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11화 : 짐승 사냥의 밤 (1)
* * *
공주의 모습을 한 여자는, 내 일갈에도 한 마디 대꾸하지 않았다.
“……”
여자가 내려다보고 있는 곳,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여기 대전장과 그 주변은 원래 광장이다.
평소엔 마을 아이들이 서로 칼싸움 하면서 놀거나, 작은 시장이 열리는 곳이란 말이다.
그 평화롭던 곳이 지금은 어떤가?
하피의 시체와 피로 대전장은 완전히 붉게 물들었고, 관객석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맥없이 쓰러져 있다.
내 뒤통수도 하피의 피 때문에 더러워진 건 덤이다.
그리고 이 끔찍한 사태를 저지른 원흉은 단상에 서서 실실 웃고 있다.
정체를 밝히라는 말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이 마을 사람으로서 절대 그냥 넘어갈 순 없지.
마침 허리춤에 돌 조각도 하나 남아 있겠다,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정체를 밝히라고, 사악한 아줌마!”
여자의 팔을 노리고 슬링을 날렸다.
팔에 맞으면 아프긴 엄청나게 아프겠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으니까 딱 좋다.
기세 좋게 날린 돌 조각이 쌔액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여자의 팔뚝에 툭 맞고 떨어졌다.
……툭? 툭이라고?
아니, 슬링인데?
내 힘으로도 늑대나 곰 대가리에 맞추면 뇌진탕 일으키는 위력인데, 그게 그냥 툭 소리 나고 만다고?
돌벽에 공 던지는 것도 저거보단 더 소리 세겠다!
아니아니, 그보다 저 여자 팔뚝엔 아무것도 안 싸여 있는데 왜?!
“?!”
더 놀라운 건, 돌 조각을 맞은 팔뚝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도 고통을 느낀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보호 마법? 아니야.
마법이 걸려 있다면, 아까 메린의 돌멩이가 재가 됐을 때처럼 무언가 빛이 나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정말 믿기 힘들지만, 차라리 메린이 사실 인간이 아니라 거인족을 축소시킨 거라는 말이 더 신빙성 있지만, 저 여자는 돌을 맞고도 단순히 상처가 안 난 것이다.
그냥 돌팔매질을 한 것도 아니고 슬링인데, 저 여자에겐 아무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인간, 아니생물이 아니네.”
메린이 나 대신 중얼거렸다.
그러자 여자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지더니,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 몸을 낮추었다.
숨 쉬는 것도 약간 힘겨울 정도로 거센 바람이다.
반면에 메린은 팔을 들고 눈앞을 가릴 뿐, 꼿꼿이 서서 여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정체를 밝히라고요? 아아, 그 말이 나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용사님이 아니라 졸개가 지껄인 게 좀 흠이지만, 그런 것쯤 눈감아 드려야죠. 왜냐하면……!”
바람이 뚝 그쳤다.
나는 짧게 기침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손으로 용사의 심장을 쥐어짤 수 있으니!”
더 이상, 그곳에 여자는 없었다.
단상 위 하늘에, 거대한 날개 한 쌍을 펼친 반인반수가 둥실 떠 있었다.
몸의 형태는 인간 여자, 손과 발은 사자, 그리고 길고 긴 뱀의 꼬리를 지니고 있었다.
가슴과 사타구니에는 무언가 사슬 같은 장식이 달려 있다.
그거 말고는 몸을 가리는 게 없는,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인간형 몸에 날개가 달렸으니 얼핏 보면 거대한 하피다.
그러나 하피와 달리 팔과 손이 있는데다 날개가 등에 따로 돋아나 있고, 또 머리에 엄청나게 큰 염소뿔이 달려 있었다.
“윽……!”
마주하는 순간 온 몸이 경직되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물리쳐……?
이건 절대, 사람이 당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마구 울리며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그때, 메린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긴장으로 잔뜩 굳은 고개를 겨우 돌리자,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속삭였다.
“야, 저 날개, 매냐, 아니면 솔개냐?”
“……”
이 녀석은 지금 이 상황에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궁금하면 네가 직접 물어보던가!”
“안 알려줄 거 아냐.”
“……”
알려줄 거 같으면 직접 물어봤을 거란 소리인가?
바보인가? 아니면 그냥 정신이 나간 건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가?
……아니, 아니야. 너무 그러지 말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메린은 내가 너무 겁에 질린 것 같아서,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다.
지나친 긴장은 몸의 근육을 경직시켜서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니까.
그래, 그런 거야. 이 녀석 나름대로 배려하는 거라고.
진짜로 저 괴물의 날개 출처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어머, 날 앞에 두고도 딴짓이라니, 꽤 여유롭구나?”
괴물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메린이 나를 덥썩 안으며 옆 바퀴 굴렀다.
갑자기 눈이 핑 도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목에 들어간 흙먼지를 뱉으며 고개를 들자, 메린이 검을 들고 괴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커다란 발톱과 꼬리 공격을 피하고서, 정확히 괴물의 오른다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턱.
“……?!”
칼날이 분명 닿았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단순한 타격조차 되지 않았다!
메린 역시 놀란 눈으로 칼날을 바라보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거리를 벌렸다.
괴물의 앙칼진 웃음소리가 귀를 찔렀다.
“아하하하! 그깟 쇳덩어리는 통하지 않아! 이 아스모스 여왕님에겐 듣지 않는답니다, 가엾은 용사님!”
괴물이 날개를 거세게 펄럭이자, 무언가 가시 같은 것들이 메린을 향해 쌔액 날아갔다.
