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10화 : 특별 대전(?戰)…… 아니, 대전(大戰)? (2)
* * *
메린의 도발에 넘어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자리에 다시 앉는 것도 잊고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한하네.
아무리 그녀가 '가랑이 떼라'니 ‘잡졸’이니 하는 폭언을 던졌다고 해도, 지금 그녀에게 달려드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이 마을 주민이다.
메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 알 텐데, 어떻게 저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들 수 있는 거지?
“……”
아, 나도 그랬었구나.
다들 제각각 한 솜씨 자랑하며 살아온 남자들이니, 자존심 박박 긁는 말에 눈이 뒤집어진 것 같다.
게다가 지금 저들은 열 명도 더 넘는다.
아마 메린 혼자서는 자신들을 쉽게 상대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듯했다.
그리고 역시나, 메린은 일제히 날아들어오는 칼날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
딱 한 명, 메린을 향해 달려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검술 사범님이다.
사범님은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서, 메린이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싸울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일대일이 되길 기다리는 건가?
“커으억!”
누군가가 신음을 토하며 땅을 굴렀다.
나는 다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을 대회장 중앙으로 눈을 돌렸다.
“……저게 뭔…….”
처음엔 뭘 하는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열 몇 명의 대전자들이 중앙의 한 지점에 다같이 무기를 내려치다가 튕겨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건 메린이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무기들을 피하고, 때로는 쳐내고 있었다.
그러다 긴 자루를 가진 할버드가 그녀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
몸을 돌려 피하더니, 자루를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할버드가 주위를 둘러싼 다른 대전자들에게 날아갔다.
“으아악!”
바짝 붙어 있던 여러 명이 육중한 도끼날을 맞고 한꺼번에 땅을 굴렀다.
그리고 할버드의 주인이 당황하는 틈을 타, 재빠르게 품을 파고들어 멱살을 잡고, 또 다른 무리들을 향해 던져버렸다.
옹기종기 붙어 있는 탓에 그들은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고, 그대로 또 여러 명이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런 식으로 두세 번 되풀이하자, 그녀를 둘러쌓았던 포위망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남은 건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은 여덟 명 정도였다.
……솔직히 감탄스럽다.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을 중심으로 와글와글 붙어 있는 걸 오히려 그들의 약점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걸 적극 활용해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보는 게 도움이 된다고?
아니, 이거 내가 참고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잖아…….
“……”
남은 여덟 명은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메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쳐다본 뒤, 한 명을 골라 칼을 겨누었다.
아까 여자들이 멋지다고 환호성을 질렀던 그 기사였다.
“거기, 당신. 덤벼 봐!”
굵고 짧은 도발이었고, 기사는 곧바로 그에 넘어갔다.
큰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기사를 보며, 메린은 내가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그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저 기사, 어제 내 꼴 나겠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 기사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기사가 대검을 휘두르자, 메린은 그것을 가볍게 받아치면서 사선으로 휘둘렀다.
기사도 바보는 아니어서 그녀의 공격을 흘려버리고는 팔꿈치로 공격해왔다.
메린은 몸을 틀어서 가볍게 피한 다음 검 손잡이 끝으로 기사의 투구를 때렸다.
“……”
뭔가 이상한데.
싸늘하게 웃은 거 치고는 굉장히 평범하게 싸우고 있어.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그 싸움에 끼어들려고 하면, 매섭게 몰아쳐서 쫓아버리고 다시 기사를 느긋하게 상대하고 있다.
뭐지?
쟤 또 무슨 꿍꿍이야?
평소라면 바로 틈을 노리고 상대를 끝장냈을 텐데, 지금 그녀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고 있다.
공격을 할 때도 굉장히 잘 보이게, 그것도 천천히 하고 있다.
아니, 무슨 시범 대련도 아니고…….
"응?"
무언가 삐릿, 하고 느낌이 왔다.
……시범? 시범이라?
……저 녀석 설마!
그녀가 어제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그리고 자신이 몇 가지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그러고보니 저 녀석, 아까부터 내 눈에선 옆이나 앞모습이 보이도록 움직이고 있다.
처음 포위망을 풀 때 빼고는 뒷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어!
아니, 어이가 없네.
지금 그러고 있을 때야?!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야, 임마, 지금 시범 경기할 때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얼른 끝내!”
