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3화 (13/475)

〈 13화 〉 13화 : 공주님의 뜬금없는 제안

* * *

무투회장, 아니 광장은 뒤처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사람들은 들것에, 부숴진 물건들은 수레에 실려서 하나, 둘 빠져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네요. 다친 분들은 걱정 마세요, 저와 함께 온 사제들이 치료해드릴 거에요. 그런데, 이 마을 책임자는 어디 있나요?”

공주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뒤편, 광장 근처 빈 공간에 세워진 간이천막, 임시 치료소를 가리켰다.

이번 사건으로 다친 사람들을 그곳에 한데 모아서 돌보고 있었다.

“저기 실려 갔는데요.”

그리고 부상자 중에는 당연히, 그 현장에 있던 촌장님도 포함되어 있다.

공주의 눈썹이 곤란하다는 듯이 내려갔다.

“어머, 그럼 장로나 원로님은요?”

“저기.”

“……”

대개 단상 근처엔 귀빈들이 앉기 마련이다.

즉, 촌장님보다 나이 어린 마을 장로들 몇 명도 죄다 들것에 실려 나가버렸다.

율리아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달리 이야기를 나눌 분이 아무도 안 계신가요?”

“음, 저라도 괜찮다면 이야기를 듣겠습니다만.”

아버지?!

아버지가 아무데도 다치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다가와서, 공주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희 둘 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보며 안심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나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왜 멀쩡해요?”

“뭐, 임마?”

앗, 이게 아닌데.

아버지의 시선이 싸늘해지기 전에 재빨리 말을 보탰다.

“아니, 아버지도 저 안에 있던 거 아니에요? 어떻게 피하셨어요?”

아버지는 필경사, 즉 글씨 쓰는 사람이다.

이 마을에 필경사 일을 하는 건 우리 부자(?子)밖에 없는데, 공고를 쓰거나 행사 기록처럼 중요한 일은 아버지의 담당이다.

이번 특별 무투회도 마을 중요 행사이니, 당연히 아버지도 현장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물론 아버지가 무사한 건 기쁘다.정말이다.

근데 혼자만 안 다치다니 이상하잖아?

아버지는 내 의문에 고개를 저었다.

“난 집에 있었는데? 촌장님이 이 대회는 적지 말라고 하셨거든.”

“엥? 왜요?”

이번 특별 무투회는 어쨌든율리아 공주가 요청하여 열린 대회일 텐데?

아니, 왕족의 명령으로 열린 건데 기록을 안 한다고?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용사를 위한 특별 무투회인데, 용사가 바로 탈락했다는 사실을 남기기 싫으셨던 거 아냐? 넌 탈락할 게 뻔하잖냐. 실제로 탈락했고. 정 궁금하면 나중에 네가 직접 여쭤봐라.”

“……”

젠장, 설득력이 하늘을 찌르네.

그보다 내가 떨어질 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활약이 어쩌고 하면서 응원하신 거야?

뭐야, 그거. 동정심인가?

‘죽도 못 쑤겠지만 한 번 해보거라, 껄껄껄.’ 뭐 이런 건가?!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뼈아픈 사실을 곱씹는 동안, 아버지는 율리아 공주를 모시고 촌장님 댁으로 향했다.

옆에 있던 메린이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야, 우리도 오라셔. 가자.”

하지만 바로 뒤따라 갈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아직 내 유리처럼 섬세한 마음이 회복을 다 못했거든.”

“유리? 네가? 푸핫, 유리는 비싸기라도 하지. 야, 넌 그냥 파이 껍질이야. 시끄럽고, 빨리 와.”

“……”

메린은 내 여린 마음에 비수를 마구 꽂고 먼저 가버렸다.

파이껍질이라고?

손가락으로퉁기기만 해도 바사삭 부숴지는?

유리보다 더 약한?

망할, 저 자식이 제일 나빠……!

“……젠장, 받아칠 말이 없잖아……!”

그것도 참 기가 막히게 걸맞은 비유다. 메린 주제에!

하, 진짜, 파이 껍질?

하하, 하하하하하……

"하아아아아……"

……여기서 나 혼자 궁상 떨고 있어봤자지.

나는 한 번 더 한숨을 쉬고 메린을 따라 촌장님 댁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촌장님 댁 문을 두드리자, 촌장님의 다섯째 딸인 슐 누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누나는 아버지의 뒤에 선 율리아 공주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우와! 드, 들어오세요!”

