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105)화 (105/107)

외전 1. 준비

달칵-

집무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류를 보고 있던 에이젠은 고개를 들었다. 분명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는데 문틈은 아주 살짝만 벌어진 채였다. 사용인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찾아온 손님은 한 명뿐이겠지.

씩 미소 지은 에이젠이 팔짱을 낀 채 의자에 편히 기대어 앉았다.

곧 좁은 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로아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젠.”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보고 있는 에이젠에 흠칫 놀랐다.

“뭐 해?”

“일하고 있었지.”

“바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에이젠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일을 방해할까 봐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로아를 위해 성큼 걸어나갔다.

문을 벌컥 열자 그제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문이 사라졌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에이젠이 눈꼬리를 휘어뜨리며 물었다. 로아는 괜스레 집무실로 고개를 내밀고 그가 하고 있던 일을 살폈다. 아직 쌓여있는 서류를 보니 그리 한가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에이젠이랑 놀고 싶어서.”

로아는 제 치맛자락을 쥔 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임신한 후 로아는 부쩍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마치 어린 시절 카일론과 놀고 싶어 그의 작업실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뭐 하고 놀까?”

에이젠은 등허리를 구부려 로아와 다정히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긴 했지만 로아가 저를 필요로 한다면 우선순위는 밀리기 마련이었다.

“음…….”

꾸물거리던 로아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예쁜 날씨였다.

“숲에 산책가고 싶어. 슬슬 꽃 필 계절이기도 하고.”

로아는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욱 해사한 미소로 말했다.

“그리고 다녀와서는 차 마시자. 벨라니스가 수제청을 보내줬어.”

로아는 벌써 신이 난 듯 에이젠의 두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에이젠은 그런 로아를 마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가자.”

에이젠은 곧바로 로아의 손을 쥔 채 앞장섰다. 그대로 나가려던 두 사람을 붙잡은 건 하녀들이었다. 로아는 숲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임신 후 예민해진 피부가 햇빛에 타지 않도록 챙이 넓은 모자와 양산도 챙겼다.

쥬디는 라탄 가방에 두 사람이 출출할 때 꺼내 먹을 만한 간식거리와 몇 가지 필요 물품들을 담아주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부터 로아는 근질근질한 몸을 참지 못하고 내내 창밖을 바라보며 바람을 쐤다. 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보는 똑같은 풍경인데도 오늘따라 ‘와-’ 하며 탄성을 쏟아냈다.

숲에 도착하자마자 로아는 가벼운 걸음으로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기분이 너무 좋아지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닐까 봐 하녀들이 더욱 노심초사한 얼굴로 로아의 뒤를 따랐다.

어느덧 봄이 찾아오고 나무엔 무성한 꽃과 잎사귀가 돋아나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걷던 로아는 어딘가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더니 치마를 곱게 잡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에이젠 여기 봐. 풀꽃도 잔뜩 있어!”

로아는 한 손으론 풀밭 위를 가리키고 다른 손으론 에이젠에게 어서 와보라는 듯 손짓했다. 에이젠이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그의 눈엔 감성이 부족한 건지. 주변에 화사하게 예쁜 꽃송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초라해 보이는 풀꽃일 뿐이었다.

“예뻐, 예뻐!”

그러나 로아는 신나서 풀꽃들을 조금씩 뜯어냈다.

“조금 따가도 되겠지?”

편하게 풀밭에 주저앉은 로아는 따온 풀꽃들을 이리저리 엮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에이젠 역시 그녀의 옆에 편히 앉아 로아가 애써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봤다.

“짠, 꽃반지.”

꽃송이가 가장 큰 것을 골라 반지 모양을 만들더니 제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로아는 칭찬해달라는 듯 에이젠에게 꽃반지를 내밀며 두 눈을 초롱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당장이라도 입술을 머금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나도 하나 해줘.”

에이젠이 왼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로아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럴까? 커플 반지 낄까, 우리?”

로아는 에이젠을 위해 풀꽃을 샅샅이 뒤졌다. 가장 예쁜 것으로 고르기 위해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그중에 가장 싱싱하고 커다란 것을 찾아낸 로아가 싱글벙글거리며 반지로 만들었다.

“어렸을 때 카일론 따라서 숲에 종종 나갔어.”

풀꽃을 꺾고 엮는 동안 기다리는 에이젠이 심심하지 않도록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얌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거든. 그래서 카일론이 날 앉혀놓고 풀꽃을 꺾어다 반지도 만들고 화관도 만들고 이것저것 알려줬어.”