“왜! 마침 딱 좋은 상대잖아!”
아잇, 돌겠네, 진짜 시범 중이었어!
그녀의 의도는 이해가 된다.
기사라면 제대로 된 검술을 배웠을 것이니, 시범으로 딱 좋았던 거겠지.
문제는 지금 그런 짓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거다.
일 초라도 빨리 이 말도 안 되는 대전을 끝내버리고, 촌장님과 율리아 공주에게 따지러 가야 하는데!
그리고 저 녀석은 오늘 하루종일 설명해도 분명 이해 못한다.
그냥 막무가내로 나가야지.
“멍청아, 됐으니까 내 말 들어! 빨리 끝내!”
……멀어서 잘 안 보이는데, 분명 저 녀석 지금 혼자 무어라 꿍얼거리고 있다.
바닥을 발로 툭툭 치는 걸 보니 툴툴대고 있는 게 뻔하다.
근데 지금은 안 된다니까!
"메린!"
"알았어, 알았다고!"
메린은 검을 몇 번 허공에 휘두르더니, 바로 땅을 박차고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딱 봐도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동에 기사가 당황하여 주춤거렸고, 그것이 그의 패착이 되었다.
메린이 밑에서 올려치자 기사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그리고,
도저히 눈 뜨고 보기 힘든 상황이 펼쳐졌다.
메린은 공중에 뜬 기사를 그 자리에 계속해서 띄우면서,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차라리 땅을 구른다면 항복을 하거나 진작에 기절해서 끝났을 텐데.
그러나 가엾게도 기사의 발은 공중에 떠 있었고,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얻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흣!”
마침내 그녀가 기사의 얼굴을 걷어차버렸다.
기사의 투구가 박살나면서 초점을 잃은 눈이 드러났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그는 땅바닥을 몇 번 튀기며 날아가, 대전장 가장자리의 가벽에 처박혔다.
콰앙!
큰 소리가 나며 벽에서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기사는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이마를 짚고 깊이 탄식했다.
아아, 또야.
저 멍청이, 또 아무 생각없이 저질렀어!
참고로 거듭 언급하는 거지만, 이 무투회의 최대 부상은 멍과 탈골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목뼈가 빠진 적은 없으니, 저 기사도 아마 살아 있을 것이다.
“……”
무투회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관객이 숨을 삼키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는 고개를 아예 돌리며 덜덜 떨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는 이 마음 약한 일반인들을 대표하여 소리쳤다.
“야, 이 미친년아! 빨리 끝내랬지 누가 곤죽을 내랬어?! 정도를 좀 지켜, 제발!”
메린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본보기인데!”
“본보기는 개뿔, 그냥 패고 싶었던 거잖아! 너 지금 되게 후련하다는 얼굴하고 있는 거 다 알아!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마, 이 멍청아!”
“……”
메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뻔해. 장담하는데 저 자식, 분명 ‘어차피 안 죽는데’ 같은 생각하고 있다.
왜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해를 못하는 거지? 왜? 도대체 왜?!
내 깊은 한탄도 모르고, 메린은 멀뚱히 서 있는 다른 일곱 명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새하얀색, 흙색, 파란색 등등, 저마다 여러 색으로 얼굴을 물들인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또 덤빌 사람? 안 오면 내가 가고.”
그들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메린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래도 그 일곱 명은 기사에 비해선 곱게 당했다.
“……”
메린이 기지개를 켜며, 이때까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검술 사범님을 돌아보았다.
사범님은 무던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사범님은 어쩌실래요?”
무슨 점심 뭐 먹을 거냐고 묻는 듯한 말투다.
검을 쥔 채 오른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그녀는 사범님이 대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사범님은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며 웃다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휙 던져버렸다.
“어쩌긴. 기권이지.”
그리고는 촌장님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러니 촌장님! 우승자 발표하시죠!”
넋이 나간 얼굴로 대전장을 쳐다보던 촌장님이 정신을 차리고, 크게 외쳤다.
“우승자! 메린 소더!”
나팔과 북소리가 대회장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그 안에 박수 소리나 환호성은 없었다.
대전장 여기저기에 널부러진 참가자들이 하나하나 들것에 실려 나갔다.
마지막에 메린의 화풀이 대상이 됐던 그 가엾은 기사는, 갑옷이 완전히 찌그러져서 몸의 형태가 다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얼굴이 드러나 있으니 숨 쉬는 데 문제는 없겠지.