누나는 아버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거실 테이블로 안내했다.

“저, 근데 지금 어머니도 안 계시는데…….”

촌장님의 아내인 벤스 부인도 마을 아낙네들을 데리고, 사고 뒤처리에 열심일 것이다.

슐 누나가 집에 남아 있는 건, 이 누나가 허약해서 별 도움이 안 되니 집이나 보고 있으라고 한 것이겠지.

“아니, 괜찮다. 이야기를 나누러 온 거니까. 차를 내줄 수 있겠니?”

“아, 네.”

누나가 종종걸음으로 거실을 나섰다.

나는 내 옆에 멀뚱히 앉아 있는 메린을 팔꿈치로 툭 쳤다.

“?”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슐 누나가 사라진 거실 바깥으로 눈짓했다.

“???”

“……”

역시 눈짓으로는 안 되는구나.

나는 녀석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말했다.

“야, 너도 가서 누나 도와.”

“내가? 왜?”

“난 온 몸이 아프고, 넌 더럽게 쌩쌩하고, 아버지는 어른이고, 공주님은 손님이고, 저 누나 혼자선 쟁반 떨어뜨릴 수도 있으니까.”

지난번에 슐 누나가 손님 대접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세 명분 찻잔이 담긴 쟁반이 누나의 손 위에서 엄청나게 떨렸었다.

근데 지금 우리는 네 명이다.

찻잔의 목숨이 위험해!

메린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슐 누나를 도우러 거실을 나섰다.

저 녀석을 움직이게 하려면 감성보다는 논리로 이해를 시켜야 한다.

덕분에 쟤 상대하다가 내 말솜씨가 엄청 늘었지.

잠시 후, 엄청나게 큰 달그락 소리와, 허둥거리는 목소리와, “안 쏟았어, 안 쏟았어. 그냥 내가 들게.” 라는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곧 메린이 찻잔 넷과 찻주전자, 설탕, 크림 등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슐 누나는 그 뒤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따라 들어왔다.

……역시.

찻잔들아, 내가 너희들의 생명의 은인이니 고맙게 여기거라.

슐 누나는 얼굴을 붉힌 채, 각 사람 앞에 찻잔을 돌리고 정중히 인사했다.

“펴, 편히 말씀 나누세요.”

“고맙구나. 아, 슐, 네 어머니께 여기서 손님을 모신다고 대신 말씀 좀 전해다오.”

누나가 알겠다고 답한 뒤, 거실 문을 닫으며 나갔다.

율리아 공주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나와 메린을 번갈아보며 미소지었다.

그 악마가 지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따스한 미소였다.

“먼저 제 소개를 드릴게요. 여러분은 절 아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여러분을 처음 뵙거든요. 저는 율리아 디왈리. 창조주의 대언자(??者)이자 최고사제랍니다. 아, 덤으로 공주 일도 하고 있어요. 손님이 왔는데 오라버니들이 죄다 숙취에 시달리거나 어디 놀러 나갔을 때, 그리고 새해맞이 축제나 수확제 때만 맡는 것이지만요.”

왕가의 계보가 아직 갱신되지 않았다면, 율리아 공주의 위로는 왕자가 셋, 공주가 둘이나 더 있다.

두 공주는 모두 결혼해서 출가한 지 오래니, 왕자들의 업무를 대신 맡을 수 있는 건 율리아 공주 하나뿐이긴 하다.

이론상으로는.

……상식적으로 왕자 세 명이 죄다 자리를 비울 리가 없지.

즉, 공주는 굉장히 드물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대언자?”

옆에서 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대언자란 ‘대신 말해주는 사람’을 말한답니다. 신께서 계시를 내려주시면 그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게 제 일이에요. 평소엔 신도들 이야기를 들어주고요.”

“최고사제도 겸하신다고 하셨는데…….”

“네, 맞아요. 덕분에 매일매일 바쁘게 지내고 있답니다. 대언자만 하고 있으면 빈둥거릴 것 같아서 떠넘긴 것 같아요.”

정말 너무하죠, 공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건네며 호호 웃었다.

……농담일 거다. 아마도.

공주가 메린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아가씨가 용사님이시죠?”

