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104)화 (104/107)

에필로그 2. 꿈, 그 자체

정면만 올려다보던 로아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저의 흘끗거림을 느꼈을까, 소년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공 각하의 영윤 맞으시죠?”

로아는 소년을 따라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애써 눈을 맞추려는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로아의 노력이 통했는지 소년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년의 암울한 목소리에 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연이 있나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손님을 초대한 자리에 유일하게 빠진 식구가 있었다니. 로아는 딱한 마음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입을 꾹 다물어도 로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외려 자신을 배려해주었다. 소년은 제대로 고개를 들어 로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웃는 얼굴이 꼭 따사로운 햇살 같았다. 달빛만이 빛나는 이 밤을 가득 메워줄 정도로 따뜻한 기운이었다.

“털어놓으면 나아질 거예요. 혼자만 끙끙 앓으면 답답할 테니까.”

그의 마음속에는 사람을 강하게 경계하는 강철같이 두꺼운 벽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와 미소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져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어쩌면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소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난 마를레나 부인의 자식이 아닙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비밀이었다. 로아는 속으로 놀랐지만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내 아버지가 트로네 대공인 줄도 몰랐습니다. 평민 어머니와 단둘이 오랫동안 살았거든요.”

“그럼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시나요?”

잠시 뜸을 들인 소년이 묵직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셨습니다.”

로아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홀로 남겨진 저를 거두신 겁니다.”

얼굴도 모르는 자식이 뒤에서 어떤 음모를 꾸릴지 무서워진 건 트로네 대공 본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성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그의 부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사람대접을 받을 순 없었다.

“마를레나 부인은 나를 인정하지 못해서…….”

“그래서 손님이 왔을 땐 함부로 바깥을 자유로이 출입하지도 못한 거군요.”

손님이 왔을 때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 아름다운 정원이 설계되는 동안에도 소년은 지하실에 갇혀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됐든 로아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맞다,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소년은 자신의 이름마저 희미했다. 친모가 죽은 이후론 그 이름을 불러준 자가 없었으니. 지긋이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천천히 제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이젠.”

“에이젠!”

소년이 제 이름을 툭 내놓자, 로아가 곧바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따뜻하게 불리운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에이젠은 놀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헤헤, 그냥 불러봤어요.”

그가 놀란 모습을 보이자 로아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말 편하게 할까?”

로아에게 격식을 차리는 것은 피곤하고 귀찮았다. 어른들이 없는 자리에서만이라도 또래의 아이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에이젠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로아는 말을 놓았다.

“에이젠은 꿈이 뭐야?”

“……꿈?”

“응.”

감히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런 거 없어.”

“왜? 하고 싶은 거 없어?”

“난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이 저택 지하에 갇혀 살아야 할 운명이야.”

늘 방에 갇혀 있는 신세에 무엇을 이뤄낼 수 있을까. 삶 자체가 무기력했다.

“적어도 아버지와 마를레나 부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로아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에이젠 쪽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

에이젠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로아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카일론 오빠도 차남이라서 하고 싶은 꿈을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아. 오히려 가문의 핏줄을 의무적으로 이어받아야 하는 장남보다 더 행운인 자리인걸.”

들이켠 것이 내쉬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에이젠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햇살 같다는 생각은 취소하고 싶었다. 그녀의 해사한 미소와 희망적인 말을 건네는 마음씨는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었다.

에이젠은 이렇게까지 저를 격려해주는 로아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대답해줘야 할 듯한 의무감이 들었다.

“그냥 이곳에서 출가하고 싶어.”

고작 내놓은 것이 이거였다. 당장 원하는 것은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그러려면 더욱 꿈을 키워야지.”

로아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들고 눈을 감았다.

“음, 에이젠은 키가 크니까 멋진 기사님 어때?”

로아는 에이젠이 생각해내지 못한 그의 꿈을 어울리는 것으로 추천했다.

“견습 기사가 되어 훈련받을 땐 기사단에 들어가고, 서임받은 후엔 가문에 들어가야 하잖아. 거기서 더 성장하면 황실 기사단에 스카우트 될지도 몰라. 그럼 트로네 가문의 명예도 드높이면서 에이젠이 원하는 출가까지 할 수 있게 돼.”

로아의 말을 가만히 듣던 에이젠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서임받은 후에 호위를 할 가문. 에이젠은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그녀의 가문 이름을 되새겼다.

“……기사.”

