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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5화 (5/475)

〈 5화 〉 5화 : 검술 훈련……훈련 맞지? (2)

* * *

다시 눈을 뜨니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있었다.

파랗던 하늘은 짙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고, 저 멀리 숲 위에는 벌써 희미하게 별이 빛나는 것 같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다니, 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던 거지?

몸을 뒤척이자,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 깨어났네.”

메린이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머리도 지끈거린다.

이 자식, 날 대체 얼마나 때려댔길래……!

몸을 일으켜보았다.

팔다리에 별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들부들 떨렸지만 어떻게든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툭.

다리 위로 천조각이 떨어지며, 바지에 물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이마에 올려져 있던 것 같은데, 메린 녀석이 올려놓았나?

용케 차가운 물을 구했는지 천조각이 굉장히 차갑다.

그런데도 눈치를 못 챘다니.

감각이 둔해진 건지, 아니면 그만큼 열이 올라 있는 건지…….

그건 그렇고,

“……병 주고 약 주냐?”

“물 끼얹는 것보단 낫잖아?”

“말을 말자…….”

나는 다시 드러누웠다.

초저녁의 산들바람이 불어오면서 머리를 식혀주는 듯했다.

옆에서 무언가 찰박이는 것 같다 싶더니, 갑자기 이마가 시원해지면서 상큼한 박하향이 풍겼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메린의 얼굴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몸이 버둥거렸다.

“가만 있어. 재워버린다?”

“……”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운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명색이 용사란 놈이 겁먹기는. 아, 너 혹시 그거냐? 뭐였더라, 여자 무서워하는…….”

“뭐, 여성공포증?”

“어, 그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다.

이건 필히 정정해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마저 느꼈다.

“웃기지 마, 난 여자가 무서운 게 아냐. 너, 메린 소더, 바로 네가 무서운 거지.

만약 누가 그리폰이랑 너 둘 중 뭐가 더 무섭냐고 물으면, 난 주저없이 널 고를 거야. 이건 네가 여자인 거랑은 하등 상관없단다. 알겠니?”

“와, 심하네. 이유도 한번 말해보지?”

‘죽기 전에’라는 말이 들린 건 분명 환청일 것이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설사 그게 유언이 된다고 할지라도, 해야 할 말은 반드시 해야 돼!

하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심호흡을 한 번 해야 했다.

“……이유. 응, 이유가 뭐냐면, 넌 분명 그리폰 꼬리를 뽑아서 그걸 재갈로 만든 다음 그리폰을 타고 다닐 거거든. 아니면 앞다리를 구워 먹고는 ‘닭이랑 별 차이 없다’고 떠들거나.”

“……너 말야,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진짜 그럴 사람으로 보여?”

“어. 난 네 가능성을 믿어.”

나는 굳게 확신했다. 이 녀석은 진짜 할 거다.

지난번에 고블린 시체를 보고 ‘내장 먹을 수 있을까’ 라고 중얼거린 녀석이다.

내가 옆에서 기겁하자 ‘토끼 내장을 말한 거’라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해댔지만, 누가 속을 줄 알고?

이 녀석은 분명 배가 고프면 리자드맨도 거리낌없이 구워 먹을 거다.

“……야, 내가 너한테 뭐 했냐? 별 거 안 한 거 같은데…….”

“넌 네 자신을 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나름 진심을 담아 충고해주었다.

어렸을 적, 이 녀석과 술래잡기를 했을 때의 그 공포는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이다.

겨우겨우 따돌렸다 싶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서 “찾았다~”며 헤벌쭉 웃던 그 모습은 진짜…….

“어? 추워?”

“……아니,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엥? 어…… 너무 세게 때렸나? 머리는 안 때렸는데…….”

그녀가 정말로 걱정된다는 듯이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노을빛과 같은 주홍색 눈동자에 내 얼굴이 살짝 비추고 있다.

“……”

생각해보면, 그래도 이 녀석에게 참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태어난 이 마을은, 숲에 사냥 나갈 때마다 오크 모가지 하나는 덤으로 딸 정도로 험악하다.

