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달콤한 포상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깨달았다.
클라리온가와 루베른가를 거친 두 사람은 진정한 여행길에 올랐다.
로아는 루베른 영지보다 먼 곳은 가본 적 없었다. 처음으로 떠나는 긴 여정에 설레기도 했지만 피로감에 억눌리기도 했다.
국경을 지난 두 사람은 헤이든 제국을 벗어나 이웃 소국으로 들어왔다. 로아는 피곤한 두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마차 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고향 땅과 향기도 공기도 전부 달랐다.
이곳은 카일론이 가장 자주 방문했던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 길게 머물면서 조경학을 배우기도 했고, 이곳에서만 자라는 수종들을 채집해가기도 했다.
그중에는 로아가 좋아하는 허브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로아는 이곳에 여행을 가고 싶다고 카일론에게 미리 말해두었다. 카일론은 자신이 홈스테이했을 당시의 호스트에게 서신을 보내놓겠다고 했다.
로아는 그 덕에 낯선 곳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집이 좀 누추하지만 그래도 춥지는 않을 겁니다.”
“누추하지 않아요.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걸요?”
일반적인 집 구조 역시 헤이든 제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로아는 신기한 게 너무 많아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역시 부인께서는 카일론 자작님께 들은 그대로시네요.”
아이처럼 호기심 많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로아에 호스트는 씩 미소 지었다.
“카일론이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나요?”
“그럼요. 이곳에서 자작님과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가 부인 얘기였는 걸요.”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날 순 없지만, 로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느 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오빠였다.
“아주 사랑스러운 동생이라고 했어요. 우리 영지에서 나는 이 허브티가 자작님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동생이 좋아해서 매번 사들인다고 하셨거든요.”
로아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일론이 허브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참, 부인께 이걸 선물로 드리면 좋겠네요.”
호스트는 수납장에 준비해두었던 상자를 꺼내왔다.
“저흰 식물을 원료로 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만들고 있는데 요즘은 향수 품목을 연구 중이었어요.”
로아는 호스트에게 건네받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유난히 선물을 많이 받아갔다.
작은 유리병을 꺼낸 로아는 찰랑거리는 내용물을 흔들어보았다.
“카일론의 아이디어로 만들어본 은목서 향수입니다.”
은목서 향수라니.
듣기만 해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본래 향수 원료로 사용되는 건 금목서가 일반적이긴 한데, 카일론은 금목서보다 은목서를 고집하더군요. 여동생이 은목서를 더 좋아할 거라고 하면서요.”
로아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은목서와 금목서는 꽃 모양도 향기도 조금씩 달랐다. 로아는 그중에서도 금목서가 아닌 은목서를 좋아했다.
쥬디는 언제든 은목서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선물을 주었는데, 카일론은 언제든 은목서의 향을 느낄 수 있는 선물을 준비했다.
“시향해 보시겠습니까?”
“네.”
시향지를 가져온 호스트는 향수를 뿌려 로아에게 건넸다.
“다른 원료도 첨가되어 조금 다를 순 있지만, 최대한 은목서 잎의 향을 살려보았는데 어떠신가요?”
다른 원료가 들어갔다곤 하지만 은목서 본연의 향을 최대한 살린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너무 좋네요.”
시향을 마친 로아는 시향지를 에이젠에게도 건넸다. 에이젠 역시 향이 마음에 든 듯 씩 웃어 보였다.
“카일론이 오면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향수 잘 간직하겠다고요.”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로아는 저를 생각해주는 오빠의 마음이 담긴 향수를 가슴속에 고이 품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일찍 주무세요. 아침이 되면 정원에서 함께 브런치를 들고 관광하시면 좋을 곳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할 일을 마친 호스트는 나갈 채비를 했다.
“신세 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아는 호스트를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그럼 평안한 밤 되시길.”
호스트가 나간 후 두 사람은 옷부터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방 한편에는 조그만 온탕도 마련되어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싹 풀렸다. 그 느낌이 좋아 한참을 온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행을 위해 사용인들을 데려오긴 했지만 그들에게도 별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목욕 후에도 하녀의 손길이 필요했으나 오늘만은 그들에게도 휴식 시간을 주기로 했다. 긴 여정을 함께 따라온 건 그들에게도 처음이었으니.
