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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2화 (12/475)

〈 12화 〉 12화 : 짐승 사냥의 밤 (2)

* * *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내가 휘두른 곳을 댕겅 자르며, 메린이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바닥을 구른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다. 별다른 상처는 없는 것 같아.

“아아아아아아!”

악마가 격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꼬리가 잘린 곳을 기점으로, 빛이 위로 퍼지며 꼬리를 태우고 있었다.

악마가 자신의 꼬리 끝을 잘라내어 던져버리자, 땅에 닿기도 전에 하얀 재가 되며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내가 잘라낸 아래부분, 그러니까 메린을 감싸고 조이던 부분도 아예 사라져 있다.

메린이 가쁜 숨을 쉬면서,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 역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카엘, 너 그거……!”

메린이 손가락으로 내 손에 들린 검을 가리켰다.

눈이 부시게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그라들면서 모습을 나타낸 건, 어딘지 본 적이 있는 검이었다.

널찍하면서 적당히 긴 검신 가장자리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다.

그 아래 자루 부분은 어딘지 별이 반짝이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가드의 중앙에는 둥글게 잘 깎인 구슬인지 돌인지가 박혀 있었다.

아무튼 조금 전에 내가 들고 있던 검은 아니었다.

갑자기 검이 바뀌다니, 황당하네.

근데 또 어쩐지 손에 되게 잘 맞는 것 같다.

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쓰기라도 한 것처럼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검의 무게도 가벼웠다.

제법 큰 검인데도 한손으로도 충분히 휙휙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악마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통을 터뜨렸다.

“크으으……! 내, 내 꼬리가! 설마, 그게 성검이냐? 어째서 너 같은 같잖은 조무래기 따위가?!”

조무래기?

내 입으로 말할 땐 그냥 침울했는데, 남이 말하는 걸 들으니까 되게 열받네……!

“이 노출광 짐승새끼가 뭐 어째?! 오냐, 넌 진짜 내 손으로 죽여주마!”

막 달려들려고 하는데, 메린이 내 머리를 퍽 내려쳤다.

“……”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악마마저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때려?!”

“무턱대고 덤비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겁날수록 더 대담하게, 열이 오를수록 더 냉정하게 움직이랬지!”

……그런 얘길 했던가?

아마 이 녀석 목검을 막느라, 또는 맞느라 정신이 없어서 못 들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무심코 ‘못 들었다’는 소리가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기 전에 도로 꾹꾹 쑤셔 넣었다.

다행히 메린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휴, 죽을 뻔했네.

“아무튼, 지금 저 괴물을 죽일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내가 기회를 만들어줄 테니까 넌 저 놈을 죽여. 알았냐?”

“뭐? 내가? 그게 말이 되냐?! 네가 이 검 들고 하면 되잖아!”

딱히 공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니, 검 따위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다.

그러나 메린은 악마 쪽을 주시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야, 웃기지 마. 내가 그걸 어떻게 쓰냐?”

“어떻게 쓰긴 그냥 검이니까 잡고 휘두르면 되지. 됐으니까 가져가!”

내가 검 손잡이를 내미는데, 갑자기 메린이 잡으라는 검은 안 잡고 내 팔을 잡고 뛰었다.

치이익­

조금 전까지 우리가 서 있던 자리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녹고 있었다.

“아까워라. 한 번에 없애버릴 수 있었는데.”

악마가 입맛을 다시며 낄낄 웃었다.

그리고 또 두 팔을 벌리더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쿠르릉, 누군가 하늘에서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메린이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더니 내 어깨를 붙잡았다.

“카엘, 잘 들어! 지금 너랑 잡소리 나눌 시간 없어! 네가 해야 돼. 네가 그 검으로 저걸 잡아야 한다고!”

“아니, 내가 어떻게……!”

“닥쳐, 새꺄, 나한테 따지지 마! 나도 지금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메린의 목소리는 드물게 열을 띠고 있었다.

아플 정도로 내 어깨를 꽉 잡으며,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내게 외쳤다.

“근데 너밖에 못한다는 느낌이 든단 말야! 그러니까 네가 해야 돼, 카엘!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가 처치해! 알았어?!”

도와준다고?

약간, 아주아주 약간 의심스럽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도리가 없다면…….

……각오를 다져야 한다.

검 손잡이를 굳게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린이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놓았다.

“좋아, 가자!”

메린의 신호에 맞추어 악마를 향해 내달렸다.

“키히히히! 그래, 죽으러 오너라! 비명을 지르며 새까맣게 타버려!!”

악마, 아스모스가 포효했다.

그러자 하늘도 그에 응답하듯이 다시 한번 우르릉 울리기 시작했다.

“오른쪽!”

무언가 보인 건지, 메린이 외치며 오른쪽으로 크게 뛰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갔고, 내 발이 땅에 다시 닿자마자 공기를 찢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눈이 번쩍였다.

콰과과광!

“벼락?!”

“놀라고 있을 시간 없어! 왼쪽!”

왼쪽, 그 다음은 또 왼쪽, 오른쪽, 왼쪽.

메린에게 뒤쳐지지 않게 뛰느라, 그리고 가까이에서 벼락이 쳐대는 이상현상 때문에 귀가 울려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쪽!”