이런 곳에선 힘이 곧 자산이자 생명줄이기 때문에, 이 마을 사람들은 글을 모르는 것보다도 힘이 없거나 병든 것을 더 부끄럽게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나 카엘 에스트렐은 태어날 땅을 잘못 골랐다.

간절기마다 감기에 걸리는 건 기본이고, 또래 애들보다도 체력이 월등히 떨어진다.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병에 걸려서 그렇게 됐다고 들은 것 같았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참고로 엄마는 2년 전에, 숲에서 산딸기를 따러 간 뒤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찾은 건, 엎어진 바구니와 마구 흩어진 산딸기, 핏자국, 그리고 늑대 발자국뿐이었다.

아무튼 그런 내가 이 마을에서 그나마 사람 취급을 받은 건, 아버지가 마을에 얼마 없는 지식인이자 필경사라는 것과, 메린이 항상 주변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메린은 다른 애들이 선을 넘어서 나를 괴롭힐 때마다 주동자를 조져버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벌벌 떨었다.

뭐, 그래도 메린 덕분에 나는 어느 정도 애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애들이 나를 보는 눈에 동정심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본능에 충실하기 마련인 어린아이들에게 자비심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나는 이 마을 사제님보다 신께 더 큰 봉사를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야, 메린.”

팔로 눈을 덮은 채 말을 걸었다.

“너, 주변에 말했냐?”

“뭘?”

“내가 청혼한 거.”

“아니.”

즉답이었다.

“왜?”

“홧김에 한 거잖아? 진심도 아닌데 그걸 뭐하러 퍼뜨리고 다니냐?”

음,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나는 다른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왜 그 말 듣고 돌진했어? 진심 아닌 거 알았다며? 말만 들어도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하게 싫다, 뭐 그건가?”

팔로 눈을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눈썹까지 가려지니까 녀석은 내 표정을 읽지 못할 것이다.

메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고를 성격은 아니니, 분명 내가 묻는 이유를 모르거나……

……아니면,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뜻일 것이다.

옆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의 답을 듣기도 전에, 그딴 질문을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계속 생각해봤어.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그땐 나도 모르게 막 달려갔던 거라서…….”

나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더라. 그래도 이거 하난 분명해. 난 그때 엄청 화가 났어. 너한테 동정받아서 그런가? 막 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고.”

“……뭐……”

“야, 미리 말하는 건데, 네 꼴이 되게 처참해서 그런 건 아니다? 롭한테도 질 정도로 약해빠져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뭐지? 지금 시비 거는 건가?

다른 의미로 이 녀석에게 표정을 가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메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해야 되나……왜 그런 말을 지금 여기서 하냐, 이 자식아~ 라는 기분이었어.

아, 몰라. 머리 아프니까 그만 생각할래. 아무튼 너도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없었던 걸로 쳐.”

“……”

나는 굉장히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청혼을 내 역사에서 지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시작이 없어졌으니, 중간에 있던 일도 죄다 없던 일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튜르보다 못한 놈이라는 사실 같은 것.

단연코 그건 인정할 수 없다.

나는 눈가를 가리던 팔을 메린에게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 고맙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 넌 방금 한 사람의 인생을 살린 거야.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여기렴!”

“……야, 너 나 무섭다는 거 순 거짓말이지?”

“아니, 진심인데.”

내 목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난 지금 온 마음을 담아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하, 그리폰보다 무섭다고 하는 거 치곤 목숨이 여럿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굉장히 어이없다는 말투였다.

나는 메린의 손을 놓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누구나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니까. 네 힘도 그렇지만, 네 정신상태가 상식과 동떨어져 있는 걸 다들 알면서 입 다물고 있잖아. 그러니 나라도 계속 일깨워 줘야지.

왜냐면 나는 용사니까!”

“입 놀리는 꼴 보니 다 쉬었네. 일어나, 새꺄.”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판 더 두들겨 맞았다.

하, 용사 하기 참 힘들다.

