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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화 (3/475)

〈 3화 〉 3화 : 내가 용사라고? (3)

* * *

주마등, 이라는 말을 처음 가르쳐준 건 누구였을까?

병에 앓던 마을 할머니였을까, 아니면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아저씨였을까?

아무튼 인생을 살면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순간들이 눈앞에 주루룩 펼쳐지는 게 주마등이라고 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음, 사실이었다.

돌뿌리에 걸려 몸이 공중에 붕 떴을 때, 스스스스슥 여러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즉, 나는 지금 끝장났다는 거다.

주마등은 내가 곧 죽을 거라고 미리 알려주는 저승사자의 친절한 안내장이었다.

차라리 밴시가 낫겠네.

주마등을 보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보니, 공중을 날던 몸이 드디어 땅바닥에 닿았다.

“커흐억!”

……더럽게, 아파!

게다가 달리던 속도 때문에 땅을 몇 바퀴 구른 뒤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건 둘째이고, 팔다리가 아픈 데다 숨도 잘 안 쉬어진다.

이건 못 일어난다.

이럴 거면 그냥 기절하지, 왜 깨어 있는 거냐, 내 의식아.

왜 미리 주마등 보여줘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목구비가 뒤틀린 몬스터들이 입을 비죽이며 달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죄송해요, 아버지. 먼저 가니 잘 계세요.

엄마, 금방 갈게요!

“키야아아악!”

……내 비명치고는 너무 꼴사나운데.

아니, 어디 아프지도 않으니까 내 거 아니야.

무엇보다도, 아직도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있다는 그 ‘느낌’이 느껴졌다.

즉, 나는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이다.

눈을 떴다.

그러자 넘어져 있는 내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은 죄다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누군가, 메린은 숨을 헉헉대면서, 온 몸이 피로 빨갛게 물든 채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아, 살아 있네. 다행이다.”

그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몬스터들 몇 마리가 다시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죄다 해치워버렸다.

그러나 확연히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고, 놈들을 없앤 다음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메린!”

“시끄러, 귀 안 먹었어. 너 땜에 뛰어오느라 다리가 풀렸을 뿐이야.”

우리를 에워싼 몬스터들의 뒤에서도 괴성이 들려왔다.

……설마 이 녀석, 내가 주의를 끌자마자 바로 나한테 뛰어온 건가?!

“이 멍청이가! 내가 기껏 머리를 써서 살 틈을 만들어줬는데 왜……!”

“흥, 가다가 엎어진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왜냐고? 글쎄, 왜일까? 나도 모르게 그냥 몸이 움직였어.”

오크 세 마리가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양손에 쥔 칼을 휘둘러 짧은 순간에 손목과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 힘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움직임이 커진 틈을 타, 고블린 한 마리가 몸통 박치기로 그녀를 넘어뜨렸다.

“꺄윽!”

“메린!”

고블린이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더니, 의기양양한 얼굴로 칼을 높이 들었다.

그녀가 떨어뜨린 칼 하나가 내 근처로 밀려와 있었다.

움직여라, 팔!

움직이라고!

말을 잘 안 듣는 팔을 채근해 칼을 집고, 고블린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녀석의 위로 쓰러졌다.

칼날이 녀석의 가슴을 꿰뚫는 게 손에 느껴졌다.

“캬으아아아악!”

칼을 뽑고 녀석의 얼굴을 세게 짓밟은 후, 메린에게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점점 거리를 좁히는 녀석들에게 칼을 겨누며,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메린! 야, 정신 차려!”

“으…… 이제 끝인가보네. 몸이 안 움직여…….”

체력이 완전히 빠졌는지, 그녀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누구 맘대로 끝이야?! 얼른 일어나!”

“흥, 센 척하긴. 뭐, 그래도 마지막에 멋진 모습 보여주는구나. 팔다리를 벌벌 떨고 있어서 그렇지.”

“떠들 기운 있으면 일어나라니까!”

“못 일어난다고. 아니…… 일어나기 싫은 건가? 아무튼, 너한텐 미안하네. 괜히 나 때문에……. 아니다, 난 분명 너한테 가라고 했잖아. 네가 안 간 거지. 이거 내 잘못 아니다? 행여나 내 탓하지 마라.”

메린의 목소리는 잠에 빠지는 것처럼 점점 더 가늘어졌다.

“메린, 너……!”

“아, 맞다.”

그녀는 실실거리며 웃었다.

이 상황에 뭐가 웃긴 건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그냥 홧김에 말한 거란 건 알지만, 결혼하자고 해줘서 기뻤어.”

어딘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머리 터진 등신아! 뭘 혼자 폼 재면서 유언 날리고 있어?! 소녀 짓을 하고 싶으면 여기가 아니라 마을에서 해! 난 너 지키다가 죽었다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빨리 일어나, 새꺄!”

달려드는 고블린을 붙잡아서, 뒤따라오는 오크들에게 던져버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졌었는데, 이상하게 팔에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지금은 메린 녀석이다.

지금 무기를 들고 있는 건 나뿐이다.

둘이서 같이 싸우다가 죽으면 몰라, 나 혼자 칼 든 채 죽는다면 분명 마을 사람들이 ‘사실 둘이 그런 사이……?’ 라며 영혼 결혼식이라도 올려버릴 게 분명하다.

아니, 영혼 결혼식은 어쨌든, 이 녀석이 이렇게 비실비실 늘어진 채로 죽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메린이 아니다.

이 녀석이 그렇게 곱게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아는 메린은 팔다리 기운이 다 떨어지면 이빨로 목을 물어뜯을 또라이야! 그러니까 일어나! 혼자 그렇게 바닥에 퍼질러서 편히 죽는 건 내가 용서 못해! 일어나서 싸워!