메린이 내 팔을 잡고 끌어당기자, 아스모스의 커다란 발이 우리가 방금 있던 자리에 내려쳤다.

메린은 마침 근처에 떨어져 있던 검을 주워 들더니, 아스모스가 발을 떼기도 전에 그쪽으로 강하게 내려꽂았다.

칼날이 땅속으로 푹 들어가며, 검 자루의 가드가 아스모스의 발가락 사이에 턱 걸렸다.

“으으윽! 잔꾀를!”

아스모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발을 빼려고 애썼다.

그 틈에, 메린이 내 팔을 잡더니 속삭였다.

“준비됐지?”

“헉, 헉…… 무, 뭐가?”

녀석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불안하다. 뭔가 불안해.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갑자기 메린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뭔가 엄청나게 불안해!

“너, 뭐하려고……”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내가 제대로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메린이 내 팔을 잡더니 빙빙 돌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나 세게, 그리고 빠르게 도는지 몸이 둥실 떠오르면서 녀석이 뻗은 팔과 거의 일직선이 되었다.

아, 이 자식, 설마?!

“찌르든 베든 죽여버려!”

“꺄아아아아아!!”

날렸다!

저 새끼가 드디어 사람을 날렸어!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또 여자애 같은 비명이 터져나오고 있었지만 지금 그게 대수야?!

내가 지금 날고 있는데!

떨어지면 사망 확정인 높이를 붕 떠서 날아가고 있다고!

오우으아, 장난 아니야, 아래가 장난 아니야!

솔직히 검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해줘야 된다.

게다가 엄청난 바람소리가 귀를 때려와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눈에, 아스모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염소처럼 가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보였다.

“……으으으!”

망할 짐승새끼……!

아찔하던 의식이 단번에 또렷해졌다.

나는 검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내 실력으로 이 상태에서 베는 건 무리다.

그러니 이대로 머리를 꿰뚫어주지!

아스모스가 황급히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슬링조차 간단히 막던 살을 무참히 뚫고서, 나는 계속 날아갔다.

“끝이다!”

“어림도…… 없는 소리……!”

아스모스가 또 다시 포효하며 몸을 크게 틀었다.

그 탓에 나는 녀석의 머리가 아닌, 오른쪽 어깨에 푹 박혀버렸다.

앙칼진 비명이 귓가를 마구 울려 댔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떨어져어어어어!!”

온 마음을 다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자 검신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아스모스의 어깨를 뚫고, 등의 날개를 태워버렸다.

놈의 오른팔이 떨어지며 새하얗게 재로 변하는 게 보였다.

“캬아아아아악!”

아스모스가 몸부림치며 남은 한쪽 날개를 마구 퍼덕였고, 그 날갯짓의 바람에 뒤로 날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카엘!”

땅에 부딪히기 직전, 메린이 가까스로 나를 받고 바닥을 굴렀다.

“우와아……”

내가 뭘 한 거지? 현실이 아닌 거 같아.

으, 어지러워…….

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다시 일어섰다.

아스모스가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해내며 으르렁거렸다.

“죽여, 죽여버릴 거야. 버러지 같은 인간놈들 주제에……!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악마의 눈이 시뻘겋게 빛나기 시작했다.

온갖 저주와 욕설을 쏟아내며, 놈의 몸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주위의 공기가 음울한 빛을 띄며 무거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밤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야?!”

그러나 내 궁금증은 해소되지 못했다.

아스모스의 얼굴이 추하게 뒤틀리며 연기를 마구 뿜어낼 무렵, 청량한 목소리가 묵직한 공기를 꿰뚫으며 울려퍼졌다.

“주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모든 가증한 짐승의 어미, 아스모스!멈추어라!”

“!!”

아스모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시커멓게 부풀던 것이 다시 가라앉았다.

도로 그 파렴치한 차림의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 하늘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한 팔과 날개를 잃은 거대한 짐승이 땅에 떨어지며 대회장의 단상을 완전히 짓눌러버렸다.

다행히 빈 곳이다.

아마도.

“하늘이…….”

메린이 중얼거렸다.

검게 물들었던 하늘이 다시 빛을 되찾으면서, 태양이 붉은 달을 밀어내고 다시 나타났다.

아스모스는 따가운 햇살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검은 피를 토했다.

“이…… 치욕은…… 반드시 갚겠다, 용사! 반드시, 반드시……!”

아스모스가 무언가 중얼거리자, 보랏빛의 마법진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가 보내준다더냐? 더러운 짐승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 청량한 목소리가 또 울리더니, 아스모스가 만들던 마법진이 없어져버렸다.

당황한 아스모스가 입을 벌린 순간, 바닥에서 푸른빛의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빛의 사슬이 땅에서 솟아났다.

사슬은 아스모스의 머리와 몸을 꽁꽁 묶어버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마법진 안으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져버렸다.

“……”

“……”

나와 메린은 멀거니 서서 눈만 깜박거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내 이해력이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무사하신가요?”

맑은 목소리와 함께,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가벽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아.”

나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얼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틀 전에 처음 보고, 아까 전에도 실컷 본 얼굴이니까.

사제답지 않게 잔학한 미소를 띄웠던 그 얼굴의 진짜 주인, 율리아 공주가 엷은 금발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며 생긋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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