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행복할 수밖에 없는
클라리온가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음으로 가야 할 여정이 많아 있었다.
“수도 쪽에서 이 먼 루베른 영지까지 찾아와주다니. 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
두 사람이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루베른 영지였다. 트로네가에서 클라리온가로 이동하는 것에 몇 배는 되는 긴 여정이었다. 제국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이곳에 또 방문해주었다는 것은 영주로서 큰 기쁨이었다.
일전에 잠깐 만났던 로아와 에이젠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유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두 사람은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훨씬 좋아진 안색에 벨라니스는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정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왜 이리 주책맞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로아는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주는 벨라니스의 앞으로 다가섰다.
벨라니스 역시 제 가족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저를 생각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었다. 벨라니스는 다가온 로아의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로아, 행복해야 돼. 너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럴 자격 있으니까. 알고 있지?”
“벨라니스…….”
로아 역시 벨라니스에게 고마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에게 닥친 시련만 보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미안함도 들었다.
“우리 영지에서 생산되는 산머루로 만든 와인을 대접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루베른 백작은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찾아와준 부부를 위해 최고의 만찬을 준비해두었다.
식당으로 이동하면서도 벨라니스는 로아의 옆에 꼭 붙었다.
“정말 맛있는데 마셔봐. 난 임신해서 함께 마실 순 없지만.”
로아의 시선은 벨라니스의 아랫배로 떨어졌다. 조금 시간이 지났다고 벌써 아랫배가 볼록 부풀어 있었다.
처음 벨라니스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땐 신기하기만 했다. 지금은 그 감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아이를 가졌다가 잃어본 아픈 기억을 지닌 로아에겐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럼 나도 안 마실래.”
로아는 벨라니스를 위해 함께 금주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오래간만에 만난 두 친구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로아는 벨라니스가 아끼는 응접실에서 나오는 차를 기다렸다.
“몸은 어때?”
로아는 최대한 제 아픔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었다. 그때 죽어서 끝났다면 아이는 물론 에이젠과 저까지 사라져버렸을 테니까. 에이젠의 말대로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어후, 요즘 너무 힘들어. 배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야.”
벨라니스는 조금만 걸어도 지끈거리는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이를 갖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잠깐이지만 입덧을 겪었을 때도 힘들었는데 열 달이나 품고 있을 땐 얼마나 불편하고 아프고 힘들까.
거기까진 겪어보지 못한 영역이라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로아는 벨라니스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도미닉’이라는 이름의 건강한 남자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평안하게 펼쳐질 미래를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네가 그렇게 확신해서 말해주니까 맘이 놓인다.”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벨라니스는 로아의 형식적인 위로까지 믿어주는 친구였다.
“진짜야. 내 말 믿어봐.”
별것 아닌 대화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기대에 찬 눈빛을 한 벨라니스는 로아를 은은하게 바라봤다.
“너희는 언제쯤 가질 거야? 계획 있어?”
테이블 밑으로 고이 모아두었던 로아의 손이 움찔거렸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빨리 가져야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반씩 닮은 아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데.”
벨라니스는 로아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른다. 고의로 상처를 건드리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프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임신했는데 벌써 부부 사이도 전과 달리 끈끈해진 것 같고 그래. 아이를 낳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얼마나 더 좋아질까?”
벨라니스는 행복에 겨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행복해 보여. 벨라니스.”
로아는 그런 벨라니스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처음 에이젠과 결혼했을 때 행복하게 잘 살았을 텐데. 지나간 시간에 자꾸만 아쉬운 맘이 들었다.
“네가 부러워.”
“너도 곧 가질 건데 뭐가 부러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듯 말했지만, 로아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혹시 모를 시련이 무서워 도전이나 모험 자체를 두려워하게 돼버렸다.
“왜? 걱정되는 게 있어?”
벨라니스는 안색이 어두워진 로아에게 이유를 물었다.
한동안 대답 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로아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소중한 게 생긴다는 건, 동시에 두려운 게 생기는 거잖아.”
벨라니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너무 깊은 사정을 물을 순 없겠지만 로아에게 무언가를 잃은 큰 슬픔이 있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소중해서 두려워. 잃게 되는 순간이 올까 봐.”
울적해진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태까지 벨라니스의 앞에서 웃고 있었던 게 상대를 위해서 억지로 끌어올린 밝은 모습이었다.
“로아.”
벨라니스는 안쓰러운 로아를 보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로아에게 다가간 그녀는 작게나마 위로를 건네듯 포옹해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로아는 갑자기 저를 안으러 온 벨라니스에 잠시 당황했다. 등을 반복적으로 토닥여주는 손길이 뭐라고 그 따스함에 위로를 받았다.
“아무래도 네가 전쟁터에 나갔던 대공님을 기다리면서 매일같이 했던 생각이겠지. 그래서 그런 걸 거야.”
어쩌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았던 로아가 이렇게 축 늘어졌을까.
벨라니스는 그녀가 겪었을 수많은 아픔을 다 헤아려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공님은 결국 돌아오셨잖아.”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위로의 말 몇 마디, 그리고 포옹.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벨라니스는 로아가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싶었다.
“아주 훌륭한 전공을 세우고 너를 향한 마음 또한 변치 않은 채로 말이야.”
감사할 것들은 많았다. 시련을 겪으며 깊숙하게 생긴 아픔이 그것들을 전부 지워내고 있었다.
“그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해. 로아 넌 천운을 타고난 거야.”
행운의 간택을 받은 건 잊지 않기 위해 의식해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아 넌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벨라니스는 로아가 짓지 못한 싱그러운 미소를 대신 지어주며 말했다.
“왜?”
로아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형식적으로 하는 말일지언정,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난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언젠간 돌고 돌아 죗값을 치르게 된다고 믿거든.”
로아 역시 그 말엔 동의하는 바였다.
“반대로 착하게 바르게 산 사람 또한 언젠간 걸맞은 포상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해.”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벨라니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마음씨가 곱거든.”
그러나 다음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면전에서 거리낌 없는 칭찬을 하는 벨라니스에 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야. 내가 무슨.”
로아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휘저으며 벨라니스의 말을 부정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남들을 돕고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인 거지,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로아는 스스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에 대한 잣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녀의 주변은 그녀와 비슷하게 좋은 사람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진짜야.”
벨라니스는 정신없이 휘젓는 로아의 두 손을 잡아 내렸다.
“대공 각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걸?”
에이젠을 떠올리자 로아는 일순 차분해졌다.
“그러니 그 얼음장 같은 분이 네 앞에서만 사르르 녹는 거지.”
에이젠은 모든 게 저를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때 날 살린 게 너였으니까. 네가 없었다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이딴 직위를 달고 이런 대우를 받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릴 땐 로아만이 에이젠의 구원자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서로가 서로의 숨을 나눠 가진 사이였다.
악착같이 제 일평생을 바치고 목숨을 던져가면서까지 사랑해주는 남자.
이 남자를 두고 감히 같이 죽자는 말을 했다.
로아는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테이블 위에 고개를 박고 말았다.
“어머, 왜 울고 그래.”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벨라니스는 로아의 옆으로 의자를 당겨왔다.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로아가 쌓였던 감정을 토해낼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벨라니스는 파르르 떨리는 로아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울음을 더 부추길 수 있는 마음 시린 위로까지 전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어린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미웠다.
고통에 잠식되는 거야말로 진정한 저주일지도 모른다. 로아는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