아마도.
탈락자들이 대전장 바깥으로 나간 후, 율리아 공주가 박수를 치며 단상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굉장히 흡족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신을 섬기는 사제가, 이 참상을 보고, 웃고 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메린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니.
그 녀석은 제 손으로 피바다를 만들긴 해도, 그걸 보고 웃지는 않는다.
“기대 이상이에요! 정말이지, 당신이 용사가 아니라면 누구이겠어요?”
율리아 공주는 즐거운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용사님께서 꼭 성검을 뽑는 걸 보고 싶네요!”
갑자기 공주가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들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크게 외쳐 대기 시작했다.
“?!”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능이 마구 소리쳤다.
“다들 여기서 나가요! 촌장님! 사람들을 피신시키세요!”
그러나 아무도 내 말에 대꾸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옆자리 여자애의 어깨를 흔들어보았지만 그녀는 눈이 풀린 채, 멍하니 나를 마주볼 뿐이었다.
“정신차려요! 젠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는 메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메린!”
분명 내 목소리가 들릴 텐데, 아무 반응도 없다.
젠장, 저 안으로 들어가야 되나?!
“카엘! 오지 마!”
메린의 말에 울타리를 넘으려던 몸이 저절로 우뚝 멈췄다.
그녀는 전에 없이 험악한 표정으로 율리아 공주를 쏘아보더니, 무슨 생각인지 바닥의 돌멩이를 주워서 공주에게 던졌다.
파사삭!
돌멩이는 공주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재가 되어버렸다.
율리아 공주가 수수께끼의 말을 멈추더니, 씨익,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희미하게,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너라, 밤이여, 칠흑의 장막이여! 달콤한 죽음의 꿈을, 피의 향기를 흩뿌릴 시간이 왔노라!”
공주가 크게 외치자, 밝은 하늘이 잉크를 쏟은 것처럼 갑자기 검게 물들며 태양마저 삼켜버렸다.
한창 밝게 빛나야 할 태양을 대신한 것은 둥근 달, 그것도 피에 젖은 것처럼 붉은 달이었다.
“이리 오너라, 나의 아이들아! 칠흑의 하늘을 날며 춤을 추자꾸나!”
율리아 공주의 위쪽 허공에 보랏빛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날개와 송곳니 형상이 그려진 마법진에서 깃털이 펄럭이는 소리가 마구 들리기 시작하더니, 곧 커다란 새의 몸을 가진 여성형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하피?!”
말도 안 돼!
신을 섬기는 사제가 몬스터를 소환하다니!
율리아 공주가 펼친 보랏빛 마법진은 총 다섯 마리의 하피를 토해내고 사라졌다.
“자, 용사님! 당신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비참하게 살이 뜯기는 모습을, 처량하게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여줘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피들이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메린에게 달려들었다.
두 마리는 발톱을 마구 휘둘러댔고, 다른 두 마리는 입을 벌리고 그녀를 물어뜯으려 했다.
나머지 한 마리는 간간이 메린의 행로를 방해하며 한곳으로 몰고 있었다.
메린은 한꺼번에 몰아치는 그 공격들을 어찌어찌 피했지만, 결국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발톱이 그녀의 팔을 스쳤다.
“윽!”
메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팔에서 붉은 핏방울이 튀며 흙바닥을 적셨다.
“피가……!”
상처가 나다니, 어떻게 된 거지?
아직 여긴 무투회장인데?!
초조해졌다.
무투회의 그 무적 같은 보호가 없으면, 메린 혼자서는 위험하다.
땅을 걷는 놈들이라면 거뜬히 상대하겠지만, 상대는 자유로이 활공하는 데다 보통 성인의 두 배는 더 덩치가 크다.
아무리 메린이라도 혼자서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마을의 자경단이 와서 그녀를 도울 수도 있겠지만, 언제 올지, 애초에 올 수는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결국 여기서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건,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다.
그럼 뭘 망설여?
“으으으!”
나는 관중석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왕성 기사가 처박혔던 가벽 쪽으로 뛰었다.
다행히 하피 녀석들은 메린을 상대하느라 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사가 엎어졌던 그 주변에는, 가벽이 부숴지며 생긴 파편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쓸 만한 조각들을 주워 허리춤 가방에 넣고, 적당한 거리에서 하피들을 마주보았다.