사레 들리지 않고 조용히 넘긴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이 공주님, 분명히 내가 그 특이한 검을 들고 있는 거 봤을 텐데!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용사님이 저 검 들고 있던 거 봤…… 어머?”

공주가 문가를 가리키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도 그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깜짝 놀랐다.

분명 문가에 그 검을 세워두었는데, 그 자리에 있는 건 평범한 철검 한 자루였다.

메린도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지난번에는 아예 없어졌는데, 이번엔 검이 남아 있네?”

“어머, 그래요?”

“네. 처음에 얘가 그 검을 꺼낸 게…… 응, 맞아. 고블린의 검을 들고 있었을 때였어요.”

“흐음…….”

공주가 턱을 괴며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냥 우연 같은데……우리 마을 검이나 고블린의 검이나 별 차이 없지 않나?

물론 고블린이나 오크가 들고 다니는 검은 품질이 조잡하긴 하지만.

말없이 검을 바라보던 공주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아무튼 용사님이 성검을 들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이름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거 맞죠?”

노파심에 물어보자, 공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입니다. 카엘 에스트렐.”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저는 카엘 님을 수도로 모시러 왔어요. 내일 바로 출발하실 수 있죠?”

“네? 내일이요?”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아니, 마을이 이 꼴인데 어떻게 내팽개치고 가라고…….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준비가 안 되었다.

“너무 이릅니다. 마을 수복도 도와야 하고……. 적어도 다음주에……”

“안 돼요.”

“그럼 적어도 촌장님이 기운을 차리신 다음에……”

“안 돼요. 당신은 내일 저와 함께 출발해야 돼요.”

너무 강압적인 거 아닌가?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리 서둘러야 하죠? 아니, 물론 드래곤이 세계의 위협인 건 알지만…….”

“드래곤 때문이 아니에요.”

공주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잘랐다.

그리고 찻잔의 남은 차를 단숨에 마신 후, 직접 다시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제가 잡아넣은 게 악마인 건 아시나요? 생긴 건 그래도 무려 색욕을 관장하는대악마랍니다. 제 눈엔 식욕을 잘못 쓴 게 아닌가 싶지만요. 아무튼 그 녀…… 흠흠, 그 악마가 제 행세를 하고 이곳에 온 건, 용사님,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에요.”

그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직접 이 몸으로 겪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잠자코 공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예언이 있고 바로 다음날에 성광(?光)을 보았어요. 생각보다 징조가 빨라서 깜짝 놀랐죠. 한 10년이나 백 년 뒤에…… …… ……근데 제가 더 놀란 건……. …… ……방에서 책 읽고 있는데, 부사제님이…… …… ……외출하신 거 아니셨어요?’ 라고 묻는 거 있죠! 세~상에, 그때 얼마나 소름이 끼치던지!”

……뭔가 인상과 다른데.

바로 조금 전 차 마실 때만 해도 분명히 우아한 공주님 그 자체였는데, 갑자기 동네 여자애가 되어버렸다.

그보다 말이 너무 길어!

주의 깊게 들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중간중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도 무슨 이야기인지 대강 알아먹었단 말이지…….

참 신기해…….

그러나 아직 시련, 아니, 공주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알고 보니, 누가 저인 척하고…… …… ……허겁지겁 준비해서…… …… ……딱 맞게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어머,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음, 아무튼 악마는 이미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어요. 이번엔 그 악마 혼자서 공을 독차지하려고 서두른 것 같은데, 그래도 또 언제 다른 악마가 올 지 몰라요.”

세상에, 그 짐승 같은 악마 말고 또 다른 놈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것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다.

싸우는 건 그렇다치고, 아버지를 포함한 고향 사람들이 다치는 걸 또 보고 싶진 않다.

“으음……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그 악마, 어떻게 용사님이 여기 있다는 걸 이렇게 빨리 알 수 있었을까요? 계시에도, 예언에도 위치 이야기는 없었는데. 성광이 올라왔을 때도, 방향만 겨우 가늠했는데……. 정말 이상하네, 여기에 첩자라도 있나?”

공주는 찻잔을 손에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마니까 그냥 본 거 아닐까요? 그 놈들은 먹이감을 찾아 세상을 두루 다니며 지켜본다면서요.”

분명 성서에 그렇게 적혀 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공주는 내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으으음, 아니에요, 카엘 님. 이 사항에 한해선 그런 거 안 하기로 되어있거든요. 그렇다고 자력으로 알아냈다기엔 너무 빠르고……. 뭐, 돌아가서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죠.”