“여행 다니는 것도 체력이 많이 드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노곤노곤해진 몸을 침대에 눕혔다. 에이젠은 아직 축축이 젖은 로아의 머리칼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 말리고 자자. 감기 걸려.”
“으음, 누우니까 좋은데.”
일어나지 않으려 버티는 로아의 손목을 잡고 제대로 앉혔다.
로아의 뒤에 자리 잡은 에이젠은 타월로 직접 그녀의 머리칼을 닦아주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젖어도 예쁜 빛깔을 품었다.
“에이젠은 안 피곤해?”
고개를 돌린 로아는 에이젠의 안색을 살폈다. 피곤해서 하품이 쩍쩍 나오는 저와는 달리 그는 평소와 비슷해 보였다.
“나야 평소에도 이렇게 다녀.”
영주로서 영지를 둘러보는 것, 황실이 부를 땐 수도로 알현하러 가는 것, 가끔은 정무를 위해 다른 영지나 멀리는 소국에도 나가는 등 그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익숙했다.
로아는 새삼 에이젠이 평소에 하는 일이 체력적으로 쉽지 않음을 실감했다.
“로아 넌?”
“난 좀 피곤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로아는 뒷머리를 에이젠의 가슴팍에 기댔다.
“그럼 금방 잠들 수 있겠네.”
“그랬으면 좋겠다.”
몸을 피로하게 하면 불면증은 나아질 수밖에 없었다. 에이젠은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이 여행을 계획한 건지. 그의 큰 그림에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로아의 시선은 밑으로 툭 떨어졌다. 두 발을 침대 위로 올려 무릎을 껴안았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목욕 직후 뽀얘진 발끝이 보였다.
“에이젠.”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응?”
대답이 돌아왔다. 로아는 에이젠의 손길을 느끼고 목소리를 들으면서 안도했다.
“고마워. 여행 데려와줘서.”
정신의학 진료나 약물도 그랬지만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여행을 하면 체력이 지쳐 일시적이더라도 불면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동안 몰랐던 장소나 풍습을 접하며 얼마나 좁은 세상 속에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호기심이 왕성한 로아는 특히나 아직 모르는 세계에 대한 탐구 욕구가 있었다.
로아에게 여행이란 가장 큰 치료제였다.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어.”
여행하는 동안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자존감을 되찾기도 했다.
클라리온 백작 부부, 셰인데릭, 카일론, 쥬디 그리고 벨라니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믿고 기다려주었다.
“당장에 너무 힘드니까 내 생각만 했나 봐.”
아낌없이 사랑을 퍼부어주는 그들과 달리 자신만 생각했던 이기적인 스스로를 반성했다.
“내가 죽으면, 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미어져.”
한순간이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다.
“벨라니스가 그랬어. 나쁜 사람은 언젠간 천벌을 받을 거고, 착한 사람은 포상을 받을 거래.”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 자각하지 못했다. 벨라니스의 말대로 로아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저를, 나름대로 괜찮은 자신을, 스스로도 사랑해보기로 했다.
“난 착하게 바르게 살아왔는데 고생만 하고 생을 포기하는 건 너무 억울해. 언젠가 받을 달콤한 포상이 있을 텐데 그걸 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로아는 뾰로통해진 얼굴로 돌아봤다. 에이젠의 얼굴을 보니 미어졌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실 이미 받았을지도 몰라.”
완전히 몸을 돌린 로아는 에이젠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앉았다. 두 팔론 그의 목을 껴안았다. 코앞까지 훅 다가온 로아의 향기가 남자의 본능까지 감싸 안았다.
“내가 힘들 때면 이런저런 방법으로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내 남편 에이젠.”
로아는 낯간지러운 말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읊었다. 이 부부에게 표현을 아낀다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었다.
“너를 잃지 않게 됐단 것만으로 큰 포상을 받은 거나 다름없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이 흐드러졌다. 고개를 비틀어 숙인 로아는 에이젠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가 저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어설프게 따라 했다.
에이젠은 로아가 중심을 잃지 않도록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달콤한 숨결이 오가고 아늑한 분위기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예민한 손끝이 서로의 피부를 느꼈다.
에이젠은 눈꺼풀을 반쯤 밀어 올렸다. 서툴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로아의 표정이 다 보였다.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몸을 빙글 돌렸다.
로아의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눈을 떴을 땐 에이젠이 제 위로 올라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