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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하여 (107)화 (107/107)

외전 3. 언제까지나 처음

3년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트로네 성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로아, 오빠들 왔다.”

각자의 시간을 낸 셰인데릭과 카일론이 함께 로아 부부를 보러 왔다. 원래는 함께 두 사람을 맞아주기로 했건만 에이젠은 급한 일이 생긴 바람에 저택을 비우게 되었다. 홀로 오빠들이 맞으러 나온 로아는 눈부신 햇살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밀리, 삼촌들한테 손 흔들어줘야지.”

로아의 품엔 작은 공주님이 안겨 있었다. 로아는 에밀리의 손목을 잡아 오빠들을 향해 흔들어주었다.

에밀리는 내려가고 싶다는 듯 버둥거렸다. 바닥에 내려주자 아장아장 위태로운 걸음으로 삼촌들을 향해 달려갔다.

셰인데릭과 카일론은 에밀리가 넘어질세라 얼른 눈을 맞추어 앉았다.

“앙녕하세여.”

에밀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아직 다 뭉개지는 발음이었지만 셰인데릭과 카일론은 에밀리보다 더 아이처럼 웃었다.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에밀리.”

“이제 제법 또박또박 말할 수 있게 됐네.”

카일론이 에밀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비행기를 태우듯 신나게 놀아주자 에밀리도 꺄르르 웃어 보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둘 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지?”

로아는 오빠들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일전에 와봤던 트로네 대공 저택과는 전혀 달라진 분위기였다. 사용인들은 미리 식사를 준비해둔 식당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대공 각하는 오늘도 출정?”

“아니. 오늘은 영지를 보러 나간 거라 금방 돌아올 거야.”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에이젠에 유감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황실에서 대공 각하를 뵌 적 있어.”

에이젠의 이야기가 나오자 카일론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맞아. 얼마 전에 알현하러 수도로 올라갔거든. 근데 카일론 얘긴 안 하던데?”

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젠이 황실에서 카일론을 만나놓고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니. 숨길 것도 아니었는데 왜 말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래? 그럼 그거 비밀이었나?”

카일론은 에이젠과 있었던 일을 상기하듯 고개를 치켜든 채 허공을 응시했다. 둘 사이에 뭔가 비밀이라도 생긴 걸까. 로아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더라고.”

“무슨 얘길 나눴는데? 말 안 할 테니까 알려줘.”

로아가 상체를 기울이더니 손을 귀에 가져다 댔다. 은밀하게 말해달라는 귀여운 모습에 카일론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비밀 얘기를 하듯 주변을 둘러보곤 로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더니 한다는 말이.”

“응.”

“화관 만드는 방법 좀 가르쳐 주시오, 이러지 뭐야.”

내용을 다 듣고도 로아는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뻑거렸다.

“화관?”

중대한 비밀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너무 느닷없는 주제였다.

“그래서 가르쳐드렸어?”

얼어붙은 로아와 달리 셰인데릭은 어울리지 않는 에이젠과 화관을 그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각하의 명인데 어쩌겠어. 다 큰 남자 둘이서 풀밭에 주저앉아 풀꽃 따서 화관을 몇 번이나 엮었는지.”

근처 숲으로 간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서 화관을 엮었다. 풀꽃을 얼마나 뜯었는지 손끝에 풀독이 오를 즘에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화관 만드는 법은 왜 가르쳐달라고 한 거야?”

“글쎄. 나중에 에밀리한테 예쁜 화관 만들어주려고 그러지 않으셨을까.”

카일론이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겠다. 에밀리. 나중에 아빠한테 화관 선물 받으면 이 삼촌 몫도 있는 거니 감사해야 한다?”

에밀리는 화관이 뭔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기울일 뿐이었다.

***

며칠 묵었던 삼촌들이 떠나고 오래간만에 세 가족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숲에 슬슬 꽃 필 시기인데 에밀리랑 셋이 숲에 가는 거 어때? 바람도 쐬고 산책도 하고 자연학습도 하고.”

“응, 좋아.”

셋이서 숲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에밀리는 어딘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창문에 딱 붙어 바깥바람을 쐬며 풍경을 구경하는 게 예전의 로아와 똑 닮은 모습이었다.

“우와아아아.”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에밀리는 탄성을 질렀다. 풀밭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에밀리의 뒤를 하녀들이 노심초사하며 쫓아다녔다. 거대한 교목으로 둘러싸인 울창한 숲을 눈에 다 담기 위해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엄마, 예쁘다! 아빠, 이거!”