손쉽게 피한 후, 메린은 땅에 박힌 가시 중 하나를 뽑아 괴물을 향해 던졌다.
역시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텐데.
생물이 아니어도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걸 멈출 방법은 반드시 있을 텐데!
생각해내, 뭔가 있을 거야!
평소에 책 많이 읽어 놓고 이때 아무 쓸모도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생물이 아니라면……"
생물이 아니라면, 분명 마법 관련일 거다.
저게 정령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쪽 계열이라면 이름이 중요하다.
이름을 알면 무언가 파훼법이 떠오를지도 몰라.
으으, 근데 저 괴물, 지 입으로 이름을 말했단 말이지.
이름 따위는 아무 약점도 안 되는 게 분명해.
근데 저 괴물 이름이 뭐였더라?
"아스모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서 들었지? 아니, 어디서봤지?
몬스터 도감 필사할 때 봤나?
아니야, 도감에 저렇게 파격적인 차림을 한 몬스터가 실려 있었다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어.
분명 삽화만 찢어져 없어져 있는 끔찍한 꼴을 봤을 테니까.
나는 열심히 기억을 헤집었다.
마음속에서 이름이 무슨 소용이냐고 일갈하는 한편, 또 다른 목소리가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며 호소하고 있었다.
내가 최근에 필사한 건 몬스터 도감이랑 성서, 예언서밖에 없다.
예언서에 저딴 게 실려 있을 리 없으니 남은 건 성서밖에 없는데……
으으으, 기억이 안 나!!
‘아니,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마음속에서 일갈하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간단한 문제잖아. 저 괴물이 가진 것들을 봐. 뱀과 염소, 밤과 붉은 달.’
또 다른 내가 속삭였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악마.”
입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래, 정말로 간단한 문제였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는 것 때문에 문제의 요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저 괴물의 이름보다,무엇인지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머리에 커다란 염소뿔을 달고 다니는 건 십중팔구 악마다.
그리고 저 괴물이 정말 악마라면……
이건, 정말 골치 아픈 문제다.
이 세상에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는 창조주를 섬기며 그분께 권능을 받은 사제.
그리고 또 하나는 순은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엔 둘 다 없다.
아니, 우리 마을 사제님은 권능 같은 거 없으니까 있으나 마나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여기엔 저 악마를 쓰러뜨릴 방법이 없다.
“큭!”
악마의 팔을 피하려던 메린이, 그만 꼬리에 칭칭 감겨버렸다!
“으으윽!”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그녀는 이를 악물며 죄이지 않게 버티었다.
“후후, 쓸데없이 발버둥치기나 하고.”
악마가 비릿하게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군침을 흘리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용사님도 한 번 하늘을 날아보…… 날아보는 게…… 아니, 뭐 이리 힘이 세?!”
…………
어어, 설마 지금 저 아스모스라는 악마, 메린을 땅에서 못 떼고 있는 거야?
엉? 그게 말이 돼?
메린 쟤 몸무게 평균일 텐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믿기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버티고 있다 해도 위험에 처한 건 마찬가지이다.
쟤도 생물인 이상, 체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 몬스터가 쳐들어왔던 그때처럼!
“이이익!”
악마가 용을 쓰며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또 사방에서 칼바람이 휘몰아쳐, 대회장을 덮던 천막들이 죄다 날아가버렸다.
저절로 몸이 숙여졌다.
바람이 너무 세서 자칫 잘못하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쿵!
“……!”
눈앞에, 사람이 떨어졌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다.
다행히 머리가 아니라 어깨부터 땅에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멀쩡할 거 같진 않다.
젊은 아가씨는 비명도, 신음도 하나 내지 않고 그저 멍한 눈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이 닿기 전에 어딘가로 굴러가버렸다.
“설마.”
등골이 얼어붙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바람에 휘말려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그러니까 관객석에 있던 사람들이다.
“안 돼……!”
지금은 무투회의 보호 장치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저렇게 무방비로 굴러다니다가는 다 죽을 거야!
나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악마에게 다가갔다.
메린이 떨어뜨린 칼을 주워 들고, 그녀를 으스러뜨리려 애쓰는 뱀 꼬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미끌거리는 뱀 꼬리는 칼을 퉁겨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안다.
메린의 검도 안 통했는데, 내가 이걸 휘두른다고 통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바람을 멈춰야 한다.
저 악마의 날갯짓을 잠깐이라도 막아야 돼!
“제, 길!”
타격이 안 가서 그런가, 이 짐승새끼가 나한텐 눈길도 안 주고 있어!
게다가 왠지, 꼬리가 점점 안으로 말리는 것처럼 보였다.
메린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여기저기서 우당탕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구르고 있는 거다.
“빌어먹을! 멈춰, 짐승새끼야!”
‘화 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무리 나 자신이라고 해도, 당연한 소리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럼 뭘 하고 싶어?’
뭘 하고 싶냐고?
진짜 또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어금니를 깨물었다.
실감은 안 나지만 나는 용사다.
용사라면 당연히,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과 메린을 구하고, 저 사악한 악마를 물리치는 거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얼마든지 그럴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니야!”
그러나 그건 동화 속 용사나 할 법한 소리다.
평범한 필경사 카엘 에스트렐이 할 소리가 아니야!
‘뭘 하고 싶어?’
재차 속삭이는 목소리를 향해, 목청껏 외쳤다.
“이 짐승새끼를 쳐죽이는 거다!!”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치는 순간, 엄청난 빛에 휩싸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