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14화 : 출사표 던지기
* * *
드래곤 앞까지, 라면 사실상 끝까지 가자는 얘기잖아.
굳이 얘가 같이 갈 필요는 없을 텐데?
그리고 지금 마을 꼴이 이런데 얘까지 가면 누가 마을을 지켜?
……라고 항의하려고 한 순간, 옆에서 누가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조용히 있어.”
아버지였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통증 때문에 목소리를 낼 여유가 없어져버렸다.
그 사이에, 메린이 우물쭈물해하며 입을 열었다.
“음…… 카엘이 괜찮다면야…….”
나?
왜 날 걸고 넘어진대?
나야 당연히……
“……”
……우와, 바로 옆과 바로 맞은편에서 보내오는 시선이 무시무시하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공주 쪽이 훨씬 무시무시한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호호 웃는 얼굴로 몸 속 핏줄이 얼어붙는 듯한 압박을 보내다니,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위압에 굴복할 순 없다.
기록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예비 필경사로서, 절대로 그럴 순 없어!
……라고 뻗대기에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압박이었다.
“생각해볼게요.”
유보하는 것, 그것이 내 최대의 저항이었다.
그때 갑자기 거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필 손님 있을 때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누군지 몰라도 마을 망신 다 시키네!
문이 내 뒤쪽에 있지만 않았어도 바로 한 마디 날렸을 텐데!
“메린 소더!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헉.
문이 내 뒤쪽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 유리창조차 흔들리게 만드는 목청을 가진 사람은 우리 마을에 딱 하나밖에 없다.
‘뿔나팔’이라는 이명을 가진 우리 마을의 여주인, 촌장님의 아내 되시는 벤스 부인이다.
뒤를 돌아보니 분노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벤스 부인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슐 누나가 서 있었다.
“죄, 죄송해요! 어머니, 좀 진정하세요! 손님이 계시다니까요!”
“지금 손님이 대수야?! 내 아들을 저 꼴로 만든 년이 내 집에 들어와 있는데!”
아, 맞다. 그러고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도 충격적인 일을 겪은 탓에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무슨 꼴로 만드셨길래……?”
율리아 공주는 당황하긴커녕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왕족 대단해.
이런 건 놀랄 거리도 안 되는구나.
“무슨 꼴이냐고? 궁금하면 가서 보실라우? 애가 완전히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는 말도 제대로 못해!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지금 초상 치르게 생겼다고! 이 년이 그렇게 만들었어!”
“……흐음…….”
공주는 턱을 괴었다.
“제가 치료해드릴까요?”
“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소리를 꽥꽥 지르던 벤스 부인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공주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둥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내해주세요. 제가 치료해드리죠.”
튜르의 방은 거의 우리집 거실만한 크기였다.
우리집 거실은 부엌도 겸하고 있으니까, 사람 한 명 쓰기에는 쓸데없이 더럽게 큰 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무지막지하게 큰 방 안쪽 창가에 침대 하나가 있었고, 튜르는 그 위에 누워 있었다.
눈, 코, 입을 빼고는 얼굴이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다.
화상 입은 것도 아니고 그냥 맞은 건데 너무 과한 거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침대로 가까이 가자, 갑자기 튜르가 벌떡 일어나더니 마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나 메린은 물론이고, 자신의 어머니도 못 알아보고 비명을 지르다가 이불을 머리까지 홱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다.
심각하긴…… 하다.
음, 튜르에게 좋은 감정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불쌍한데.
“흐음, 착란 상태로군요.”
그리고 공주는 굉장히 침착했다.
놀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훨씬 더한 모습을 많이 봐온 걸까?
“어미가 돼서 이 꼴을 보고 분이 안 터지겠어요? 으흐흑, 이 은혜도 모르는 년! 지금껏 마을에서 살도록 해줬더니……!”
벤스 부인이 얼굴을 감싸며 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심하게 다친 아들을 보고 상심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누구든 이 모습을 보면 아무리 벤스 부인의 풍채가 곰처럼 듬직하다고 해도 가슴이 아파올 것이다.
한 명 빼고.
“그거 내가 한 거 아닌데요.”
그래. 얘 빼고.
메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벤스 부인이 곧바로 눈물 어린 눈을 부라리며 메린을 노려보았다.
“뭐가 어째?!”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요.”
“너 아니면 누가 이래!”
으, 올 것이 왔군.
나는 가만히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건 제가……”
“이 썩을 놈이, 네가 감히!”
말을 꺼내자마자 부인이 내 목을 졸라왔다!
“컥, 아니, 잠깐, 부인! 크헉, 제 말 좀!”
“변명 따위 듣기 싫다!!”
우와, 우와, 우와, 진짜 죽을 거 같은데, 이거?!
