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충언
평화에 안주해가려던 찰나에 모종의 사건은 터진다.
“저하!”
유다르는 건너편에서 체통 없이 뛰어오는 신하를 같잖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무슨 소란이냐.”
유다르의 앞에 멈춰선 그가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더니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오필리안 황자님의 반역 도모 혐의가 발각되어 황실수사단에서 긴급 체포를 이행했습니다.”
유다르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타격감을 느꼈다. 에이젠의 밀고가 맞았다.
“……뭐?”
설마설마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제발 에이젠의 밀고가 틀렸기를 바랐다. 황족 혈통인 오필리안을 반역자로 내세우는 것보단 경계하고 질투하던 대상을 제거하는 게 더 편할 테니.
그러나 세상사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없었다.
제거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상대에게 되레 은혜를 진 셈이었다.
“오필리안 쪽에 붙었던 귀족들과 기사들까지 전부 잡아들였습니다.”
신하는 오필리안의 반역 계획에 가담했던 이들의 리스트를 유다르에게 넘겼다.
유다르의 생각보다 많은 황실 관계자들이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혀 티가 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티가 안 났던 게 아니라, 모두 알고도 눈 감았던 격이었다.
“믿었던 것들까지 전부……!”
오필리안의 최측근 기사들과 하인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유다르 쪽에 기울어있던 인사들 또한 몇 포함되어 있었다.
제 앞에선 그의 편을 들었던 자들도 속으론 다른 사람을 옹호하고 있었다.
유다르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했던가. 자신은 이 제국의 황제가 될 자격이 있긴 한 건가. 반역을 일으키더라도 황자 오필리안이 저보다 나았던 건가.
“오필리안이 음모를 계획하던 아지트에서 가져온 증거품들입니다.”
신하는 유다르가 길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또 다른 무언가를 내밀었다. 상세히 짜인 계획서를 보던 유다르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
황실 내부 지하실에 깊숙이 위치한 구치소. 오필리안을 비롯한 반역 계획에 가담한 자들은 이곳에 붙잡혀 있었다.
“태자 저하께서 직접 신문하러 오실 겁니다.”
그중에서 오필리안은 신문을 위해 잠시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신문실에 앉아 기다리던 오필리안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미치도록 빼앗고 싶었던 황태자 자리의 주인, 유다르였다.
“오필리안.”
유다르의 부름에도 오필리안은 피식거릴 뿐, 오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다르는 몰수한 증거품을 그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네 아지트에서 발견한 계획서다.”
오필리안은 양손이 포박된 채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눈동자만 떨구어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계획서를 내려다봤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계획서를 작성하기 위해 들인 시간만 1년 그 이상일 것이다. 이제는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무용지물인 계획서였다.
“하, 동선까지 완벽하게 다 짜두었는데.”
오필리안은 안타까움의 한탄 소리를 냈다. 헛웃음까지 섞인 채였다. 유다르는 오필리안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계획에 실패해 정신을 놓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중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아깝지만 내 사람들을 위해 다 인정하겠습니다.”
거기다 쿨하게 인정하기까지 했다. 비록 반역 도모죄로 잡혀들어오긴 했지만, 그는 저 혼자만 살기 위해 황족이라는 면죄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계획에 가담해준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유다르는 그런 오필리안을 보며 저보다 더 많은 이들이 따랐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자신감을 잃기 전, 그는 계획서로 초점을 돌렸다.
“내 결혼식을 이용하려던 셈이었군.”
이해하기 힘든 계획서였다. 유다르는 몇 년째 혼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기약 없는 계획을 언제까지 꿍쳐두려고만 했는지.
“멍청하긴. 아직 정혼자가 정해진 것도 아닌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계획을 뭐 이리 세밀하게 짜둔 거야.”
실현 가능성 없는 계획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이 또한 멀리 내다보지 못한 유다르의 실수였다.
“형님은 로아 클라리온을 억지로라도 데려와 신부 자리에 앉히려 했을 테니까.”
“……뭐?”
