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밀고
루베른 영지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바로 결혼식을 준비했다.
에이젠과 로아의 첫 결혼식은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아주 맑은 날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인물로서 그 규모도 매우 성대했다. 신부인 로아를 위해 준비한 결혼식, 웨딩드레스, 예물과 예단까지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서두른 결혼식은 그때의 결혼식과 사뭇 달랐다.
“전쟁 영웅의 결혼식이라 하여 성대하게 치러질 걸 예상했건만, 생각보다 조촐하네?”
값비싸고 귀한 보석이나 드레스를 구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허례허식은 포기하기로 했다. 서로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으니 그 어떤 미련도 두지 않았다.
“그러게. 대공비가 될 백작 영애가 신실한 종교인이었던 모양이지?”
“아아. 그럼 그럴 수 있지.”
결혼식에 많은 사람을 초대하지도 않았다. 수도까지도 가지 않았다. 정국의 인사들 또한 대부분 참석하지 못했다. 에이젠이 로아를 보호하기 위해 하객 인원에 제한을 두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클라리온 영지에 있는 가장 큰 성당을 빌려 신성한 결혼을 맹약했다. 종교의 뜻이 없는 자 역시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결혼식을 마친 후 로아는 가족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지체할 시간 없이 트로네 성으로 가야만 했다. 황실 무도회 초대장을 받기 전까지 떠나야 했다.
트로네 대공 저에 도착하고도 신혼을 즐길 새는 없었다. 에이젠은 사용인들을 한데 불러모았다.
“곧 황실에서 마를레나의 실종에 관련한 조사 협조 공문이 내려올 것이다.”
사용인들은 원래도 에이젠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귀환한 이후로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그가 점점 더 두려워졌다.
쫓아냈던 마를레나를 다시 잡아들여 가두어놓는 변덕하며,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은 내부자를 정확히 잡아냈고, 이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예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가 마를레나의 친아들도 아닌데 미래를 내다보는 신기라도 물려받게 된 건지.
딱딱하게 굳은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너희들이 무엇을 진술해야 하는지 알겠나.”
에이젠은 이번에도 사용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피했다.
“마를레나는 실종된 적 없어. 계속 이 저택 안에 숨어 있었던 거야.”
에이젠의 시선은 리예드 앞에서 멈춰 섰다. 리예드는 차마 그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듯 에이젠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스스로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긴 거다.”
리예드를 따라 다른 사용인들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대답했다.
“단 한 놈이라도 진술의 합을 맞추지 않았다간.”
섬찟한 가정과 함께 에이젠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 보였다.
“사용인 전원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
서슬 퍼런 칼날보다 섬뜩한 건 살의 가득한 그의 눈동자였다. 눈빛과 달리 입꼬리는 모순적이게도 웃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겁에 질린 사용인들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좀 더 우렁차게 대답했다. 에이젠은 보여주었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너희들은 마를레나가 나를 숨기고 죄를 숨길 때부터 다 같이 입을 모아 거짓 진술을 하곤 했잖아.”
여태껏 그들이 저지른 방관을 되새겨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러니 이 또한 어렵지 않을 거라 믿겠다.”
***
살얼음판같이 꽁꽁 얼어붙은 분위기였다. 과거엔 로아의 존재만으로 에이젠이 사르르 녹아내리곤 했으나 이번 시간은 달랐다. 그는 집 안에서도 로아를 지키기 위해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녀가 잠깐이라도 눈 밖으로 사라지면 불안함에 치를 떨었고, 이는 로아도 마찬가지였다.
달콤한 휴식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에이젠은 다시 정무를 보기 위해 나가야 할 일이 많았다. 황실 무도회가 끝난 이후 처음으로 황실에 용무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에이젠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이날을 떠올렸다. 유다르가 처음 자신의 반역을 의심했던 날로,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다녀올게, 로아.”
“응.”
서로 떨어져야 할 시간. 앞으로 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이 시간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도 필요했다. 로아와 에이젠은 저택 앞에서 포옹을 나누었다.
에이젠이 먼저 로아를 놓으려 했다. 그러나 로아는 그의 허리를 둘러 안은 채 두 손에 깍지를 꼈다. 그와 떨어지지 않으려 버텼다.
“안 놔줄 거야?”
