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과분한 선물
“하, 흐읍…….”
뜨거운 숨을 집어삼켰다. 로아는 흥분에 겨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에이젠은 그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로아의 고개를 다시 원위치로 놓았다.
다시 한번 입술을 물기 전 물었다.
“무서워?”
로아의 두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랫입술을 말아 넣은 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안 무서워.”
되돌아온 시간 속에서 로아와 에이젠은 몸을 나눈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특히 가임기만 되면 로아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임신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를 이해했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같지 않았다.
많은 걸 느끼고 얻어간 게 있는 여행에서 로아는 앞으로 변하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전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에이젠 네가 있으니까.”
로아는 에이젠을 끌어안으며 적극적으로 굴었다.
“계속 안아줘.”
에이젠의 입술은 곧장 로아의 여린 목덜미로 내려갔다. 일전에 남긴 적 있던 울혈의 흔적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에이젠은 짙은 소유욕이 담긴 눈동자를 빛내며 다시 한번 그 자리를 노렸다.
“흣…….”
강하게 흡입하는 느낌에 로아는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도로 삼켰다. 그러자 고개를 든 에이젠은 로아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참지 마.”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막는 게 싫었다. 지금 저로 인해 느끼는 쾌락의 감정을 다 토해내길 바랐다. 그러나 로아는 곤란한 듯 눈동자를 불안하게 떨었다.
“그래도 여긴 우리 집이 아니니까 호스트께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
혹시라도 민망한 소음을 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에이젠은 여전히 착한 마음씨를 가진 로아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착한 로아.”
에이젠은 로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로아는 이미 돌아왔다. 에이젠이 처음 로아에게 반했던 그때의 모습으로.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독보적인 빛을 냈다.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욱 눈부신 인품 때문이었다.
기품있는 귀족 영애라는 출신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저보다 남들을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와 같은 결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최선을 다해 참아봐.”
짓궂은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참아보라는 말과 달리 그가 전하는 자극은 점점 세졌다.
“하윽, 에이젠, 너 일부러…….”
로아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몸을 밀어내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사랑해. 사랑해, 로아.”
바르작거리던 로아는 느닷없이 쏟아지는 사랑 고백에 멈추어 섰다.
“나는 너처럼 착하지도 않고, 사랑받고 자라지도 않았는데 왜 너라는 과분한 선물을 받게 된 걸까.”
고개를 든 에이젠은 한 손에 다 들어오는 로아의 얼굴을 감쌌다.
“난 아직도 두려워. 너라는 사람이 내게 정당한 대가가 아닌 것 같아서.”
나 같은 게 널 앗아버린 걸까 봐.
물론 그녀를 좀 더 쉽게 손에 쥐기 위해 쌓아온 명성이었다. 그러나 이런 불순한 의도가 만천하에 드러나면 천벌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그녀는 저뿐만 아니라 누구나 탐내는 보석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에이젠.”
로아는 격하게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넌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에이젠의 어깨를 잡은 로아는 그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한 제국을 구했고, 트로네가의 명성답게 오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줬잖아. 그 목적이 비록 나만을 위한 것이었더라도 너는 대단한 일을 치른 거야. 그런 일을 아무나 해낼 순 없어.”
입장이 바뀌었다. 이번엔 자신감을 잃은 에이젠에게 로아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진작 죽었을 거야.”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같았다. 그가 저만을 위해 자세를 낮출 필요 또한 없었다.
“사랑해, 에이젠. 이제 행복하게 살자. 다시 시작하자.”
그가 저에게 해줬던 말을 되돌려줄 수 있게 됐다.
“전부 다 잊자.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짙은 숨결은 경계가 허물어지듯 섞여들었고, 낯선 땅의 차가운 밤공기는 낮게 가라앉았다.
***
수개월 후. 평화로운 오후의 트로네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쥬디, 쥬디!”
“마님, 천천히 내려오세요!”
어딘지 다급해 보이는 로아는 방에서 뛰쳐나왔다. 쥬디는 로아가 다칠까 봐 더 빠르게 달려 그녀의 앞으로 한달음에 도착했다.
“홑몸도 아닌데 예전처럼 급히 뛰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배도 나오고 있는데!”
쥬디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로아는 칠칠치 못했던 제 이마를 탁 쳤다.
“그렇지, 참. 미안해, 아기야. 놀랐어?”
로아는 아랫배를 살살 토닥이며 놀랐을 아기를 진정시켰다. 쥬디 역시 무릎을 굽혀 걱정스러운 눈으로 로아의 아랫배를 살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배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동시에 고개를 든 로아와 쥬디는 입을 떡 벌리곤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태동했다! 방금 들었어?”
