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94)화 (94/107)

94. 붉은 눈동자

유다르는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생각지도 못한 밀고였다.

“……트로네 공.”

떨리는 목소리가 동요하는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에이젠 트로네가 이런 걸로 거짓을 고할 리는 없었다. 전공을 세우고 최고로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선 그였다. 그러니 굳이 자신의 명성을 깎아내릴 일을 자처하진 않을 것이다.

“자네가 한 말, 책임질 수 있어?”

“저는 언질을 드렸습니다.”

유다르의 물음에도 에이젠은 여유로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 뒤를 어떻게 하실지는 태자 저하의 손에 달린 것이지요.”

유다르는 에이젠을 따라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만일 에이젠 트로네의 밀고가 거짓으로 판명 난다면, 그는 황실에 혼란을 야기하고 감히 황자를 폄하한 것이 된다. 낙인찍힌 후엔 반역자로 몰아가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저는 오늘의 정무가 끝나면 저택에서 어머니를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유다르를 향해 고개를 숙인 에이젠은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유다르는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만에 하나 에이젠의 밀고가 사실이라면?

오로지 제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인물에게만 포커스를 맞추었다. 늘 위만 바라보곤 했다. 저보다 위에 있는 자를 처치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독차지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저와 같이 아래에서 위를 넘볼 거라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유다르는 에이젠을 반역자로 몰아 그가 거머쥔 권력과 명예, 재산을 모두 빼앗을 심산이었다.

그가 실제로 반역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철저한 계획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애먼 이를 반역자로 몰아가는 동안, 예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 실제로 반역을 준비하고 있었다라…….

만일 반역이 일어났을 때 에이젠 같은 전력이 없다면 그 반역을 확실히 진압할 수 있을까.

에이젠의 도움으로 반역이 진압된다면 또다시 그에게 공이 돌아갈 것이다.

유다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에이젠이 사라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다르의 호위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펙토르, 잠깐 얘기 좀 하지.”

유다르는 펙토르만 따로 불러냈다.

그는 불안한 시선을 가만두지 못했다. 주변을 다 훑은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오필리안에게서 요즘 수상한 기색이 보였느냐.”

유다르와 마찬가지로 펙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큼 오필리안에게서 특별한 변화를 감지한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짓 밀고라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가 진짜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아주 철저히 준비 중이란 뜻이었다.

수상한 기색이 없다는 말에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에이젠의 밀고는 제 전공과 명예를 전부 건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자꾸만 신뢰가 갔다.

유다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턱을 매만지던 펙토르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새 황궁 밖을 나갔다 오시면 귀가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늦어졌다고 보고 들은 바 있습니다.”

낌새가 있었다. 유다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래?”

최고 권위자로서 혈연에게까지 경계를 세우는 건 그리 특수한 상황도 아니었다.

“오필리안이 궁 밖에서 무얼 하고 다니는지 알아야겠다.”

***

정무를 마친 에이젠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로아는 그가 올 시간에 맞추어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고 바람이 선선해서 테라스에서 저녁 먹으면 좋을 거 같은데 어때?”

“로아가 원하는 대로.”

에이젠이 약속대로 돌아와 주었고 늦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로아는 매우 들떠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천천히 서로에게 신뢰를 주는 관계가 된다면 두 사람이 행복을 찾는 일은 그리 머지않았을 터였다.

가만히 있지 못한 로아는 주방으로 들어가 사용인들을 도왔다.

겉옷만 벗은 에이젠은 곧장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가 귀가하자마자 확인해야 할 일은 두 가지로 늘어났다.

첫 번째는 로아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 두 번째는 마를레나가 도망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

지하실로 내려온 에이젠은 칙칙한 바닥에 쓰러진 마를레나를 발견했다. 옆에 두었던 의자에 앉은 그가 그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마를레나의 옆엔 반쪽짜리 빵이 있었다. 한 조각도 아닌 반 조각. 수년 전 마를레나가 에이젠에게 주었던 식사량이었다. 마를레나는 무슨 심보인지 이 적은 식사마저 거부했다.

“그동안 답답하셨지요.”

에이젠의 서두에 마를레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걸로 보아 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에이젠은 그녀의 상태가 어떻든 제 할 말만 전하기로 했다.

“내일은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갈 겁니다.”

그 이유까지 말해줄 필욘 없었다. 용건을 마친 에이젠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미동 없던 마를레나의 고개가 에이젠 쪽으로 돌아갔다.