메린의 훈련은 장장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그저께는 하루종일 대련하고, 어제와 오늘은 오전엔 기초체력훈련, 오후엔 대련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메린 말로는, 반사신경은 들쭉날쭉하긴 해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체력은 정말 너무 부족하단다.

바위를 매달고 들판 한 바퀴를 돌라고 한 건 그 부족한 체력을 기르기 위한 건가?

진짜 이딴 게 효과가 있나?

들판 한 바퀴를 돌고나서 바닥에 나동그라진 나를 내려다보며, 메린이 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넌 롭한테도 진다’고 했던 때 기억나? 그때가 네 반응이 제일 좋았어.”

“……남이 미친듯이 화를 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어떻게 사람이 그러, 커흑!”

이, 이 자식, 배를 찔렀어!

“아무래도 넌 눈에 뵈는 게 없을 때 가장 강한 거 같아. 숨겨진 힘인가? 아니면 그냥 위험할 때만 반짝 나오는 건가? 지금도 눈에 뵈는 게 없는 거 같으니 잘 구분이 안 가네.”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면서도, 메린은 계속 목검으로 내 배, 옆구리, 등을 콕콕 찔러 댔다.

“아, 윽, 야, 아파! 진짜 아프다고!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까!”

거의 엎드려 비는 듯이 사정한 끝에, 나는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고통의 잔재를 느끼며 자유에 한창 감사하고 있는 중에도, 메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때 이후로, 조금씩이긴 해도 네 움직임이 좋아지는 거 같아. 이제 두 합까진 가잖아?이야, 사흘만에 이 정도까지 올라가다니! 카엘, 지금의 너라면 베릴을 이길 수 있어!”

“……”

다시 말하지만, 베릴은 열 살 먹은 꼬마애다.

메린 입에서 ‘굉장하다’며 칭찬하는 소리가 나오는 건 꽤 드문 일이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 자식 그냥 나 놀리고 있는 거 아냐?

왠지 침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단 네가 더 용사에 어울리는데.”

“갑자기 뭔 소리냐?”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허리에 묶은 밧줄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이러면 고개를 돌리게 되니, 녀석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뭔 소리긴. 네가 들은 대로이지. 넌 지금도 오크든 고블린이든 슥슥 썰어버리잖아. 그런 네가 성검을 들어봐. 드래곤도 한 방이지.”

……왜 하필 내가 용사인 걸까?

보다 적격인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하필 나 같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찰싹!

갑자기 등에 굉장히 강력한 일격이 날아왔다!

격하게 기침하며 돌아보자, 메린이 쪼그려 앉아선 배시시 웃고 있었다.

“푸핫, 너 또 기죽었냐? 너 굉장히 잘하고 있는 거라니까.”

“……”

“그리고 야, 지금도 어떤 녀석이 그리폰보다 더 무섭다고 징징대는데, 내가 용사였어봐.

드래곤이 있던 자리에 내가 들어갈걸?”

“……”

헛소리 말라고, 해야 할 텐데.

그러나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그녀는 진짜 말 그대로 ‘최강종’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을 읽은 적이 있는 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다.

역대 왕들은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존재는 전부 치워버렸다.

단지 그것이 용사나 영웅이 아닌, 어떤 가문이나 어떤 세력일 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내가 없애야 하는 드래곤도 그렇다.

이 세계의 어떤 종족도 그 드래곤과 융화할 수 없었다.

그러니 대립한 끝에 봉인한 게 아닌가.

“어라? 농담인데. 이상한 데서 진지하다니까…….”

메린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새삼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아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가지 않았다.

완전히 바닥을 딛고 일어서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듯했다.

“여, 용사님 아니야? 수련이 꽤 힘드신가보지?”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왜 하필 지금.

나는 속으로 욕과 저주를 한 바가지 쏟으며 고개를 돌렸다.

꼴도 보기 싫은 녀석이 졸개 몇 마리와 함께 오고 있었다.

튜르 벤스.

우리 마을 촌장님의 막내자식이자 유일한 아들이다.

튜르는 촌장님의 아들로 태어난 후, 늘 마을의 중심에 있었다.

