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 첫 인연
클라리온 백작의 영지는 헤이든 제국 백작의 영지 중에서도 수도와 가장 가까웠다. 그만큼 클라리온가는 백작이라는 계급 중에서도 황제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역할을 맡았다.
클라리온 백작의 첫째 아들 셰인데릭은 소백작으로서 법과 정치에 대한 공부는 물론 실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둘째 아들 카일론은 셰인데릭에 비해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클라리온 백작 역시 그의 자유를 지지했다. 헤이든 제국을 떠나 이웃 왕국까지 여행을 자처하고 돌아온 카일론은 자신의 포부를 펼쳐놓았다.
“저는 황실 조경가가 되고 싶어요. 각국을 여행 다니면서 나라마다 각자의 정원을 꾸미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건 신선한 충격이었거든요. 희귀한 수종도 정말 많이 공부했어요. 국토를 아름답게 하여 황제 폐하의 위엄을 높이는 일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귀족 가문으로 태어나, 평민들이나 할 법한 일을 꿈꾸는 그의 포부는 참으로 당찼다. 보통이라면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클라리온 백작과 가족들은 모두 카일론의 꿈을 응원해주었다.
“와, 향기롭다! 오빠, 여기에서 꽃향기가 나.”
“이건 은목서라는 나무인데, 꽃이 아니라 잎에서 나는 향기야. 가까이 다가가서 맡아볼래?”
클라리온 백작의 막내딸 로아는 카일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녀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카일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여독이 남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린 로아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그걸 직접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로아는 방 안에서 가만히 책을 읽는 것보다 숲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비가 와서 성 밖을 나갈 수 없는 날엔 카일론의 서재에 딱 붙어 그가 그려내는 도면을 구경하곤 했다.
클라리온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 조경가 일을 시작했다. 그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금세 수도까지 소문이 퍼졌다. 귀족 가문의 자제가 직접 손봐주는 정원이라는 건 하나의 프리미엄이 되었다.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 조경을 의뢰받았다고?”
“네. 대공 저하의 명예를 높여드리기 위해서 조금 특별하게 설계해보려고 해요.”
“정말 대단하다, 카일론. 황실 조경가가 되는 것도 머지않겠는걸.”
트로네 대공 저의 정원을 위해 카일론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행했던 것과는 차별화를 두고 싶었다.
며칠씩이나 서재에 틀어박힌 카일론은 늘 제 옆에서 쫑알거리던 로아마저 서재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로아는 들여 보내주지 않는 카일론의 서재 문 앞에 쪼그려 앉아있다가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가기도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녀들의 눈을 피해 카일론의 서재 앞을 얼쩡거렸다. 그날은 운 좋게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카일론과 마주쳤다.
“오빠, 어디 가?”
로아의 눈은 카일론이 등에 멘 묵직한 물건들이 가득 담긴 가방으로 향했다.
“숲에 갈 거야. 전정 연습도 하고 수종 공부도 하러. 로아도 갈래?”
“응!”
로아는 오래간만에 카일론의 손을 잡고 성 밖으로 나섰다. 바로 뒤에 있는 우거진 숲은 고요하고 공기가 아주 상쾌한 곳이었다. 카일론과 고용인들이 수종을 조사하고 다닐 동안 로아는 풀밭과 나무 사이를 자유로이 뛰어다녔다. 푹신해 보이는 잔디밭에 몸을 던져 구르기도 했다.
“아가씨, 이러면 안 돼요.”
그럴 때마다 따라 나온 유모의 손에 일으켜 세워지는 바람에 온전하게 즐기지는 못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떨어뜨려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로아는 카일론이 거대한 가위를 꺼내 들었을 때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오빠, 나뭇가지를 왜 잘라?”
로아는 카일론이 올라타 있는 사다리를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식물의 맹아력을 위해서 이 부분을 잘라주면 더 수월하게 수형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
싹둑, 하고 잘려 떨어진 나뭇가지가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그래도 나무를 위해서이니, 아파도 치료를 받는 것 정도로 생각됐다. 돗자리를 깔고 앉은 로아는 카일론이 잘라내는 것들을 관찰했다. 어쩐지 그가 잘라낼수록 나무의 모양이 정형화되어가고 있었다.
“이것도 맹아력을 위해서 자른 거야?”
“아니. 이건 토피어리라고 하는 거야. 내버려두면 멋대로 자라니까 지저분해 보여서 미관상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해 예쁜 모양으로 다듬는 거지.”
카일론의 설명에 로아는 불만이 생긴 듯 양 뺨을 부풀렸다.
“지저분하지 않아.”
단호하게 말하는 로아에 카일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뭇가지가 한쪽만 볼품없이 튀어나와 있는 건 예쁘지 않잖아.”
“나무의 성장을 위해서 잘라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오로지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아프게 하는 건 별로야.”
카일론은 ‘나무를 아프게 한다’는 로아의 귀여운 발상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때가 가장 아름다워. 튀어나와 있는 나뭇가지도 그것 나름의 볼거리가 되는 거야.”
그러나 꽤 심도 있는 철학이 담긴 로아의 말에 그는 웃음을 거두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
성으로 돌아온 카일론은 골머리를 앓던 트로네 대공 저의 조경을 위한 계획을 마쳤다. 며칠 뒤 그는 트로네 대공 저에 방문했다. 자신의 계획을 트로네 대공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지었다.