아니, 숨이 막히는 것보다도 아파!
목 조이는 게 아파!
질식하기 전에 목뼈 부러질 거 같다, 이거!!
“일단 말로 하세요!! 아무리 부인이라도 이건 못 참습니다!!”
“어머니! 제발 좀 진정하세요! 얘 말 좀 들어봐요!”
아버지와 슐 누나가 달려들어서 겨우겨우 벤스 부인을 떼어냈다.
우와…… 진짜 죽을 뻔했어…….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이냐, 더럽게 무섭네!
거센 기침과 물 한 잔, 그리고 두세 번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겨우 목소리를 다시 낼 수 있었다.
“그…… 저 노, 아니, 튜르와 제가 정정당당하게 결투한 거에요. 저도 얻어터졌고요!”
“그럼 팔리스, 머튼, 벤, 타이판 이 네 명이 거짓말했다는 거야? 그 애들 말로는 이 년이 자신들을 피떡으로 만들고 튜르에게 손을 댔다던데!”
“아, 그건……”
부인이 언급한 네 명은 튜르 자식을 쫓아다니던 그 졸개들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얘가 했죠.”
“거봐! 그런데 어디 발뺌을 하려 들어?!”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그 놈들 분명, 자신들이 저지른 짓은 쏙 빼놓고 얘기했을 거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그 망할 새끼들이 어디서 피해자 행세야?
“그건 이 새끼가 먼저 잘못해서 그런 거에요!”
“무슨 헛소리냐? 내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새끼가 결투에서 지니까 투척 나이프를 던져서 절 죽이려 했다고요!”
메린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분명 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그 전에 이 새끼가 그딴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메린이 날뛸 일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 전에 이 새끼가 그때 메린에게 괴물 어쩌고 하며 지랄하지만 않았어도 결투할 일도 없었을 거다!
아니, 애초에 이 새끼가 그때 들판에 오지만 않았어도 됐을 거다!
다 이 새끼 때문이구만, 왜 우리한테 난리야?!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 튜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얼마나 착한 애인데!”
착하긴 개뿔.
“착한 놈이 그렇게 여자를 꼬시고 버립니까? 조만간 손주 하나 보실 거에요. 미리 축하드려요!”
“이 놈이……!”
부인이 또 다시 내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부인의 팔은 내 목에 닿기 전에 공중에서 우뚝 멈추었다.
설마 또 메린인가 싶었는데, 부인의 팔을 잡은 건 의외로 공주였다.
“자아, 자, 이야기는 양쪽 당사자 모두에게 들어봐야 하는 법이랍니다. 원망도 처벌도, 그때 하시면 되는 거에요. 그렇죠?”
벤스 부인의 팔이 아래로 내려갔다.
공주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데, 벤스 부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일어날 수 없는 일을 보는 듯한 얼굴이다.
공주가 팔을 놓자, 부인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저 부인이 저렇게 맥없이 주저앉다니?
뭘 한 건지는 몰라도 왕족 대단해!
“그럼, 제정신 좀 차리게 해볼까요?”
아버지와 슐 누나가 부인을 부축해 의자에 앉히는 동안, 공주는 침대 옆에 앉더니 이불을 홱 걷어버렸다.
“아아아아아악!”
“엇차!”
공주가 튜르의 목을 손날로 치자, 녀석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
지금 굉장히 자연스러웠는데?
이 사람, 한치의 주저도 없이 물 흐르듯 급소 때렸는데?!
그러나 무어라 한 마디 던질 분위기가 아니어서 잠자코 지켜보았다.
공주는 튜르의 눈을 손으로 덮고 눈을 감았다.
“……나의 손은 주의 자비를 표하기 위해 있나니.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창조주시여. 주의 어린양을 일으키시어 주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공주의 손바닥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공주는 그대로 손을 천천히 내려, 마침내 튜르의 턱까지 스윽 훑은 후, 손을 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으으……”
튜르가 작게 신음하더니 눈을 떴다!
벤스 부인이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침대로 날아오듯이 다가왔다.
“튜르! 정신이 드니? 엄마야, 엄마. 알아보겠니?”
“어어…… 엄마……? 그리고…… 흐이익?!”
튜르가 메린을 보더니 질겁하며 벌떡 일어났다.
“이젠 날 아예 죽이러 왔냐?! 저리 꺼져, 이 괴물! 엄마, 저 괴물 좀 치워줘요! 저 놈이 또 날 죽이러 왔어!!”
“……저 새끼가 아직도!”
입이 산 걸 보니 덜 쳐 맞은 게 분명해!
저 새끼 이빨 오늘 다 털어버리겠어!
그러나 달려들려는 순간, 아버지에게 막혔다.
“카엘! 임마, 물러나! 물러나라니까!!”