마지막까지 너 답게 있으라고! 메린 소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괴성과 고함에 섞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계속 몬스터들이 달려들어서 그럴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뒤를 돌아보면 나까지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이건 꿈이야. 내 인생에서 제일 어처구니없는 꿈이라고.

단지 ‘밖에서 청춘을 만끽하고 싶다’고 바랐을 뿐인데, 양치는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데서 죽는다고?

그것도 메린 답지 않은 메린이랑?

웃기지 마.

죽는 건 싫지만, 이런 상황에서 죽는 건 더 싫다고!

적어도 저 녀석이, 저렇게 질질 짜며 비실대는 모습을 보면서 죽는다니 절대 인정 못해.

원령이 되어 이딴 세상 저주해버릴 거야!

‘그렇다면, 바라야 할 것이다.’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원하는 것을 떠올리라고. 소망을 품으라고.

그래서 바랐다.

간절히 바랐다.

눈앞의 저 몬스터들이 싹 쓸어지는 기적을 바랐다.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기적을 바랐다.

“……읏!”

햇빛에 반사라도 되는 건지, 갑자기 칼날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검을 휘두르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서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칼날에서 엄청난 세기의 빛이 뿜어져 나와, 눈앞을 온통 새하얗게 비추었다.

거기서 뚝, 의식이 끊어져버렸다.

아주 머나먼 곳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온 몸이 물에 뜬 것처럼 두둥실, 파도 타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죽으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서 신께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지금 그렇게 가는 도중인가보다.

분명 지금 눈을 뜨면 한 번도 못 본 굉장한 절경을 볼 수 있을 텐데.

정말 아쉽게도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떠지질 않는다.

그렇게 하늘하늘 떠가던 내 몸이, 어느 푹신한 곳에 뉘였다.

분명 구름이다.

하늘은 신의 영역이니까, 구름이 침대 대용으로 쓰여도 별반 이상할 것 없다.

분명 여기에 엄마도 있다.

엄마는 내가 누워서 뒹구는 걸 항상 못 참았으니까, 엄마가 보기 전에 얼른 눈을 뜨고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용을 쓰고 있는 내 얼굴 위로,

엄청나게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푸하아으아아아악!”

“아, 깨어났다.”

아무래도 나는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방금 심장이 멎어 죽을 뻔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흔적 없이 정확히 심장을 노리다니 제법이군.

게다가 온 몸이 아픈 걸 보니 나는 지금 환자이다.

‘깨어났다’고 하는 거 보면 날 죽이려는 원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간병인이야?

아니, 환자 얼굴에 물을 끼얹는 정신 나간 간병인이 어딨어?

나는 가능한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집중해보았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촌장님, 아버지, 검술 사범님, 그리고……

“메린……? 뭐야…… 너 멀쩡해……?”

우와, 내 목소리 엄청 갈라져 있어.

그보다도 나랑 같이 험한 꼴을 당했던 메린이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꿈인가?

메린이 내게 물을 먹이며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뭐?”

“……너 엄청 피범벅이었잖아!”

메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아, 그거. 내 피 아니었는데. 말했잖아, 그냥 다리 풀린 거라고.”

“……”

어이가 없네, 진짜.

그렇게 날뛰어 댄 메린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고, 나는 붕대말이라고?

심지어 일어나고 싶어도 몸이 쇳덩이처럼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다.

아니, 제기랄, 왜 나만 이래?!

“……그건 그렇고, 저 어떻게 왔어요?”

내가 묻자, 촌장님이 자못 심각한 얼굴을 지었다.

“역시 기억을 못하는군. 어떻게 오긴, 자경단원들이 너랑 메린을 데려왔지.”

“아니,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놈들은 당장이라도 나랑 메린의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싶어 죽겠다는 기세였었다.

아무리 날쌘 말을 탄다고 해도 자경단원 아저씨들이 도착했을 즈음엔, 적어도 목은 떨어져 있었을 텐데.

내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번엔 아버지가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그래, 욘석아. 살아 있었어. 주변에 몬스터들은 싹 다 날아가버리고, 너랑 메린만 있었다더라.”

이건 또 뭔 소리래?

그 놈들이 싹 날아갔다니?

아, 메린이 있었지.

아무래도 녀석이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다시 일어나 싸웠나보다.

그렇다면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조금 무리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정작 장본인인 메린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재미있어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네가 다 없앴어.”

“뭐?”

“네가 다 없애버렸다니까. 몬스터들을. 그것도 한 방에 파팍 하고.”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 입으로 말하긴 쪽팔리긴 한데, 내가 무슨 수로 그런…….”

반박하는 내 말을, 촌장님이 헛기침을 하며 막았다.

그러더니 조금 전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내 얼굴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라, 카엘. 너는 지금부터 수도로 가서 왕을 뵈어야 한다. 네 두 어깨에 이 세계의 운명이 달렸단다.”

전조도 없이 훅 들어온 이야기에 머리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촌장님의 말 단어 하나하나의 뜻은 다 알고 있는데, 그 단어로 조합된 말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촌장님은 더더욱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카엘……, 아니, 용사 카엘. 그대는 지금부터……”

“네? 아니, 잠깐, 뭐라고요?”

내가 뭐?

아니야, 분명 잘못 들은 거야.

그러나 촌장님은 여전히 엄숙한 표정이고,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고 있다.

검술 사범님은 세상이 무너졌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오직 메린만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너 용사라고.”

“……”

“카엘 에스트렐. 너 용사라니까?”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그녀는 연신 소리 내며 웃고 있었다.

나는 떡 벌어진 입을 겨우겨우 닫았다.

순식간에 새하얗게 비어 버린 머릿속을 다시 열심히 돌린 끝에, 딱 한 마디 할 수 있었다.

“뭐?”

아무래도 내 언어 기능이 고장난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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