메린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녀석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가방에서 슬링 끈을 꺼내어 파편을 장전하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하피 한 마리가 메린의 어깨를 노리고 발톱을 들이밀었다.
그래, 첫 타는 너다!
“메린! 해치워!”
돌 조각이 세차게 날아가 하피의 다리에 박혔다.
놈이 쇳소리 같은 비명소리를 마구 내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린은 그 틈을 노리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에게 달려들어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다.
“캬아아아아아!”
메린을 견제하던 다섯번째 하피가 곧바로 나를 노리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길, 몬스터 주제에 눈치도 좋네!”
날아오는 발톱을 피하며 땅을 굴렀다.
슬링을 먹여주고 싶어도 장전할 틈이 없다.
하필 또 이 주변엔 칼도 안 떨어져 있다.
정말 되는 게 없네!
결국 나는 벽 쪽에 몰려 버렸다.
하피가 입맛을 다시더니 맹렬하게 날아왔다.
“숙여!”
그 말을 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러자 또 그 귀 아파오는 비명소리가 짧게 나더니, 뒤통수에 축축한 액체가 잔뜩 떨어졌다.
비릿한 피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니, 좀 다른 느낌도 나는데?
뭔가 덩어리가 철푸덕 하고 닿았……
바로 뱃속이 뒤집어졌다.
“우웨에엑.”
젠장……
하피 피에 내장 맞았어…….
속을 비우느라 엎드린 내 앞에, 메린이 흙먼지를 피우며 멈춰 섰다.
그 덕분에 폐 한껏 흙먼지를 들이켜버려서 기침이 마구 나왔다.
“망할, 늦었나? 완전 피투성이네! 야, 카엘! 정신 차려!”
“콜록콜록콜록! 야, 흔들, 흔들지 마! 안 다쳤으니까 흔들지 말라고! 우욱…….”
……덕분에 뱃속을 텅텅 비울 수 있었다.
당연히 전혀 고맙지 않다.
나 참,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고개를 들었다.
내 옆에 하피가 등에 검이 박혀 벽에 꽂혀 있다.
와아, 무게 때문인가 목 바로 아래까지 갈라져 있……
안 돼, 안 돼, 보지 마, 멍청아!
더 비울 것도 없다고!
바로 눈을 돌렸다.
메린이 벽에 박힌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내게 등을 보이며 앞에 섰다.
“저 녀석들, 엄청 동요하고 있어. 이게 대장이었나봐.”
그녀의 말대로, 남은 하피 세 마리가 우왕좌왕하고 있다.
메린이 나를 슬쩍 보며 웃었다.
“이야, 용사님, 전공 하나 세웠는데? 기왕 세운 김에 계속하는 건 어때? 슬링 아직 할 수 있냐?”
“그냥 물어보는 건데, 못한다고 하면 어쩔 건데?”
“미끼로 쓸 건데?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
이 자식, 표정이 진심이야!
나는 잠자코 일어나, 슬링 끈을 장전했다.
메린이 뭐가 웃긴지 킥킥 웃더니, 먼저 하피들 쪽으로 천천히 달려갔다.
나는 끈을 빙빙 돌리면서 메린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다.
메린이 오른쪽에 있는 하피 한 마리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자연히 그녀의 왼쪽 측면이 노출되었다.
왼편에 있던 하피가 그 틈을 노리고 바로 달려들었다.
“왼쪽!”
내가 던진 돌에 날개를 맞고, 하피가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메린이 놈의 목을 찌르고 머리를 밟아 으깨버리는 동안, 나는 재빨리 다시 슬링을 장전했다.
그렇게 내 적절한 견제와 메린의 무력이 맞물려, 무사히 하피 사냥을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하피의 목을 동강 잘라버린 후, 메린은 다시 험악한 얼굴로 율리아 공주를 올려다보았다.
“후후…… 후후후후……!”
공주는 웃고 있었다.
‘아이들’이라던 하피들이 몽땅 죽었는데도,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다.
사제가 아니야.
지금 저기 있는 여자는, 절대 사제일 수가 없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은 나는 외쳤다.
“너, 정체가 뭐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율리아 공주, 아니, 가짜 공주가 눈을 부릅뜨며 미소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