻고 침실로 들어왔다.
네 번째 회귀를 한 이후로는 편하게 눈을 붙여본 적이 없었다. 온 육신과 정신이 피로감에 지배당해 있었다.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으로 쉬이 잠이 오지도 않았다.
나란히 침대에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하게 허공만 바라봤다.
“저주가 풀렸을까.”
먼저 말문을 튼 건 로아였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에이젠이 그리웠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로아는 고개를 기울여 에이젠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적어도 더는 시간을 되돌아가지 않을 거야.”
에이젠은 손을 들어 올려 로아의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정말 죽으면 끝인 건가?”
더 이상 뒤틀린 운명을 바꿀 기회는 없었다. 로아는 또다시 머릿속에 에이젠이 죽어가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나 에이젠이 죽는 거 더는 보기 싫어…….”
두 팔로 에이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피부가 닿고, 살아있다는 온기도 느껴졌다. 그런데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쉬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럴 일 없어.”
로아의 머리칼을 쓸어넘긴 에이젠은 봉긋이 드러난 그녀의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려놓았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닿았다 떨어진 입술의 촉감이 좋았다.
“황실 무도회가 열리기 전에 결혼식부터 올리자.”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처음 결혼했을 때처럼 성대한 결혼식은 올릴 수 없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금 시점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에이젠은 로아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라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로아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동안 혼자 애쓰느라 고생했어.”
로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던 것처럼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는 왜 나와 비슷한 크기의 사랑을 해서 나처럼 아프려고 하는 건지. 그저 온실 속 화초처럼 예쁘고 사랑스럽게 늘 웃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어울리는데.
“이제부턴 전부 나한테 맡겨.”
에이젠의 위로에 불안하게 쿵쿵대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해줄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좋았다. 저를 끌어안아 주는 그의 팔도. 은은하게 닿는 숨결도.
고개를 든 로아는 에이젠을 마주 봤다.
“널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고, 나도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붉은 눈동자도 좋았다.
“에이젠…….”
저들을 불행의 굴레에 빠뜨린 모종의 사건만 쫓느라 에이젠이라는 사람 자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울지 마, 로아.”
에이젠은 로아의 뺨을 적신 축축한 눈물 자국을 훔쳐냈다.
“슬피 우는 건 오늘을 마지막으로 해.”
에이젠은 두 손바닥으로 로아의 조막만 한 얼굴을 감쌌다. 가까이 다가선 그는 흘러내린 로아의 눈물을 핥았다.
느른한 그의 입술은 예민하게 달아오른 귓가로 이동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 지금 이 시간 속 나에게만 집중해.”
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힘을 풀고 에이젠에게 편히 기댔다.
“하, 흣…….”
뜨거운 혓바닥이 귓바퀴를 훑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조심스럽게 감싸기도 했다. 자극적인 감각에 로아는 야릇한 신음을 냈다. 그의 손은 로아가 놀라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올라왔다. 굴곡진 허리를 따라 올라가 풍만한 살결을 감싸 쥐었다.
흥분감에 휩싸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이 순간만은 뒷일 따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에이젠과 사랑을 나누고 확인하는 이 행위에만 집중했다.
“사랑해. 사랑해, 에이젠.”
행위만으로는 부족했다. 에이젠과 몸이 완전히 밀착될 정도로 끌어안은 로아는 말로도 제 마음을 전했다. 로아의 목덜미로 파고들던 에이젠은 잠시 흐름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로아를 내려다봤다. 흥분에 겨워 반쯤 풀린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런 말은 남자가 먼저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거야.”
에이젠은 로아를 보며 피식거렸지만, 로아는 그를 따라 웃어주지 못했다.
“못 기다려.”
마음을 전하는 순간만큼은 진지하고 싶었다.
“마음이 급해. 언제 에이젠이 내 손끝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 팔로 두 다리로 그를 꽉 끌어안아도 모자랐다.
“사라지지 않아.”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져.”
여전히 울먹이는 로아를 침대 위로 눕혔다. 그 위로 올라온 에이젠이 만들어낸 그림자 안에 완전히 지배된 채였다.
“사랑해, 로아.”
맞잡은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와중에도 눈으로는 로아의 눈을 집요히 좇았다.
“사랑해, 사랑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도록. 그녀의 가슴속 깊이 저의 진심을 새겨넣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게. 절대 떠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을게.”
남녀의 몸이 완전히 포개어졌다. 에이젠은 로아가 입고 있던 슈미즈를 붙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위에 목걸이를 잡아 뜯으며 생긴 생채기가 오점처럼 남아 있었다.
“약속해.”
에이젠은 여린 살결 위 상처를 핥았다. 로아는 간지러운 감각에 몸을 꿈틀거렸다.
목덜미 살결, 쇄골, 둥근 어깨. 곳곳에 입을 맞추며 붉은 울혈을 남겼다.
“기사 에이젠 경의 맹약, 레이디 클라리온에게 바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