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97)화 (97/107)

97. 기억을 잃는 방법

에이젠이 대공 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서신이 한 통 도착했다. 그리고 또 며칠 지나지 않아 황실에서 파견한 수사관이 직접 방문했다. 그는 마를레나를 수사했던 책임자였다.

에이젠은 묵직해진 그의 표정에서 희소식을 가지고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식을 전달받기 전, 그에게 최상의 대접을 해주었다.

“대공 각하.”

그리고 드디어 그가 본론을 꺼내려 할 때, 에이젠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수사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마를레나의 처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수사관에게는 전달하기 힘든 사항이었다. 아무리 양어머니였어도 법적으로는 친족으로 묶인 관계였으니.

그러나 그건 에이젠과 마를레나의 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생각이었다.

“수사관들이 사형만은 피하기 위해 회유해보았으나 이대로 형이 끝나 자유의 몸이 되면 언젠간 반드시 저주를 퍼붓겠다며 고집을 꺾질 않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일말의 절실함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마치, 그냥 당장 죽여달라는 뜻 같기도 했다.

에이젠은 마를레나가 왜 이런 태도로 조사에 임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가벼운 처형을 받고 다시 트로네가로 돌아오게 된다면, 처형보다 더욱 잔혹하게 저를 해할 자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끝이 같다면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마를레나는 대공 각하의 어머니로, 형량을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사형만은 피할 수 있게끔 특혜를 드린다 하옵니다.”

수사관은 조심스럽게 특혜 내역을 전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심드렁한 얼굴로 수사관이 옆구리에 끼워둔 파일에만 시선을 두었다.

“가져와.”

에이젠은 그 파일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수사관은 특혜 내역에도 별다른 반응 없는 에이젠에 어리둥절해하며 파일을 건넸다. 파일을 펼쳐보자 공문이 한 장 있었다.

형벌을 받은 죄수의 처형 내용을 가족에게 전달하는 공문이었다. 충분히 숙지한 후 확인했다는 사인을 남겨야 했다.

“형을 동의하면 여기에 사인하면 되는 건가.”

에이젠의 물음에 수사관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에이젠의 시선이 대답 없는 수사관에게로 향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만년필을 꺼낸 에이젠은 거침없이 공문에 사인을 휘갈겼다. 파일을 덮고 다시 수사관에게 넘긴 에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복할 생각은 없으니 더는 이 문제로 찾아오지 마.”

용건은 끝났다. 수사관이 쭈뼛거리며 파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려던 수사관이 걸음을 멈춰 세운 채 뒤를 돌아봤다.

“마를레나 처형일이 확정되면 반드시 나를 초대하라고 전해라.”

수사관은 에이젠에게서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희번덕거리는 눈과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

마를레나의 처형 소식에 되레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고통 속에서 숨통이 끊어져 지옥으로 향하는 과정을 내 눈으로 톡톡히 확인해야겠으니까.”

수사관은 경직된 표정을 숨길 수 없어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했다. 그러곤 뒤돌아 잰걸음으로 트로네 대공 저를 빠져나갔다.

집무실 창가에 선 에이젠은 그가 마차를 타고 정원을 가로질러 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집무실 밖으로 나오자 앞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로아는.”

“침실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에이젠은 시간을 확인했다. 해가 중천을 지나가는 대낮이었다.

로아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햇살이 내리쬐는 게 딱 로아가 좋아하는 산책을 즐기기 좋은 날씨였다. 에이젠 역시 특별한 일정이 없어 저택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도 로아는 평소와 달리 암흑 속에 저를 가둔 채였다.

그동안 힘들었던 만큼 이젠 따사로운 햇볕을 쐬며 적적한 평화를 누려도 될 것을.

에이젠은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로아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틈으로 어둠이 쏟아졌다. 아직 대낮인데도 로아는 암막 커튼을 치고 방을 어둡게 만들었다. 문틈 새로 들어선 빛줄기가 그녀를 괴롭힐까 얼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침대로 다가간 에이젠은 돌아누운 로아의 옆에 앉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린 채 자고 있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얼굴을 덮은 이불을 쥐었다. 자는 동안 호흡이 불편하진 않을지. 또한 자는 로아의 얼굴을 보고 싶어 이불을 내렸다.

