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99)화 (99/107)

99. 본래의 운명

눈꼬리에 고였던 눈물은 모이고 모여 줄기를 만들어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의 축축한 감각에 로아는 당황했다. 손을 들어 올려 닦아내려 했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의 손을 꽉 붙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직접 훔쳐냈다.

“전부 바꼈어. 반역을 준비하던 오필리안 황자를 넘겼고, 유다르도 더는 감히 날 넘볼 수 없게 됐어.”

눈가가 따가워졌다. 당황한 로아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릴 때마다 더 많은 눈물이 흘렀다.

“우리에게 저주를 걸었던 마를레나까지 처형당했어.”

에이젠은 제 손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 따윈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넌 유다르를 비롯한 황실 근처에도 가지 않아도 돼. 내가 이미 손 써놨으니까.”

이제 정말 끝났다.

직접 일을 해치우고 다녔던 에이젠과 달리 로아는 체감하지 못해 아직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우릴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세상이야. 그때의 기억이 지금은 널 붙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젠 아니야.”

그러니 에이젠이 로아를 안심시켜주어야 하는 건 의무였다. 로아가 어리광을 부리고 힘들어하는 것 또한 그에겐 큰 축복이었다. 모든 게 그녀가 제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증표였다.

“하고 싶었던 거 다 하자. 그동안 엇나간 운명을 되찾느라 고생했잖아.”

저주만 아니었다면 좋은 날들만 기다리고 있었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혼부부. 그게 저들이 본래 따라야 할 운명이었다.

“그때 겪었던 고통의 시간을 보상받아도 돼.”

당차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격한 감정이 치오르면서 목구멍을 꽉 막아버린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말아 넣은 로아는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좋은 기억으로 채워나가다 보면, 그 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지면 어떤 기억은 결국 사라져.”

그 기억을 새로 만들어가면 됐다. 에이젠은 로아를 위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할 계획이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삶을 겁먹지 마.”

에이젠은 로아의 두 손을 맞잡았다.

“너만 있으면, 너만 행복해 준다면.”

로아의 시선이 손을 향해 툭 떨어졌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겉으론 의연함을 유지했겠지만 그 역시도 두려운 게 있었다.

저마저 두려운 감정을 표낸다면 로아의 불안감이 몇 배로 증폭될 걸 알았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다는 로아의 말에 그의 억장이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까.

로아는 철없는 제 말이 얼마나 그를 힘들게 했을지 자각했다.

이 순간, 로아는 사랑하는 에이젠을 보며 다짐했다.

저에게 쏟아붓는 그의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공포에 버둥거리는 삶은 청산하고 이제 새로운 미래를 보며 나아가자고.

***

며칠 후, 로아와 에이젠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동하는 시간이 짧지 않았는데도 로아와 에이젠은 마차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체감상으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긴 드레스 끝단을 쥔 로아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 하마터면 날아갈 뻔한 모자를 꾹 눌러 잡았다. 한 걸음 내디뎌 폭신한 땅을 지르밟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게 역시 고향 땅은 남달랐다.

“로아!”

클라리온 백작을 비롯한 일가족들은 로아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진 몰라도 결혼식을 서두르느라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제대로 건네지도 못하고 트로네 영지로 이동했다. 로아는 가족들 한 명 한 명과 진한 포옹을 나누며 못다 한 인사를 전했다.

“우리 딸.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럼요.”

“근데 왜 이렇게 홀쭉해진 거야? 밥은 잘 먹고 있어?”

특히 클라리온 백작 부인은 딸의 미세한 변화도 금세 알아차렸다.

“그래 보여요?”

가족들에게만은 힘든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로아는 손으로 양 뺨을 지그시 눌렀다. 그렇다고 핼쑥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기온이나 음식에 아직 적응 못 한 거 아니야? 네가 좋아하던 음식들 좀 준비해둘 테니 갈 때 가져가.”

셰인데릭 역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로아를 바라봤다. 데뷔를 마치고 어엿한 숙녀가 되어 시집까지 갔는데도 아직도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 동생의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었다.

“고마워, 오빠.”

어릴 땐 막내딸에게 유난인 가족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성장한 이후 바라본 가족들은 변한 게 없는데도 달라 보였다.

가족들과 인사를 마친 로아는 에이젠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로아가 사용했던 방은 출가한 이후 다른 용도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잘 지냈어요?”