“감히 날 이 어둡고 칙칙한 지하실에 가두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에이젠은 뒤를 돌아보았다. 며칠이나 가두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반쪽짜리 빵도 먹지 않았다. 남은 체력도 없을 텐데. 마를레나의 독기 어린 눈은 여전히 강한 기운을 뿜었다. 증오심에 가득 찬 목소리 또한 쩌렁쩌렁했다.

“황실은 내 핏줄이다. 네 말을 믿을지, 내 말을 믿을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대충 자신이 황실로 가면 그의 만행을 일러 피 보게 해준다는 협박 같았다.

그러나 에이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왜 황녀 출신이란 걸 숨기고 살아야 했는지, 그걸 좀 알아봤습니다.”

에이젠은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들고 마를레나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더니 바닥에 파묻힌 마를레나의 바로 눈앞에 의자를 탕 내려놓았다. 마를레나는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변하지 않았다. 위협을 가하는 에이젠을 향한 증오심은 조금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이었다. 에이젠은 마를레나의 고집에 혀를 내둘렀다.

“당신이 좋아하는 흑마술이나 점성술은 황실 내에서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마를레나의 눈앞에 앉은 에이젠은 상체를 굽혀 발밑의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흑마술에 대한 연구를 하다 황실의 위상을 떨어뜨린단 이유로 퇴출당했고.”

누군가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술과 주문은 한 제국을 상징하는 고귀한 황족 혈통과는 거리가 있었다. 마를레나는 그 이유로 황실에서 퇴출당하고도 흑마술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운 좋게 트로네 대공작의 부인이 되어 신분을 세탁하고 살았다…….”

마를레나는 저를 내려다보는 에이젠의 얼굴에서 그의 생모를 떠올렸다. 대공 저의 하녀였던 그녀는 특이하게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를레나는 그 하녀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가 흑마술과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하녀에게 흑마술을 알려준 적 있었다. 그녀도 흑마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배우고 익히려 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남편과 바람이 나고 아이까지 가졌다. 그 후 쫓겨난 하녀는 자신에게 배운 흑마술로 저에게 저주를 걸었다.

언젠간 자기 아들이 커서 모두 다 박살 내고 빼앗아버릴 거라고.

“남편과 아들이 죽어 미쳐버린 후 제국의 귀중한 전력인 트로네 대공을 이따위 것으로 음해하려 했다.”

에이젠은 마를레나가 루베른 영지에서 운영했던 점성술집을 모조리 털어왔다.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에이젠과 로아를 향해 저주를 걸었던 물품이나 주술서가 한가득 나왔다. 흑마술을 죄악으로 치부하는 황실에서 치를 떨 만한 증거품들이었다. 거기에 황실에 막대한 전공을 세운 주요전력이 그 대상이라니.

아무리 황녀 출신이라 한들, 면죄받기는 힘들어 보였다.

“당신 말대로 궁금해졌습니다.”

의자에서 내려온 에이젠은 마를레나의 앞에 앉았다.

“우리 둘의 엇갈리는 진술 속에서, 황실이 어느 쪽의 팔을 들어줄지 말입니다.”

그녀의 양 뺨을 꽉 붙잡고 제 얼굴을 보게끔 했다.

“당신 덕분에 미래를 보고 돌아온 난 황실 어디에 지뢰가 심어져 있는지 알게 됐거든.”

에이젠은 확실한 반역자를 밀고했다. 더 이상 황실에서 저를 반역자로 몰아가려는 같잖은 짓 따윈 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그가 시간을 돌아 저주를 건 마를레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이미 이 승부의 승패는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날 지옥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으면 확실하게 죽여버렸어야지.”

욕심이 부른 화였다. 에이젠에게만 저주를 걸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를레나는 그 정도 고통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파멸되는 순간을 지켜보게끔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애먼 희생자가 필요했다. 온전하지 못한 저주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저에게 돌아왔다.

“내가 지독하게 살아 돌아온 이상 당신은 무사할 수 없어.”

에이젠은 꽉 쥐었던 마를레나의 얼굴을 놓아버렸다. 무거운 머리가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원래는 내가 당한 만큼만 갚아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분이 안 풀려서 안 되겠어.”

마를레나는 붉은빛이 더욱 짙어지는 에이젠의 눈동자를 공허하게 바라봤다.

“나보다 더하면 더할 지옥을 경험하게 해줄게.”

경멸에 가득 찬 것이 그 하녀와 똑 닮은 빛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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