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가장 큰 꿈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이 트로네 대공 저 안으로 들어섰다.
“정기 검진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웬일로 부르신 거랍니까.”
조나단이었다. 오늘은 정기 검진을 하는 날도 아니었는데 에이젠이 갑작스럽게 그를 불렀다. 전쟁이 끝난 후 온갖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을 그가 어딜 크게 다칠 리도 없었기에 조나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주인님이 아니라 마님의 진료 때문이라네.”
리예드의 해답에 조나단은 ‘아-’ 하는 깨달음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안 좋답니까?”
직접 보면 알겠지만 어떤 방향의 진료를 해야 할지 미리 알아두려 했다. 대답을 망설인 리예드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조나단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육신보다는 정신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던데.”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 조나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밤에 영 잠을 못 주무셔. 깨어있을 때도 멍하게 허공을 바라볼 뿐 기력도 없으시고. 사람이 축축 처져있다고 해야 하나.”
“불면증과 우울증은 떼려야 뗄 수 없긴 하지요.”
조나단은 여전히 의아스러웠다. 지금 트로네 부부는 제국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대공 각하와 결혼하기 위해 2년이나 기다렸다는 그 백작 영애 아니십니까? 긴 기다림 끝에 그리 원하던 결혼에 골인했건만 또 뭐가 문제인 거죠?”
리예드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들만의 깊은 사정을 일개 사용인이 알 턱이 없었다.
“주인님과는 사이가 좋아. 두 사람 사이엔 딱히 문제랄 게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그럼 대공 각하와는 별개의 다른 개인적 문제가 있으신 건가.”
개인적인 이유라면 더욱 털어놓기 힘들어할 것이다. 정신 질환에 대해 진료를 하려면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했다. 조나단은 이 진료가 난항을 겪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거까진 모르겠어. 아무튼 자네가 손볼 수 있는 병이어야 할 텐데.”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 영지에서 정신의학까지 진료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
리예드 역시 걱정이 태산이었다.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의료진까지 부른 것이다. 에이젠은 로아를 위해 당연히 의료진을 부르라 했지만, 이를 말리는 자도 있었다.
트로네 대공비가 정신 질환으로 진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졌다간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의 약점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을 테니.
그럼에도 에이젠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
첫 진료를 마친 날. 정무를 마치고 돌아온 에이젠은 가장 먼저 로아의 진료 기록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침실에 누워 편히 쉬고 있던 로아는 에이젠이 일어날 시간에 맞추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신이 마중 나가는 것보다 에이젠이 침실로 들어온 것이 더 빨랐다.
“이리 와, 로아.”
로아는 이불을 걷고 에이젠에게로 총총 뛰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약 먹었어?”
“이따 자기 전에 먹으려고.”
로아는 조나단의 진료에 잘 따라갔다. 스스로 이 병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에이젠은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안 그래도 바쁠 그가 저 때문에 걱정을 떠안고 있다는 게 미안해졌다.
“미안해, 에이젠.”
“뭐가.”
로아는 말없이 에이젠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에이젠은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꺼낼 때까지.
이윽고 로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요즘 나 때문에 에이젠도 잠 못 자고 있지? 다 알고 있어.”
에이젠은 로아를 위해 그녀가 잠들 때까지 일부러 자지 않고 기다렸다. 로아는 저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에이젠에게 부담을 느끼다가도, 자신이 자야만 그가 잔다는 생각에 잡념을 줄이고 잠들기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에이젠도 수면 시간을 줄여야 했지만, 불면을 헤매는 로아는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진료는 어땠어.”
“나름대로 괜찮았어.”
첫날이라 크게 도움이 된 것도, 진료에 부담을 느낀 것도 없었다.
다만 에이젠이 저의 불면 치료를 위해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아직은 의심이 들어. 한 번에 나아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꾸준히 받으면 달라지는 게 있긴 할까…….”
“로아.”
에이젠은 부정적으로 흘러가려는 로아의 흐름을 막았다. 그의 입술로 막혀버린 입술에 로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휘감는 움직임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로아의 키에 맞추어 상체를 숙이고 고개를 비틀던 에이젠은 아예 로아의 몸을 들어 올렸다.