익숙한 얼굴의 사용인들과 친근하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뒤에서 우당탕, 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로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봤다. 그리웠던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로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쥬디!”

로아는 쥬디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은 주인과 사용인이 아닌 오랜 친구와도 같은 친밀한 관계 같았다.

“쥬디, 너무 보고 싶었어.”

“저도예요. 오시면 꼭 드리고 싶은 게 있었어요.”

쥬디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로아에게 건넸다. 로아는 쥬디가 건넨 상자를 한참이나 살펴봤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댔다.

상자 안엔 벽걸이 장식으로 사용하면 좋을 자수 공예품이 들어 있었다.

“예쁘다. 직접 만든 거니?”

“네!”

로아는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냈다. 무슨 그림인가 가만 살펴보던 로아는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아가씨가 가장 좋아하셨던 은목서 나무예요.”

쥬디는 아직 서툰 실력 때문에 로아가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면 민망할까 먼저 정답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로아는 쥬디가 정답을 알려주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얗고 작지만 확실히 예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꽃망울, 끝날이 날카롭지만 짙은 향기를 품은 잎. 가장 좋아하는 나무 은목서 그 자체였다.

“물론 좋아하는 나무니까 사시는 저택에도 있을 거 같지만 너무 기분이 우울한 날에는 방에서 나오기조차 싫을 때가 있잖아요.”

집 안에만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로아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에도 굳이 밖으로 나가 조금이라도 산책을 즐긴 후 돌아오곤 했다. 그런 로아가 깊은 우울감에 빠졌을 땐 바깥은커녕 방 밖으로도 나오지 않으려 했다. 지금의 로아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었다.

“그럴 때 방에서라도 이 은목서 자수를 꺼내 보세요.”

자수 공예품만 내려다보던 로아는 쥬디의 말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럼 기분이 한결 나아지실 거예요.”

로아는 생글거리는 쥬디에게서 긍정의 기운을 얻어갔다.

“고마워. 고마워, 쥬디…….”

이번에도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울먹거리던 로아는 쥬디를 꽉 끌어안았다. 쥬디는 영문도 모른 채 글썽거리는 로아를 토닥였다.

한참을 부둥켜안던 두 사람은 뒤늦게 응접실로 향하던 길임을 깨달았다. 쥬디도 로아와 에이젠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탰다.

로아는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그사이 에이젠은 과거 로아와의 추억이 담긴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쥬디는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게 쌓인 침구를 가지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거운 침구를 든 채 문을 열던 쥬디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겨우 중심을 잡고 바로 섰으나 하마터면 옆에 서 있던 에이젠과 부딪칠 뻔했다.

“아앗, 죄송합니다.”

에이젠은 쥬디가 들고 있던 침구를 들어 침대로 옮겨주었다. 화들짝 놀란 쥬디가 그의 뒤를 쫓았지만 다시 앗아오지는 못했다. 뒤늦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름이 쥬디, 라고 했나.”

제 이름을 부르는 에이젠에 쥬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네, 맞습니다.”

에이젠은 쥬디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클라리온가에서 로아를 보필했었다고.”

“그렇습니다. 아가씨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해왔습니다.”

“로아와 함께하는 시간은 어땠나.”

쥬디는 로아와의 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웃음을 지었다.

“나이도 비슷했던지라 아가씨와의 시간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워낙 사랑받고 자란 어여쁜 아가씨라 그런지 옆에 있으면 저도 덩달아 웃음이 나는 그런 분이셨지요.”

숨 가쁘게 도망치듯 결혼식을 하러 가버린 로아와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밝아진 얼굴로 돌아온 로아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아가씨가 안 계셔 보직이 바뀌었는데 가끔 아가씨 생각이 납니다.”

로아의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끼는 건 다른 가족들보다도 그녀와 가까이 붙어 있었던 쥬디였다.

“그래도 대공님과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신 것 같으니…….”

“트로네가로 들어와 로아를 계속 보필할 생각은 없나.”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쥬디는 에이젠의 말을 다 듣고도 두 눈만 끔뻑거렸다.

“네?”

트로네가에서 로아를 보필하던 하녀가 잘렸으니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은 로아가 가장 편안해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지금의 로아에겐 로아를 가장 잘 아는 오랜 벗 같은 존재가 필요할 거 같아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