에이젠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로아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뒤쪽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아, 은목서다!”

은목서가 식재된 곳을 발견한 로아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에이젠, 이쪽으로 와봐.”

어느새 은목서의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에이젠을 향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에이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은목서 식재지로 다가갔다.

은목서에 바투 다가간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무릎을 굽혔다. 향긋하게 풍겨오는 냄새를 맡은 로아의 입가엔 부드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에선 정말 향긋한 냄새가 나. 가까이 와서 맡아봐.”

에이젠은 로아가 하는 대로 상체를 살짝 숙여 은목서의 향을 맡았다. 그러다 문득 로아와 너무 가까워진 것을 발견했다.

“꽃이 아니라 잎에서 향기가 나는 거래. 신기하지?”

은목서에서 나는 향기인지, 그녀에게서 풍기는 체취인지 헷갈릴 정도로 가까웠다. 그 정체가 뭐가 됐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로 향기로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야. 무조건 아름다운 꽃에서만 좋은 향기가 나는 줄 알았는데, 평범해 보이는 잎에서도 좋은 향기를 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나무거든.”

로아는 에이젠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안 그래도 가깝다고 느껴진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에이젠도 마찬가지야.”

또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뒷목이 빳빳하게 굳는 것도 느껴졌다. 그 정도로 긴장감이 올라왔다.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쿵거리기도 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겠지만, 언젠간 제국에 없어선 안 될 귀한 인재가 될 날이 분명 올 거야. 그땐 트로네 대공님도 마를레나 부인도 에이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걸?”

부드럽고 선선한 공기덩이가 또 한 번 불어닥쳤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에서 헤어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이 분명 바람에 흐트러지고 있는데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

로아를 만난 이후 에이젠은 꿈이 생겼다. 어쩌면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에이젠에겐 인생을 뒤집을 정도의 영향을 준 말이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트로네 대공과 마를레나 부인은 에이젠의 의도를 알았다. 지하실에 갇혀 학대당하며 사육되듯 사는 제 삶에 지쳤을 것이다. 그런 에이젠에게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건 의외였다.

트로네 대공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그의 존재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를레나 부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를 정당하게 저택 밖으로 내쫓을 방법으로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굴러들어온 에이젠의 존재가 한 집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치가 떨리고 싫었으니. 마를레나 부인의 적극 찬성에 트로네 대공도 결국은 허락을 내렸다.

“그래. 멋진 기사님이 되어서 아무 가문의 레이디나 호위하러 가버리렴.”

바라던 바였다. 기사를 서임받은 후엔 반드시 클라리온 백작가를 찾아갈 것이다. 매일같이 그녀의 옆을 따라다니며 지켜줄 것이다. 그녀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은 그 누구도 다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데뷔당트를 마치게 되는 날엔…….

에이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마를레나는 이 성에 온 이후 그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인데도 그 미소가 음침한 분위기를 풍겨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여튼 쟬 보고 있으면 불길해!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로 나가버려!”

에이젠은 대공의 성을 나서기 전 뒷정원에 식재되어 있는 은목서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허리를 숙여 은목서가 풍기는 향긋한 잎의 향을 맡자, 그녀와 가까워졌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는 손으로 작은 잎사귀 하나를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언젠간 반드시 멋진 기사가 되어 그녀의 손등에도 이렇게 입을 맞출 것이다.

에이젠은 은목서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대공의 성을 나섰다. 사설 기사단에 입단해 견습 기사가 되었다. 그의 성에 ‘트로네’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바깥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친절했다. 지하실에 갇혀 온갖 구박과 학대를 당했던 삶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사가 되겠다고 출가를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기사를 할 생각도, 저택 밖으로 나가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기력했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그녀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지하실에 갇혀 지낸 세월이 있었던지라 그에게 훈련은 남들보다 훨씬 고되었다. 어쩌면 평민 신분이었다면 기사단에 입단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트로네’라는 성을 갖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남들보다 부족한 만큼 배로 노력하여 훈련에 임했다. 고된 훈련보다, 언제 기사가 될지 모른다는 미래의 불안감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따로 있었다.

그녀는 백작가의 딸이기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이미 정혼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한날한시라도 빨리 기사를 서임 받아 떳떳하게 그녀를 찾아가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나의 레이디.”

에이젠은 매일 훈련을 마치고 검을 검집에 넣은 후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자신에게 기사라는 꿈을 갖게 해준 그녀가 제 꿈 자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자를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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