두 눈을 감고 있던 로아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그것도 잠시, 이불의 기척에 놀란 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에이젠?”

피곤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이젠은 상체를 숙여 로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 때문에 깼어?”

“아니야. 괜찮아.”

로아 역시 몸을 돌려 에이젠과 눈을 맞추려 했다.

“해가 중천을 지나가는데 왜 아직도 자고 있어.”

다정한 손길이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로아는 그의 부드러운 온기를 느꼈다.

“요즘 밤에 잠이 잘 안 와.”

두 사람은 늘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로아는 잠이 오지 않아도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저와 달리 매일같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에이젠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에이젠이 완전히 잠에 들 즈음에야 몸을 일으키곤 했다.

에이젠 역시 새벽마다 뒤척이는 로아를 알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그녀를 품에 안아보기도 하고 함께 일어나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로아는 그럴 때마다 저 때문에 편히 잠들지 못하는 에이젠을 위해 자꾸만 억지로 자는 척을 했다. 잠이 오지 않는데도 몸을 뒤척이지 않는 연습을 의식적으로 했다.

그게 더욱 로아의 정신을 옭아맸다.

“왜 잠이 안 올까.”

“음, 불안해서?”

그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

로아는 에이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둠 속이라 그런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허공을 헤매는 로아의 손을 에이젠이 잡아주었다. 그러곤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에이젠의 존재가 느껴졌다.

“내가 자는 사이 에이젠이 사라질 것 같기도 하고, 새벽만 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해.”

활동적인 낮에는 그래도 덜했다. 그런데 애써 자는 척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을 땐 불안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자고 일어났을 때 에이젠이 옆에 없으면 어떡하지. 저주가 완전히 풀리긴 했을까. 죽어보기 전까지 모르는 거 아닌가. 죽어볼까. 그럼 저주가 풀렸는지 안 풀렸는지 확실히 알 텐데.

불안정한 생각들에 괴로운 새벽을 보내고 서서히 동이 트는 걸 보면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세상만사는 본래대로 흘러가고 있다.

아무도 제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 할 때 기분은 어때.”

기분이라, 제 감정을 자각해본 적이 있는가.

곰곰이 생각하던 로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울해.”

웃으면서 우울하다고 대답했다. 내내 다정한 미소를 품고 있던 에이젠은 그 모습에 되레 웃음기를 지워냈다.

“웃으면서 말하지 말고.”

진지해진 에이젠의 목소리에 로아 역시 말려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렸다. 로아는 잠시간 그의 품에 안겨 고민했다. 한참을 대답 없이 안겨 있던 로아는 어렵사리 운을 뗐다.

“……죽고 싶어.”

하루하루가, 일분일초가 괴롭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소중한 걸 몇 번이나 잃었던 악몽 같은 기억 때문이었다.

“잠도 안 오고 괴로운 기억만 떠오르고 또 공허하게 나만 남아버릴까 봐 두렵고.”

로아는 괴로웠던 제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울지도 않았다. 감정을 토해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고통이었다.

“이제 저주도 끝났으니 죽어서 영면에 빠지면 지금의 괴로움보단 덜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고개를 든 로아가 두 손으로 에이젠의 양 뺨을 감쌌다.

“내가 죽으면 남겨질 에이젠을 생각하면 죽을 수도 없어.”

그때의 고통을 다시 에이젠에게 떠넘길 순 없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스스로가 무능력한 걸 자꾸 자각하게 돼.”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에이젠은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웠다. 워낙 큰 시련을 직면한지라, 이 정도의 감정엔 울부짖지도 않는 로아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을지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괴로운 기억을 잊게 해주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죽음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야.”

로아는 에이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깊은 어둠 어딘가를 응시했다.

놓고 싶지 않은 남자. 겨우 내 손 안에 들어온 그토록 바랐던 내 남자.

로아는 죽더라도 에이젠을 놓을 수 없었다.

“에이젠.”

가녀린 떨림이 에이젠을 불렀다. 에이젠은 로아의 허리를 잡아 그녀를 떨어뜨리려 했다. 눈을 보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로아는 에이젠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놓지 않으려 했다.

“우리…….”

로아는 한 가지 제안을 떠올렸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에이젠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죽을래?”

정적이 감도는 어두운 침실. 잘게 떨리는 푸른 눈동자가 굳건한 붉은 눈동자를 향해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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