“……?”

이 사항? 그런 거 안 하기로 되어 있다?

엥? 그럼 평소엔 한다는 건가?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혹시 아버지는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다행이다.

나만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면 됐어.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고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찌 되었건, 카엘이 내일 당장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리고 곧바로 드래곤 퇴치하러 떠나야 하고요.”

“네. 왕성에서 정식으로 용사 탄생을 선포할 거에요. 그 다음, 용사님의 모험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죠.”

왕성에서 정식 선포……

오우, 벌써부터 속이 아파오는 것 같다.

나는 바깥으로 티를 안 내려 애썼다.

“흠, 좀 문제가 있습니다만.”

“문제요?”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턱을 매만졌다.

대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저러시는 건지 괜시리 불안해졌다.

“이놈이 약……”

으악!

“약해서, 네,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너무 약해서요, 공주님! 그래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재빨리 말을 받았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아니, 아버지는 이 상황에서 뭔 소리를 꺼내려는 거야?!

공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아스모스와 싸우셨으면서 약하시다뇨? 그 짐승, 영지를 가진 대악마에요. 아, 겸손 떠시는구나?”

“아닌데요.”

“으응? 뭐…… 정말 무력에 자신없으셔도 괜찮아요. 수도에는 저희와 같이 갈 거고, 드래곤 퇴치도 혼자 하실 건 아니거든요. 물론 가는 중에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거고, 운 없으면 다른 악마와 만날 수도 있지만…… 아스모스를 상대하셨으니 별 문제없을 거에요!”

눈부시다.

공주의 엷은 금빛 머리카락도 눈부시지만, 무엇보다도 저 순수하게 기대에 찬 눈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굉장히 아프지만 현실을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그녀가 직접 겪고 실망할 때는 이미 늦으니까.

또 지금처럼 아예 출발하기 전에 알아야 무언가 대책을 세울 수 있겠지.

“그…… 이번에 싸운 건, 순전히 얘 덕분이에요.”

“네? 아, 여자친구? 사랑의 힘, 뭐 그런 거 말씀하시나요?”

여자들 참 대단해~

어떻게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아니요, 순수하게 무력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얘가 없었으면 악마의 본모습도 보기 전에 당했을 거에요. 그리고 얘는 제 여자친구 아니에요!”

확실히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버지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예, 카엘의 말이 맞습니다. 여기 있는 메린 소더는 우리 마을 제일가는 검사입니다. 저는 직접 보지 않았으니 확언은 못합니다만, 이번 싸움도 분명 이 아이가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어머머…… 저랑 체격도 비슷하시고,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나는 것 같은데, 대단하시네요!”

“그리고 메린은 이놈 여자친구가 아니라 약혼녀입니다.”

“어머나!”

아아악! 젠장, 방심했다!

어떻게 잘 넘어갔다 싶었는데!

공주는 다른 의미로 눈을 반짝이며 메린의 손을 덥썩 잡았다.

두 여자의 손이 맞닿은 순간, 공주가 흠칫 놀라며 메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메린이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공주를 마주보았다.

공주는 아무 말없이 메린의 눈을 들여다보듯이 바라보았고, 메린은 결국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나와 아버지는 공주의 갑작스러운 태도변화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

메린이 탁자 밑에서 발로 나를 툭툭 쳤다.

아니, 나보고 뭐 어쩌라고?

“후후후…….”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공주가 메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나와 메린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그, 저, 약혼녀 아니니까 오해 마세요.”

일단 말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공주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을 내저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 아니요, 아니에요, 카엘 님! 이 아가씨…… 메린? 메린과 당신은 훨씬 더 재미있는 관계랍니다!”

“네? 뭔 관계이길래…….”

“후후, 알려드릴 수 없어요. 천기누설이라는 것이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무력이 걱정되시면 간단하네요."

공주는 자신의 두 손을 깍지 끼우며 환히 웃었다.

메린을 향해.

"메린, 같이 가요!”

“뭐?!”

공주님 면전이라는 것도 잊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가 바로 내 어깨를 도로 꽉 눌러 앉혔다.

그러나 내 벌어진 턱은 다시 닫아주지 않았다.

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주를 마주보았다.

“같이……요? 수도까지요?”

“네. 수도까지.”

공주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드래곤 앞까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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