“대대로 트로네 대공 가문은 평화를 중시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문의 철학을 정원에 반영한 것입니다. 오로지 겉으로 보이는 미관을 위해 자연을 해치는 것은, 겉으로 보여주는 위엄을 위해 별것 아닌 이유로 소국들을 지배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부터 실행하여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트로네 대공의 선진적인 모습을 표현한 정원입니다.”
카일론의 설명을 들은 트로네 대공은 그의 계획대로 정원을 꾸밀 것을 허가했다. 그리고 정원이 완성되었을 때, 그 어떤 영지에서도 본 적 없는 정원에 모든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꼭 정원이 아니라 숲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트로네 대공의 영식인 슈카트는 카일론과 함께 완성된 정원을 거니는 내내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귀족 가문 자제분께서 설계한 정원은 다르네요. 아버지께서도 깊은 철학이 담긴 정원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사실 이 아이디어를 준 것은 제 여동생 로아입니다. 제가 토피어리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아름다운데 왜 나무를 아프게 하느냐고 따끔하게 나무라더군요.”
카일론은 뾰로통했던 로아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 주 정도에 저희 만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레이디 클라리온도 함께 오시면 좋을 것 같군요.”
“가문의 영광입니다.”
***
로아는 카일론과 함께 트로네 대공가 만찬 자리에 초대받은 것을 매우 기뻐했다. 트로네 성에 방문하기로 한 날. 하녀들은 로아의 머리를 빗겨주고 옷을 입혀주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조언했다.
“아가씨, 트로네 대공 각하의 정원에서 멋대로 뒹굴고 그러시면 안 돼요.”
“알겠어. 걱정하지 말라니까.”
트로네 대공 저와 클라리온 백작 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로아는 의젓한 숙녀로서 트로네 대공과 그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만찬 자리에서는 온통 정원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나 로아는 이야기만 나누는 것 말고 직접 정원으로 나가 구경하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꾸만 창밖을 향했다.
“레이디 클라리온의 관심사는 오로지 정원인 것 같군요. 저희는 잠시 얘기를 나눌 동안 정원에 다녀오라고 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슈카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아는 얼른 정원으로 나왔다. 자신이 살던 성보다 훨씬 큰 이곳을 둘러싼 울창한 숲에 로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꼭 성 뒤에 있던 숲에 들어온 것 같아.”
숲 같은 정원에 편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길을 따라 걷자 뒤뜰이 나왔다. 평소의 보폭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뒷정원을 거닐었다. 그때, 어두운 관목숲 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키가 큰 교목에 눈이 팔려있던 로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거기 누구 있어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리 나와요. 왜 거기에 숨어 있어요?”
관목 숲에 몸을 숨겼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로아는 그가 트로네 대공의 영윤일 것이라 예상했다.
“난 클라리온 백작의 막내딸 로아 클라리온이라고 해요. 이 아름다운 정원을 설계한 카일론의 동생이죠. 만찬에 초대받아서 이곳에 왔는데…….”
저를 소개하던 로아는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왜 만찬 자리에 오지 않으셨죠?”
소년은 로아가 쫑알대는 동안에도 바닥만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로아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네?”
저보다 계급이 훨씬 높은 대공 영윤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로아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정원이 궁금해서 나왔습니다. 얼른 다시 들어갈 테니, 여기서 날 만난 건 비밀로 해주세요.”
제 할 말만 마친 소년은 얼른 등을 돌렸다.
“저기!”
로아는 다급하게 등 돌린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지 말고 나온 김에 나랑 같이 정원 구경해요. 아직 다 둘러보지 않았죠? 여기보다 더 예쁜 곳도 있어요.”
멈춰선 소년이 다시 로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를 향해 친절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민 레이디.
이곳에 온 이후론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저를 향해 웃으며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준 것은.
“정원을 보고 싶어서 나오셨다면서요. 아직 다 못 둘러보신 거죠?”
저를 향해 지어주는 미소.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낯설면서 두렵기도 했다.
“근데 이 성에 살고 계시면서 정원이 바뀐 걸 전혀 모르셨어요?”
로아의 물음에 소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아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으세요?”
소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로아는 곧바로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을 깨우쳤다. 얼른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죄송해요. 혹시 실례가 됐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로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화제를 돌릴 만한 것을 찾았다. 때마침 커다란 공기덩이가 부드러우면서 선선하게 불어닥쳤다.
“아.”
로아가 쓰고 있는 모자가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그녀의 기다랗고 금빛이 맴도는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소년은 가만히 서서 예쁘게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와! 저기 좀 봐요!”
로아는 날아간 모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키가 커다란 교목의 수형이 마구 흐트러졌다. 낡은 잎사귀 몇 개는 떨어져서 흩날렸다.
“여기에 앉아서 나무의 수형이 흩날리는 걸 보면 장관일 거 같아요.”
로아가 소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소년은 자신의 피부에 닿는 온기에 놀랐다. 그러나 저를 이끄는 그녀의 작은 손을 뿌리치고 싶지는 않았다. 로아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여기 앉아 봐요.”
로아는 푸른 잔디밭에 아무렇지 않게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 귀족 가문 아가씨의 털털한 모습은 놀라웠다. 그러나 소년은 곧 로아가 가리키는 자리에 함께 털썩 앉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사선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정말 예쁘다. 역시 가위로 다듬어서 모양을 낸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로아는 한참이나 대교목의 수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년은 그녀가 보는 곳을 잠깐 보다가 눈동자를 로아 쪽으로 돌렸다.
누가 봐도 사랑받고 자란 어여쁜 아가씨였다. 밤에도 반짝거릴 정도로 예쁜 머리카락과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 소년의 눈에 아름다운 것은 정원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