에이젠의 가슴팍에 고개까지 묻었던 로아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로아는 손에 힘을 스르륵 풀었다.
“돌아올 거지?”
맑디맑은 푸른 눈동자가 불안감에 휩싸인 듯 잘게 떨렸다.
“당연하지.”
에이젠 역시 이 시간이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로아와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저까지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면 로아가 마음을 놓을 수 없을 테니.
“늦지도 않을 거지?”
“그럼. 일찍 올게.”
달콤하게 달래는 말에도 로아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상체를 숙인 에이젠은 두 손으로 로아의 뺨을 감쌌다. 곧 두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움직임이 느릿한데 가슴 깊숙한 곳까지 간지러운 키스였다. 고개를 비튼 에이젠은 입술을 살짝 떨어뜨렸다. 입술 사이 거리가 아직도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믿어줘, 로아.”
서로의 숨소리가 섞였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로아는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리다 눈을 들어 올렸다.
“응. 기다릴게.”
겨우 안심할 수 있는 대답을 받아냈지만, 로아는 여전히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까치발을 든 로아는 두 팔로 에이젠의 목을 한 번 더 껴안았다.
***
“결혼 축하하오, 트로네 공.”
예상대로였다. 에이젠은 맞닥뜨린 유다르를 보며 최대한 이성을 유지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은 내가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소.”
“괜찮습니다.”
“그래, 신혼집은 잘 꾸렸소?”
이 흐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 책잡힐 말은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네만, 공의 모친과 처의 사이는 어떻소?”
유다르는 계획대로 에이젠을 함정에 빠뜨릴 첫마디를 꺼냈다.
“이제부터 함께 살아야 하는데, 고부 갈등 같은 건 없나 해서.”
하지만 당황할 건 없었다. 그땐 마를레나의 출생에 관심도 없어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처할 방법까지 전부 준비해놓은 뒤였다.
“그런데 마를레나 트로네, 그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
유다르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에이젠은 그의 계획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위치에 떳떳하게 서 있었다.
“저택에 있습니다.”
“뭐?”
에이젠의 대답에 유다르는 되레 놀란 듯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저택에 아주 잘 계신다 말씀드렸습니다.”
당황한 유다르가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밀고받은 정보와 사실이 전혀 달라서였다.
“그럴 리가. 감히 누가 이 황태자에게 잘못된 밀고를 한단 말인가.”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저택에 방문해서 똑똑히 확인하시지요.”
에이젠의 당당한 태도에 유다르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가장 얕보이기 싫은 트로네 대공 앞에서 잘못된 정보를 홀랑 믿어버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게 된 셈이었다.
“먼 길 행차할 필요 없이 태자 저하 앞까지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 내 자네 말만 믿을 순 없으니 직접 확인하는 게 필요하겠어.”
유다르는 여전히 에이젠의 말을 다 믿지 못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 외에도 에이젠의 책을 잡기 위해 조사한 것들을 떠올려보는 모양새였다.
“제국의 대공작에 오른 자네를 뒤늦게나마 알아봤네.”
이번에도 에이젠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챘다.
“선대의 적자가 아니던데.”
이번엔 출신으로 꼬투리를 잡았다. 마를레나 황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위대한 전공을 세운 그가 겨우 출신 따위로 책잡히기는 힘들 것이다.
“21년 전, 대공 저에서 일하던 하녀가 계획도 없이 임신해서 쫓겨났고, 숨어 살면서 아이를 낳았다. 12년 뒤 그 하녀는 소리소문없이 죽고, 아이는 트로네 대공 부부가 거두어 키웠다…….”
그런데도 유다르는 어떻게든 무리수를 던져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게 자네 아닌가? 시기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태자 저하.”
에이젠은 유다르의 말을 끊어냈다. 유다르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듯 미간을 찌푸리며 에이젠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제국의 황태자의 기에 눌리지 않았다.
“저하께서 견제해야 할 사람은 서자 출신으로 대공작 직위에 오른 제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저를 견제하는 거라 치부했다. 의도를 들킨 유다르는 수치를 느꼈다.
“오필리안 황자.”
유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의 대화에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씩 미소 지은 에이젠은 좀 더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에이젠은 어리석은 황태자에게 견제의 화살표를 비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