촌장님이 대를 이을 아들을 간절히 바란 것도 있지만, 놈의 기질 자체가 뭐라고 할까……늘 관심을 받고 싶어한다고 할까?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였다.

물론 이걸 지 입으로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놈이 저렇게 싸가지없이 구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참고로 놈의 주위에 있는 졸개들은 어릴 때부터 늘 붙어 있던 녀석들이다.

저런 놈이 뭐가 좋아서 붙어 있는 건지.

“하……”

근데 진짜 왜 하필 지금 오는 거람?

치솟아 오르는 짜증에 머리를 북북 긁었다.

놈들이 내 주위에 와서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뭐야, 겨우 이거 끌면서 헥헥대는 거야? 그래 갖고 드래곤 잡을 수 있겠어?”

“드래곤은 산꼭대기에 있다던데. 산 올라가다 죽는 거 아냐?”

“드래곤은 무슨, 도마뱀이나 제대로 잡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저마다 제멋대로 떠들고 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야, 튜르, 형 바쁘니까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서 놀아라. 아니면 네 친구들이랑 집에서 놀던가.”

“형? 하, 네가 미쳤구나? 야, 네가 날 형님으로 모셔야지. 4살 어린 애한테도 팔씨름으로 지는 등신아.”

웃음이 다 나오는 개소리다.

“힘 세면 형님이냐? 그럼 너네 옆집 윌리 아저씨네 황소가 너보다 세니까, 너 앞으로 그 황소를 형님으로 모셔라. 잘됐다, 야, 형이 새로 생겨서.”

“뭐, 임마?”

튜르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싫어? 그럼 메린한테 누나라고 하든가. 야, 잘됐다, 메린! 너 동생 생겼어!”

“이게 미쳤나.”

메린이 사정없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아프다!

얻어맞은 뒤통수를 문지르고 있는데, 튜르가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얘기를 하는데 쟤를 왜 끼우냐? 쟨 사람이 아니잖아.”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나 스스로 놀랄 정도로 내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튜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죽 웃었다.

“왜, 내 말이 틀려? 솔직히 쟤가 사람이냐? 달리는 말을 따라잡아서 올라타고, 맨손으로 곰 심장을 뜯는 게 사람이냐고. 그냥 괴물이지!”

주변 졸개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질색하고 있고, 누구는 적개심을 품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정작 당사자인 메린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

화를 내지도, 울먹이지도, 그렇다고 웃고 있지도 않다.

그녀의 얼굴엔 아무 감정도 서리지 않은, 완전한 무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저 표정을 보는 건 이번이 두번째다.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튜르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놈은 완전히 몬스터를 보는 눈으로 메린을 보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저런 눈빛을 매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같아도 결혼해서 마을 안에 박혀 있느니 그냥 죽고 말지.

나는 일어서서몸에 묶인 밧줄을 풀고, 돌멩이를 주운 후, 신나게 낄낄거리는 튜르에게 집어던졌다.

“이 새끼가 뭐하는 거야!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쥐새끼 하나 못 잡아본 새끼가 입만 살아서! 촌장 집에 태어난 거 말고! 별 볼일 없는 새끼가! 뭐 잘났다고 지껄여, 지껄이긴!!”

돌멩이를 계속 주워서 던졌다.

메린에게 배운 물수제비를 이런 데에 쓸 수도 있구나. 아니, 슬링인가?

아무튼 계속 던졌다.

미친 개를 쫓아내는 데엔 돌멩이 던지는 게 최고니까.

“이게 뒤지고 싶나!”

졸개 한 마리가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녀석이 주먹을 날리기 전에, 먼저 팔꿈치로 얼굴을 갈겨주었다.

다른 녀석들이 내 돌발행동에 놀라서 굳은 틈에, 튜르 녀석에게 달려가 그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큭, 이게 돌았나!”

바닥에 쓰러져 뺨을 문지르는 놈의 목에 목검을 겨누었다.

“결투다, 튜르 벤스! 나 카엘 에스트렐의 명예를 걸고!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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