오필리안은 빈틈을 보이는 유다르를 볼수록 계획을 성사하지 못한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형님과 가까이 지내는 신하들로부터 다 들었습니다.”
은밀하게 상체를 숙인 오필리안은 유다르의 눈을 똑바로 보며 속닥거렸다.
“제국의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에이젠 트로네의 정혼자를 탐내고 있다고.”
유다르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가 에이젠 트로네의 정혼자 로아 클라리온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최측근인 소수의 몇 명만 아는 사실이라 생각했다. 신하를 너무 믿은 것 또한 황태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안일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나날이 드높아지는 에이젠 트로네의 명성을 질투하고, 제 자리를 잃을까 겁나서라고.”
유다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필리안은 그런 유다르를 보며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턱을 치켜든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문을 받는 입장이면서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오만방자한 태도였다.
“너 지금 무어라 지껄이는 것이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유다르의 목소리에 오필리안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유다르는 팔짱을 낀 채 오필리안의 웃음이 멎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비단 여인을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제국민들이 충성을 다하는 그를 깎아내리고 그 자리를 꿰차려 했겠지.”
오필리안은 유다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흠칫거리는 유다르를 본 오필리안은 입꼬리를 싹 말아 올렸다.
“왜, 내 말이 틀렸습니까? 형님은 겨우 그 정도밖에 그치지 않는 사람인 걸 인정하기 싫습니까?”
오필리안은 비록 반역엔 실패했지만 여전히 굴하지 않고 있었다.
유다르에게 당신은 황태자로서 자격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 입 닥치지 못해!”
그 의미가 확실하게 와닿은 유다르는 치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흥분한 유다르에 비해 오필리안은 되레 차게 식었다.
“이렇게 된 김에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오필리안의 차분해진 모습에 유다르 역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형님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에이젠 트로네를 이길 수 없습니다.”
유다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 어떤 신하들도 알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참고 또 참았던 말. 아무도 하지 못했던 말을 모두를 대신해 오필리안이 전했다.
“대공작의 명예와 권위에 짓눌린 무능한 황제가 되고 말겠지.”
유다르가 무어라 반박하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 반역 행위가 발각되기 전까지,”
그러나 먼저 튀어나온 오필리안의 목소리는 유다르가 말할 틈조차 빼앗았다.
“에이젠 트로네를 반역 행위자로 의심했었지요?”
허를 찌르는 오필리안에 유다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신문하는 자이고 당하는 자인지.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뀐 듯했다.
“일말의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자에게 누명을 씌울 계획을 하고 있었지요?”
질투심에 눈이 멀어 하마터면 제국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오필리안은 유다르 스스로가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제국을 대하고 있는지를 알게 했다.
일전에 전쟁이 일어난 것도, 결혼을 미루어 각종 외교에 피해를 끼치고 있는 것도 전부 유다르의 탓이었다.
“나를 잡아넣은 것 또한 누구의 공이 되는지 잘 생각해보시오.”
이번 밀고 역시 에이젠이 아니었다면 오필리안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다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오필리안은 신문하러 와서 나약한 모습만 보이는 유다르를 보며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충언드리겠습니다.”
평소라면 황자가 감히 황태자에게 건방지게 말을 얹느냐 버럭했을 유다르였다. 그러나 유다르는 이번만은 잠자코 오필리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주의를 집중하듯 잠시 뜸을 들인 오필리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유다르가 가장 듣기 싫어할 말을 충언이랍시고 꺼냈다.
“에이젠 트로네 옆에 붙으시오.”
미간을 좁힌 유다르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오필리안은 그가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도 할 말을 이어갔다.
“그를 몰아내는 것보다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그와 함께 가는 것이 형님이 그나마 괜찮은 황제가 되는 길인 겁니다.”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저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지적당한다면 막연히 불쾌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들으니 그러지도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유다르는 오히려 저보다 충신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던 오필리안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형님이 황태자 직에서 물러나는 것이겠지만요.”
유다르는 황태자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반면 오필리안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점점 크게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