“네, 들었어요!”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아기가 주인님을 닮아서 체력이 좋은가 봐요. 이 정도엔 끄떡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로아는 꿀을 머금은 듯 달콤해진 눈빛으로 아랫배를 내려다봤다. 아기에 한참 빠져있던 두 사람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뭐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아.”
로아는 쥬디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실타래를 가리켰다.
“이것 좀 봐! 또 망했어!”
쥬디는 정체 모를 실타래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실타래가 아니라 풀어둔 실이 마구 엉킨 모양새였다.
로아는 얼마 전부터 쥬디를 따라 자수와 뜨개질을 시작했다. 곧 태어날 아기에게 옷이나 모자 따위를 직접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곱게 자란 아가씨에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코 만드는 거에서 진도가 나아가질 않으니 어떡해요. 초반만 제가 떠드릴 테니 뒤에부터 하시라니까요.”
“싫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단 말이야.”
고집스럽게도 로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내고 싶다고 했다. 쥬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릴 때부터 봐왔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한결같은 아가씨였다.
“마님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그럼 특훈하게 이쪽으로 오세요. 못 익히면 날이 새도록 가르칠 겁니다.”
“응!”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로아는 쥬디를 붙잡고 맹연습을 했다. 슬슬 쥬디는 다른 일을 하러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로아는 자신이 주어진 과제를 다 해낼 때까지 쥬디를 놔주지 않았다.
기어코 코를 만드는 데 성공한 로아는 기진맥진한 몸을 쓰러뜨렸다.
“마님. 주인님 돌아오실 시간입니다.”
“벌써?”
로아는 지친 몸을 제대로 휴식하지도 못한 채 일어나야 했다. 막상 일어나니 에이젠을 마중 나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에이젠!”
에이젠이 보이자마자 있는 힘껏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로아는 의식적으로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천방지축 아가씨는 졸업하고 이제는 한 아이를 위해 훌륭한 엄마가 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잘 지내고 있었어?”
“그럼.”
에이젠은 로아와 가벼운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었다. 인사를 마친 후엔 그녀의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기야. 아빠 왔어. 잘 있었지?”
배 속의 아이와 인사를 나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젠, 에이젠.”
오늘은 아이와 아빠의 인사 시간을 길게 줄 수 없었다. 로아는 에이젠의 어깨를 잡아 얼른 일으켰다.
“보여줄 거 있어. 얼른 이리 와봐.”
로아는 에이젠을 방으로 이끌었다.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던 코를 보여주었다.
“흐흐, 이거 봐!”
로아는 자랑스레 보여주었지만 아직 형태도 없는 실과 바늘에 에이젠은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
“미안. 기뻐하는 네가 너무 귀여워서.”
“며칠 동안 이거 하나 못 해서 얼마나 매달렸는데.”
로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제 노력이 밴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다.
“본격적인 뜨개질은 이제부터 시작이지만 그래도 기뻐. 사이즈가 아기한테 딱 맞았으면 좋겠다.”
마음 같아선 하늘 높이 방방 뛰고 싶은 걸 참느라 애먹었다. 에이젠은 로아의 사소한 절제마저 알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로아가 안쓰러웠다.
“고생했어, 로아. 나도 아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녀가 노력하는 만큼 저도 뒤처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해산물 먹고 싶어.”
해맑은 요구였지만 저녁이 다 지난 시간에 식재료를 새로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것도 해산물이라면 내륙지역인 트로네 영지에서 꽤 먼 거리를 나가야 했다.
“해산물? 그건 지금 구하기 힘들 텐데.”
구하기 힘들다는 말에 방글거리던 로아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내가 아니라…….”
말끝을 늘이던 로아는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으로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아기가 먹고 싶대.”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도 임신한 로아를 위해 참아야만 하는 게 있었다.
“오래 걸려도 상관없는데.”
로아는 제 요구가 그를 곤란하게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임산부가 먹고 싶은 걸 참는다는 건 아기를 굶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몸을 휙 돌린 에이젠은 벗어두었던 겉옷을 다시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리예드.”
“네, 주인님.”
“마차 준비해. 지금 나가야겠으니까.”
“네? 이 시간에요?”
그제야 로아는 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든 구해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정말? 빨리 와야 해!”
사용인들만 시켜도 됐을 걸 에이젠은 직접 마차에 몸을 실었다. 로아는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아기를 위한 뜨개질을 이어가기로 했다.
로아는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갔다. 괴로운 기억을 잊는다는 건 결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배 속의 아기가 생긴 걸 알고 난 후 유례없던 행복을 느끼며 이 또한 가능하리란 희망을 갖게 됐다.
고통의 시간이 떠오를 것 같을 때면 정원으로 나왔다. 가장 좋아하는 은목서 나무를 보며 에이젠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고통의 굴레를 겪기 전, 가장 순수했던 때. 우리는 그때의 시간에서 성장 후 지금의 시간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새로운 시간을 함께 꾸려갈 것이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