붕 뜬 몸에 중심을 잃은 로아는 에이젠의 어깨를 짚었다. 이번엔 로아가 에이젠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비틀었다.
입을 맞추며 이동한 두 사람은 침대 앞에 다다르고서야 입술을 떼어낼 수 있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몸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내일부터 한 달간 휴가를 승인받았어.”
깜짝 소식에 로아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휴가?”
“응.”
아직 바쁠 때인데 가능한 건가. 에이젠이 저를 위해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일었다. 그런 로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에이젠은 그녀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하고픈 말을 선수 쳤다.
“우리 여행 가자.”
무리하지 말라고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가는 제안이었다.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근심이 서렸던 로아의 두 눈동자가 밝은 빛을 냈다.
어릴 적 자유로이 여행 다니던 카일론을 동경했다.
아직 어려서, 여자 혼자는 위험해서 여행을 다녀본 적 없는 로아에겐 잊고 있었던 가장 큰 꿈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루베른 영지에 가자. 그때 루베른 백작과 백작 부인에게 정식으로 인사도 못 했잖아.”
그러고 보니 주어진 시간 안에 풀어내야 할 것들이 많아 주변을 하나도 신경 쓰지 못했다. 회귀를 경험한 건 이 시간 속에서 에이젠과 로아 두 사람뿐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그 평화로운 일상 속 이상해져버린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로아는 자신이 이상해진 이유를 주변인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여유조차 없었다.
“클라리온 영지에도 가자. 우리가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느라 의례적인 부분은 다 생략했으니 지금이라도 하고 싶어.”
에이젠은 소중한 것들을 잊고 있는 로아에게 그 존재감을 다시 떠올려주게끔 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될 테니까. 로아는 이기적이게 자신만 생각하는 자도 아니었고, 세상을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아니었다.
“거기서 카일론이 가져온 맛있는 허브티도 받아오자.”
괴로움이라는 감옥에 갇혀 저의 기분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것 또한 잊고 있었다.
“아니면 그 허브티를 직접 구하러 멀리까지 나가볼까.”
여행 계획을 말하는 에이젠의 눈동자에도 생기가 돌았다. 로아를 향해 연민의 감정만 품었던 그에게서 오래간만에 보는 빛깔이었다. 로아는 답지 않게 저보다 들떠 보이는 에이젠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헤이든을 떠나 소국에 가보는 건 어때. 그곳의 조경은 어떤 모습일지, 그 땅에선 어떤 식물이 자라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로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에이젠이 계획한 여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벨라니스는 자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아기에 대한 이야기도 다 들어주지 못했다. 처음 벨라니스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행복해하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두 오빠들도 떠올렸다.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막내딸이 결혼하는 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카일론은 로아가 좋아하는 꽃과 식물을 이용해 부케와 화관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상상을 마친 로아는 서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이 행복한 계획 속에서 그녀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사랑하는 남자의 존재였다.
“에이젠…….”
듬직한 이 남자는 우울이라는 깊은 골에 빠진 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경험은 둘이 똑같이 겪었는데도 저와는 달랐다.
에이젠처럼 성숙하지 못하고 나약해져버린 제 모습이 그제야 부끄러워졌다.
“로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든 로아는 코앞까지 다가온 에이젠을 의식하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리는 감각을 느꼈다. 감미롭게 입술을 감싸는 온기는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이제 우리가 겪었던 사건은 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 않아.”
숨결이 닿는 곳에서 하고픈 말을 이어갔다.
“새로운 시간을 향해 갈 거고, 다른 기억을 만들어 갈 거야.”
시간을 되돌아온 후 괴로웠던 과거를 헤매던 로아는 눈물 한 점 흘린 적 없었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버린 탓이었다.
“그러니 잊자. 시련의 기억은 전부 다.”
그런데 왜 이제야 시야가 흐려지는 걸까.
에이젠의 눈물 날 만큼 따뜻한 위로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적셔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