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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106)화 (106/107)

외전 2. 혼자가 아니라서

사용인들은 에이젠을 침실까지 부축해준 후 자리를 비켰다. 잔뜩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에이젠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로아는 그가 누운 침대 옆에 살포시 앉았다.

왜 이렇게까지 술을 마셨을까. 고민되는 게 있는 걸까.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미간이 좁아져 있는 걸 보니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이젠. 옷은 갈아입고 자야지.”

로아는 에이젠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눈살을 찡그린 그가 묵직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로아를 마주 보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제 몸에 올라온 로아의 손목을 잡더니 앞섶으로 가져갔다.

“로아가 도와줘.”

취한 와중에도 에이젠은 짓궂은 얼굴이었다.

“알겠어.”

로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곤 그의 옷가지를 벗는 걸 도왔다.

툭, 툭.

단추가 풀어질 때마다 벌어진 틈으로 그의 근육이 조금씩 드러났다. 예민한 손끝에선 단단한 피부의 감각이 느껴졌다.

몇 번이고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잤고, 서로의 나신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왜 아직도 야릇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엔 적응을 못 하는지. 주책맞게 뛰는 가슴에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임신 후 부부 관계를 갖지 않은 지 꽤 오래되어서 그런지. 별것도 아닌데 다리 사이가 뜨겁게 달아오를 것 같았다.

“에이젠답지 않게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에 말을 돌렸다. 그러나 어느새 몸을 일으킨 에이젠이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보고 끌어안기도 했던 몸이지만 로아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상의를 탈의한 그가 맨몸으로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이리 와.”

에이젠은 고개를 돌린 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슬쩍 곁눈질로 에이젠을 훑은 로아는 더욱 그를 등지고 앉았다.

“아직 옷 안 입었잖아.”

고개를 돌린 로아의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개진 귀가 보였다. 에이젠은 심술이 가득한 입꼬리를 올렸다.

“벗고 자지, 뭐.”

옆으로 누운 에이젠이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로아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몸을 눕혔다. 에이젠은 로아와 둘만 남으니 술기운에서 조금은 벗어난 듯했다.

“우리 아기는 오늘 뭐 했어?”

옆으로 바투 다가온 에이젠은 로아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아기의 안부를 물었다. 로아는 허공으로 시선을 둔 채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고기도 먹고 디저트로 맛있는 크레이프도 먹었지. 산책도 다녀오고 텃밭도 가꾸고 가볍게 운동도 했어.”

로아는 아기를 위해 건강한 패턴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평소라면 매일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에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투자했다.

아기에게 이 세상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동화책도 세 권이나 읽었다.”

로아는 에이젠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듯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에이젠은 사랑스러운 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이마 위로 입을 촉 맞추었다.

“행복해?”

“응.”

로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에이젠의 두 눈엔 어딘지 모를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로아는 고개를 돌려 에이젠을 똑바로 마주 봤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뺨을 감쌌다.

“에이젠이 내 곁에 있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이 행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둘이서 만들어 가는 행복이다.

그러니 무슨 걱정인지는 몰라도 그도 저와 함께 이 행복을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아는 말하지 않아도 에이젠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이를 품고 낳고 이후로도 아기를 위해 감당해야 할 것이 많은 로아를 향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로아가 아프지 않길, 괴롭지 않길 바랐던 남자였다.

흙먼지 한 톨 묻는 것도 오버할 정도로 자신이 대신해주던 남자.

그렇게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품게 했다는 것.

고귀하고 감사하면서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유일한 것에 무능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

에이젠은 로아를 품에 꼭 안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의 몸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로아는 품에 안겨서도 온갖 야릇한 망상에 빠졌다. 이 분위기에 취해 그와 이런저런 야한 스킨십을 나누는 상상. 그러나 곧 머릿속을 새하얗게 지워냈다.

“우리 아기…….”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중저음이 울렸다. 에이젠은 로아를 더욱 끌어안았다.

“좋은 부모란 뭘까.”

난데없이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로아는 흠칫 놀란 얼굴로 에이젠의 가슴을 밀어냈다. 고개를 들어보자 심란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에이젠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큰 상처를 받고 자랐다는걸.

“난 그런 사람 밑에서 자란 기억이 없어.”