어렸던 로아가 가장 잘 따랐던 사람은 단연코 카일론이었다. 늘 야외로 작업하러 나가는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나갔고 로아는 외향적인 성격이 되었다. 고요한 숲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힐링하는 걸 좋아하게 됐다.

훌륭한 조경가가 된 카일론 덕분에 에이젠과의 인연도 맺어질 수 있었다. 그러니 로아에게 숲이란 아주 뜻깊은 있는 장소였다.

로아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화관을 만들어보려 했다. 그러나 잔뜩 뜯어놓은 풀꽃이 무색하게도 손이 그때를 잘 기억해내지 못했다.

“화관 만드는 법은 다 잊어버렸다. 실패네.”

화관을 만드는 것을 실패한 로아는 다시 꽃반지로 방향을 틀었다. 에이젠의 손가락을 보며 넉넉한 사이즈로 만들어 엮었다.

“난 숲이 좋아. 상쾌한 공기가 좋고 푸르른 녹음이 좋고 습기 찬 풀내음도 좋아.”

로아 자신도 에이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로아는 다시 한번 제 입으로 고백했다.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나무들, 다른 것 같지만 환경이 달라 모양이 조금 다를 뿐 같은 수종들. 숲은 봐도 봐도 새롭고 신기한 곳이야.”

숲을 둘러보던 로아의 시선 끝이 향한 곳은 에이젠이었다.

에이젠은 숲과 닮은 점이 많았다.

매일 같은 얼굴, 같은 사람인데 매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제보다 더 멋있어지는 것 같았고, 어제보다 더 저를 사랑해주는 것 같았다.

귀족 집안에서 원 없이 사랑받는 막내딸로 태어난 로아에게도 벅차게 느껴질 정도의 사랑이었다.

“아기가 나를 닮아서 숲이 궁금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내 의지인가?”

오늘따라 어리광을 부려서라도 나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에이젠이 일하는 중엔 웬만하면 방해하지 않으려 하던 로아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임신을 하게 되니까 뭐가 나고 뭐가 아기인지 잘 모르겠고 헷갈려.”

보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전부.

전부 제 의지가 아닐 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게 아무리 그녀가 좋아하던 거였더라도 의심이 들었다.

에이젠을 위한 풀꽃 반지를 완성한 로아는 씩 웃으며 에이젠의 손을 잡았다.

에이젠의 왼손 약지에 풀꽃 반지가 끼워졌다. 로아는 그 위로 제 손을 얹어놓았다. 같은 풀꽃으로 만든 반지가 두 사람의 손에 끼워져 있는 게 퍽 살가웠다.

“우리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겠지?”

로아는 에이젠의 손을 뒤집어 그 위로 손깍지를 꼈다. 맞잡은 손을 꼭 붙들고 사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에이젠은 로아의 해맑은 물음에도 쉬이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그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으나 곧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며칠 후.

제국의 인사들이 모여 정무를 보기 위해 에이젠은 수도로 떠났다. 그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로아는 초조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늦은 새벽에 돌아올 거라 말해놨던지라 먼저 자야 했지만 로아는 불안함에 침실을 빠져나왔다.

“오늘 에이젠이 늦네.”

1층에서 에이젠을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은 계단에서 기웃거리는 로아를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마님. 이제 주무시러 가실 시간이에요.”

후다닥 뛰어 올라온 쥬디가 로아의 손목을 이끌어 다시 침실로 데려가려 했다.

“그치만 에이젠이 아직 안 왔는걸.”

로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이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버텼다.

“곧 도착하실 거예요. 아기를 위해서라도 건강한 수면 패턴을 지키셔야죠.”

쥬디가 로아의 어깨를 다독여봤지만 그녀는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에이젠이 보고 싶어.”

아직도 그를 잃었던 불안감이 다 가시지 않은 건지. 그가 평소보다 늦는 날이면 로아는 어김없이 불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끼익-

때마침 알맞은 타이밍으로 바깥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쥬디는 로아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오셨나 봐요.”

리예드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에이젠을 마중 나갔다. 평소보다 오래 걸리는가 싶더니 이내 모습을 드러낸 에이젠은 제 몸을 다 가누지도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에이젠!”

화들짝 놀란 로아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쥬디는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팔을 붙잡은 채 함께 내려왔다.

곁으로 가자 그에게선 알싸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무슨 일인지 거나하게 한잔하신 모양입니다.”

리예드가 그를 부축하며 대신 대답했다. 로아도 함께 에이젠을 부축하려 했으나 사용인들이 그녀를 뜯어말렸다.

“저희가 부축해드릴 테니 마님은 무리하지 마세요.”

에이젠은 사용인들의 도움으로 계단을 올랐다. 로아는 불안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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