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96)화 (96/107)

96. 신의 뜻

오필리안이 반역 행위를 모두 인정했다. 에이젠이 최초로 유다르에게 밀고한 덕분에 두 사람의 공이 한 번에 인정됐다. 만일 에이젠이 유다르가 아닌 오필리안 쪽에 붙었다면 정말 황실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필리안이 아니더라도 다른 제3의 인물과 힘을 합쳤다면 그에게로 공이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유다르는 에이젠이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저에게 밀고했는지 의아했다.

그가 자신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

아니, 촉이 좋고 민첩한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유다르를 선택한 건, 어쩌면 일말의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신임을 줄 테니 다시는 저를 반역자로 몰아갈 획책 따위는 꾸리지 말라고.

에이젠은 오필리안의 반역을 밀고한 공을 인정받아 황제의 알현실로 향했다. 제국 최고 인사로서 대접을 받고 부족함 없는 재물 또한 하사했다.

유다르는 알현이 끝날 때까지 그 앞에서 기다렸다. 긴 기다림 끝에 에이젠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기사들이 그를 호위한 채였다.

“트로네 대공.”

유다르는 에이젠과의 시간을 놓칠세라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멈춰선 에이젠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공 덕분에 잘 해결되었소.”

저를 대하는 유다르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전쟁을 마치고 황제를 알현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알현해주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 번의 회귀를 겪으면서 가장 찢어 죽이고 싶었던 인물은 유다르였다. 사랑하는 로아를 빼앗아갔고, 그녀에게 온갖 정신적 고통을 선사했을 악의 축. 제 숨의 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여자를 내어줬더니 죽음에 몰리게 한 남자. 에이젠은 당장이라도 이빨을 드러내고 싶은 것을 애써 감추었다.

“그런데 오필리안이 계략을 꾸미고 있단 건 어떻게 안 것이오?”

유다르는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을 내비치며 물었다.

“황실 관계자들을 모조리 조사에 참여시켰지만 그 아무도 오필리안과 그 일당에게서 낌새를 느끼지 못했소. 그 정도로 철저하고 비밀스럽게 꾸며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트로네 공이 알아차렸는지 궁금하군그래.”

에이젠은 둘의 주변을 둘러싼 호위기사들을 둘러봤다. 에이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챈 유다르는 그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키라는 눈짓을 보냈다. 기사들이 물러가고서야 에이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순 있지만 믿기 힘들 것입니다.”

“공이 무슨 말을 하든 믿을 테니 어서 말해보시오.”

유다르는 두 눈을 번쩍거렸다. 그 빛깔이 같잖게 보인 에이젠은 헛웃음을 픽 흘렸다.

“미래를 본 적 있습니다.”

그러곤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냈다.

에이젠 트로네만의 적을 색출해내는 특별한 비결이 있는 줄 알았건만 근거 없는 말에 유다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젠은 유다르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하던 말을 이어갔다.

“태자 저하의 결혼식이 아주 성대하게 치러진 때였습니다. 오필리안 황자님과 그 일당은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에이젠은 보여준 적도 없는 오필리안의 반역 계획을 그대로 읊었다.

“그걸 공이 어떻게…….”

헛소리라 생각했던 유다르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그럼 그때 내가 누구와 결혼했는지도 보았소?”

그 와중에 유다르의 관심사는 상상치도 못한 곳이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사태의 심각성에 중점을 두지 않아서인가. 그럼에도 제 신붓감에만 관심을 보이는 유다르를 보며 에이젠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희미하고 어렴풋해 신부의 얼굴까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워낙 급박했던 상황이었다 보니.”

둘러대는 에이젠의 말에 유다르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공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소.”

“거창하게 능력이라 불릴 것도 없습니다.”

에이젠을 바라보는 유다르의 눈빛이 방금 전과 또 달라졌다.

“지속적으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상하게 그날만 자꾸 아른거렸습니다. 제국을 위험에서 구해내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국을 구할 수 있는 자는 당신이 아닌 바로 나.

에이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게 현실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니. 그건 뭐 때문이오?”

유다르의 물음에 에이젠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느른하게 먼 산을 보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유다르에게 내려와 꽂혔다. 일순, 붉은빛이 선명하게 이채를 띠었다.

“태자 저하께선 저를 의심하셨잖습니까.”

유다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를 반역자로 의심하던 사이, 진짜 반역자는 그 틈을 노렸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여, 역시 알아차렸군. 공에겐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무래도 공의 명예가 날이 갈수록 드높아지니 질투하던 자들이 거짓 밀고를 했던 모양이오.”

유다르는 당황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를레나 트로네 역시 무사했고.”

에이젠은 마를레나의 이름에 잠시 흠칫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를레나 트로네?”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젠은 마를레나의 생사를 알리기 위해 황실로 데려왔다. 황실로 넘어간 그녀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들은 게 없었다.

“판결이 나는 대로 공에게도 전달될 것이오.”

“판결이라니, 처음 듣습니다.”