아무에게도 축복받지 못할 부정한 관계. 그 사이에 원치 않게 태어난 아이. 친부에게 쫓겨나 친모와 거리를 떠돌며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았던 유년 시절. 세상에 증오만 남겨둔 채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모,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아이. 보복이 두려워 친부는 아이를 거두었지만 계모에게 받은 온갖 구박과 학대.

에이젠은 부모가 자식에게 마땅히 해줘야 할 도리 따위도 알지 못했다.

저와 달리 가족 구성원들과 화목한 분위기를 풍기는 로아를 보며 어깨너머 짐작해보는 게 전부였다.

에이젠은 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로아 넌 당연히 훌륭한 엄마가 될 테지만.”

다정다감한 백작 부부의 밑에서, 자상한 오빠들 아래에서 가장 사랑받고 자란 고운 아가씨니까. 그녀라면 가족이 어떻게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에이젠은 그런 로아가 부러웠다. 훌륭한 엄마가 될 로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아빠가 되진 않을까. 로아의 배가 불러올수록 그의 근심도 비례해 부풀어 갔다.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로아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자로 만들어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에게까지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은 없었다.

“두려워.”

깊은 고민에 빠져서인지 오늘따라 술이 달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에이젠은 거나하게 취할 만큼 과음해버렸다. 이렇게 하면 현실의 근심이 조금은 잊혀지나 싶었다. 그러나 생각 덩어리는 몸집을 부풀려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으니 더욱 실감하여 문제에 직면해 보라는 신의 계시 같기도 했다.

“나도 사랑받고 자랐다면 달라졌을까.”

두 눈을 감은 에이젠은 이룰 수 없는 가정을 꾸며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쥐고 태어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야, 에이젠.”

몸을 일으킨 로아가 에이젠의 위로 올라왔다. 양손으로 그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붙잡았다. 번쩍 정신이 든 에이젠이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해주고 있잖아. 혹시 내가 에이젠한테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내 마음을 다 느끼지 못한 거야?”

로아는 뾰로통해진 두 뺨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방금까지 했던 고민을 잠시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런 거 아냐.”

그의 얼굴에서 편안한 웃음이 나오고서야 로아도 심통 났던 표정을 풀었다.

“알아.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결이 다르다는 거. 에이젠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돼.”

로아는 자신의 배 위로 손을 가져갔다. 아직 올려진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근데 나도 그렇다?”

에이젠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말하는 로아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에이젠이 보기엔 내가 엄청 사랑받고 공주처럼 자란 사람 같겠지만, 이런 나도 내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받은 사랑을 곧이곧대로 물려줄 수 있을지 걱정돼.”

자라온 환경이 무엇이 됐든 누구나 부모가 될 준비를 하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누구나 그런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

에이젠은 자신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는 것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사랑받고 부족함 없이 자라온 로아 역시도 부모가 된다는 게 처음이고 긴장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난 그렇게 두렵지는 않아.”

로아는 두 손으로 에이젠의 손을 감싸 잡았다.

“왜냐면 에이젠이 내 곁에 계속 있어줄 거니까.”

그의 손을 이끌어 제 입가로 가져가더니 촉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나 혼자라면 두려웠을 거야. 하지만 에이젠이 함께 있어서 괜찮아. 내 부족한 점을 에이젠이 채워줄 수도 있고, 반대로 에이젠의 부족한 점은 내가 채워줄 거야.”

그렇게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가다 보면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는 멋진 부모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난 우리가 잘할 거라고 믿어. 그 많은 역경을 이겨냈으면서 더 이상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긍정의 기운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에이젠에게도 전해졌다.

“지금까지 우리가 실패했던 건 단 하나도 없어. 설령 그랬어도 다시 일어나서 기어코 해냈잖아.”

이보다 더한 시련이나 고난은 몇 번이고 겪어왔다. 그러니 앞으로 닥칠 게 무엇이 되든 감히 두려움을 들게 만들 순 없었다.

로아의 말을 듣고 나니 끙끙 앓던 것들이 마법처럼 녹아내렸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는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

“고마워.”

에이젠 역시 로아의 손등을 이끌어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부부로서의 신뢰를 다져갔다.

여자 하나만을 사랑하는 것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데 소중한 사람이 한 명 더 생긴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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