신기하고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로아는 에밀리의 손을 꼭 붙잡고 가리키는 것마다 다정하게 설명해주었다.

“에밀리도 꽃을 좋아하는구나. 역시 엄마랑 똑같네.”

취향이 비슷한 딸이 사랑스러워 품 안에 꼭 안았다. 에밀리는 로아에게 안긴 채로도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식물에 관심을 가졌다.

“꽃!”

에밀리는 잔디밭 사이에 핀 풀꽃을 가리켰다. 그 앞에 편하게 앉은 로아는 풀꽃 하나를 꺾어 에밀리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이걸로 예쁜 꽃반지 만들어 줄까?”

“응!”

에이젠 역시 두 사람 사이로 걸어왔다. 로아의 옆에 딱 붙어있던 에밀리는 이번엔 에이젠에게로 가 폭 안겼다. 에이젠도 풀꽃을 꺾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빠는 뭐 만드러?”

“화관. 꽃으로 왕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쓰는 거야.”

꽃반지를 엮어 만들던 로아가 고개를 들었다. 얼마 전에 카일론에게 화관 만드는 법을 물어봤다더니. 사랑하는 딸 에밀리에게 직접 만들어주고 싶었던 예쁜 마음에 설핏 미소를 흘렸다.

“우와아! 에밀리 줄 거야?”

에이젠은 어느덧 집중했는지 에밀리의 물음에도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로아는 에이젠의 품에 있던 에밀리를 안아 제 쪽으로 데리고 왔다.

“아빠가 저거 만드는 동안 이쪽 길 한번 탐험 갔다 올까?”

“응! 아빠 예쁘게 만드러줘.”

로아는 아직 서툰 에이젠이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에밀리와 함께 숲을 산책하면서도 에이젠 쪽을 흘긋거렸다.

한참을 집중하던 에이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로아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엔 나름대로 잘 만든 화관이 쥐어져 있었다.

“다 됐나 보다.”

로아는 에밀리를 안아든 채 에이젠에게 걸어갔다. 에이젠은 환하게 웃으며 직접 만든 화관을 내밀었다.

“자, 완성.”

화관은 에밀리의 머리가 아닌 로아의 머리 위로 살며시 올라왔다.

“……어?”

로아는 어리둥절한 눈을 깜빡이며 에이젠을 올려다봤다.

“예쁘다. 공주님 같아.”

에이젠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눈빛으로 로아를 바라봤다. 화관을 쓴 로아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아빠! 에밀리 줄 거 아니었어?”

에밀리가 로아의 머리 위로 올라간 화관을 보며 뾰로통해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응. 엄마 거였는데? 에밀리 거는 이제 만들어줄게.”

“후에에에, 에밀리 먼저 줘! 내가 먼저 쓸래!”

에밀리가 로아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에이젠은 에밀리를 안아 제게로 데려왔다.

“안 돼.”

바닥에 에밀리를 내려놓은 에이젠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이 순서는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거야.”

에밀리의 두 손을 꼭 붙든 채 훈육하듯 다그쳤다.

“무조건 엄마가 먼저야. 에밀리는 그다음이고.”

에밀리는 서운한 듯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러자 에이젠은 에밀리를 번쩍 들어 안고 풀꽃이 잔뜩 핀 풀밭으로 데려갔다.

“대신에 더 크고 예쁜 것들로 만들어줄게. 착한 에밀리, 기다릴 수 있지?”

“흐잉. 빨리 해줘.”

로아는 제 머리 위에 올라간 화관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를 낳고 육아에만 치중하느라 불같이 사랑하던 때는 조금씩 사라지는가 싶었다. 가족을 형성하면 부부 관계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여겼으나 그게 아니었다.

에이젠은 여전히 세상 그 누구보다 로아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아이처럼 배시시 미소 지은 로아가 에이젠에게로 살며시 다가갔다. 에밀리의 앞에서 풀꽃을 엮던 그의 널찍한 등 위로 폭 안기듯 쓰러졌다.

“에이젠, 고마워.”

에밀리가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건지. 로아는 그의 등에 매달린 채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그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에이젠은 제 목을 감싸 안은 로아의 팔 위로 입술을 내려놓았다.

“나도.”

부부는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말하지 않아도 오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타오르는 불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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