“진행 상황을 조금만 알려주자면 그녀는 제국의 영웅인 자네를 근거 없이 폄하하는 발언을 하고 있소.”

아마도 마를레나는 자신이 겪은 일을 고했을 것이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에이젠 트로네가 저를 내쫓았다가 다시 지하실에 가두어둔 일. 그러나 이미 한 번 쫓겨난 적 있는 황녀와 전쟁 영웅의 엇갈린 진술의 신뢰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에이젠은 마를레나가 저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던 증거품들을 제출했다. 마를레나의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사용인들의 증언뿐이었는데, 트로네가의 사용인들은 일절 조사 참여를 거부했다.

“여전히 흑마술에 미쳐있고, 이대로라면 황실에도 저주를 걸겠다며 협박을 하기에 죄질이 점점 중해지고 있지.”

유다르는 쯧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마를레나에 대해선 더는 관여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두다가 그녀가 어떤 형량을 받는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나저나 이렇게 기쁜 날 대공비는 왜 데려오지 않았소?”

에이젠은 로아를 언급하는 유다르에 주먹을 말아쥐었다. 겉으로는 여유를 유지하려던 그의 입꼬리가 굳어버려 웃음기를 지워냈다.

“제가 아내를 너무 아낀 나머지, 조금이라도 불편해할 자리엔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에이젠은 유다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내를 아낀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모순적이게도 살의를 품고 있었다.

마치 유다르에게 제 아내에겐 관심 갖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황실에 소개해주면 좋지 않겠소.”

유다르는 에이젠이 보내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이젠은 머리를 차게 식혔다. 흥분할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유다르와 저의 관계에서 우위를 독점한 건 저였다.

“미래를 본 적 있다 말씀드린 적 있지 않습니까.”

“그랬지.”

“황실과 관계된 누군가가 제 아내를 노리고 있습니다.”

유다르는 가슴속부터 뜨끔했다. 미래를 본 적 있다는 그의 말에 신뢰가 쌓이면서 제 마음까지 꿰뚫고 있을까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아내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수도에는 데려오지 않기로 했습니다.”

에이젠의 눈은 천적을 만나 경계를 세운 한 마리의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말입니다.”

얼빠진 얼굴을 한 유다르에게 되새김질했다.

“그러니 기쁜 날이 있어도 아내를 황실에 알현시킬 일은 없을 겁니다.”

양해가 아니었다. 통보였다.

지금의 에이젠은 황태자에게 제 의견을 피력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이해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럼에도 겉으로는 여전히 양해를 구하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다르는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게.”

에이젠은 유다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제 그만 대화는 마치자는 의미였다. 그가 뒤로 돌아섰을 때, 유다르는 그의 뒤에 대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근데 그게 누구오?”

불안했다. 제 아내를 노리는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는 에이젠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정체는 모른 채 존재 정도만 알고 있는 걸까.

유다르는 그게 궁금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섣불리 언급하기엔 조심스럽습니다.”

에이젠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반역도 아닌 개인적인 문제로 태자 저하께서 편견을 가지고 그를 바라봐선 안 될 테니까요.”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알고 있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다르가 몸을 휙 틀었다.

때마침 복도 벽에 걸려있던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저하.”

에이젠이 물러나고서야 떨어져 있던 기사들이 유다르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어떤 소식을 전달받은 듯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

“황제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래? 지금 출발하겠다.”

유다르는 몇 명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알현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알현실을 빠져나온 또 다른 신하가 주변에 서 있던 보초들에게로 다가갔다.

“앞으로 황실이 어찌 될는지.”

신하는 일부러 궁금증을 유발하는 말을 남기며 혀를 찼다.

“무슨 일입니까?”

“트로네 대공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접대 때문에 같이 들어갔다가 들은 건데.”

신하는 보초들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주변을 살핀 신하는 고개를 기울인 보초들에게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태자 저하의 황태자 적격 여부 심사를 다시 진행한다네.”

“뭐, 뭐라고요?!”

“쉿, 쉿!”

예상치 못한 소식에 보초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높여버렸다.

“갑자기 왜요? 오필리안 황자님의 반역 혐의까지 잡아냈잖아요.”

“그게 어디 태자 저하 공이야? 대공 각하 공이지.”

다시 고개를 숙인 신하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트로네 대공이 다음 반역 주도자로 지목한 사람이 바로 태자 저하래.”

“말이 됩니까? 가만히 있으면 황제 될 사람이잖아요.”

“예끼, 이 사람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지금 당장 황제가 되고 싶어서 쿠데타를 일으킬지는.”

아무리 그래도 제 아버지를 죽이겠냐만.

이미 헤이든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황실 역사 속에 그런 사례는 무수히도 존재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태자 저하가 내린 정책은 늘 좀 그랬잖아요.”

한 보초는 금세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다르가 반역을 도모한다는 건 특별한 증거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제국보다 저 자신만을 생각한 정사를 봐온 것들이 전부 증거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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