“아, 놔요, 놔 보라니까요! 아버지도 저 놈 말하는 거 들었잖아요!”
“알았으니까 일단 물러나! 메린, 미안한데 얘 좀 데리고 같이 나가 있거라.”
메린은 말없이 팔로 내 목을 감싼 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니, 보통 팔 잡고 가지 않나?
황당한 나머지 저항할 생각도 못했다.
"……그래."
아들을 끌어 안고 있던 벤스 부인이, 갑자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다 몸을 홱 돌리더니 악에 받친 듯이 소리쳤다.
“그래! 나가, 이 괴물아! 이 집에서, 아니 이 마을에서 썩 꺼져!”
메린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부인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 덕에 녀석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잘 보이고 있었다.
벤스 부인의 독기 어린 얼굴과, 아버지와 슐 누나가 경악하는 얼굴이.
“부인, 지금 무슨 말씀을…… 지금 메린에게 하신 겁니까?”
“그럼 여기 괴물이 저 년 말고 또 있어요? 내 아들 죽이려고 한 저 년 말고 또 있냐고!”
“부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드문 일이었다. 아버지가 저렇게 화를 내다니.
가엾은 슐 누나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정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벤스 부인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뭐가 지나쳐요? 솔직히 얘가 틀린 말한 거 아니잖아요! 얘 친구들도 곤죽을 만들고, 튜르는 죽이려고 하고! 그리고 들었어요, 무투회 때도 한 난리 피웠다면서요? 난 지금 이 애 엄마로서, 그리고 이 마을 모든 어머니와 아내를 대표해서 말하는 거에요! 다들 동의하고 있다고요!”
……다들? 동의?
어떤 놈들이 이 난리에 그딴 안건을 내고, 거기에 동의를 해……?
“성인이 될 때까지 봐줬으면 할 만큼 한 거에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 아들과 짝지으려는 걸 눈감아 줬더니 이 꼴을 만들어?! 난저게마을을 돌아다니는 걸 더는 못 봐요! 남편이 깨어나는 대로 얘기해서,”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는 무척 딱딱했다.
소리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나는 지 아들에 미친 아줌마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굳이 촌장님 기다리실 필요 없어요. 메린 소더는 저와 같이 내일 마을을 떠날 거니까.”
메린의 팔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리적으로 볼 수 없을 뿐더러, 지금은 아줌마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했다.
안 그러면 저 히죽거리는 공주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슐 누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튜르 새끼, 그리고 의외로 덤덤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의 시선에 눌려 말이 막힐 테니까.
“뭐?”
귀도 먹으셨나.
벤스 부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못 들으셨어요? 메린 소더는 내일 이 마을을 떠납니다. 얘는 이딴 마을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제 발로 나가는 거에요! 용사의 동료로 떠난다고요! 댁 같은 인간들이 있는 곳에 놔둘 바에 내가 데려가고 말지! 그간 사냥이다 양치기다 자경 활동이다며 실컷 부려먹고는 뭐가 어째?!”
말하다 보니 점점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올랐다.
“댁이 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댁이 대표한다는 마을 어머니들과 아내들이 얘한테 뭘 해줬냐고! 가르치길 했어, 먹이길 했어, 돌봐주길 했어?!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서 뭘 잘났다고 나불대!”
“카엘, 그만 못하겠냐! 메린, 이놈 데리고 나가 있거라!”
아버지의 말에, 메린이 다시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목젖이 콱 막혔다. 그러나 도저히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꾹꾹 막아 두었던 둑이 터진 것처럼, 내 입에서 원망이 물처럼 줄줄 새어나왔다.
“지들이 먼저 건드려 놓고 누구한테 지랄이야! 아줌마! 댁 아들 새끼 교육이나 똑바로 시켜!! 튜르 이 개 같은 새끼야, 너 그러고 살지 마라!!”
거기까지 말한 순간 우리는 문지방을 지났고, 내 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메린은 그래도 멈추지 않고 나를 질질 끌고, 아예 집 바깥으로 나와버렸다.
녀석은 촌장님 댁 근처 나무 밑에 와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목 막힌 상태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느라 기운을 다 써버렸다.
일어나지 않고 그냥 나무 밑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하……”
……결국 폭발해버렸다.
후회는 없다. 후회는 없지만……
……뒤늦게 서글퍼졌다.
그러니까 마을 아낙네들이 전부 동의했다는 거잖아?
쟤를 쫓아내는 것에?
……아주머니들 중에는 그럭저럭 살갑게 메린을 대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메린이 내 옆에 쪼그려 앉아,덤덤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나 데려갈 거냐?”
“어. 왜? 싫어?”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좀 의외라서. 너, 나 무섭다며.”
“맞는데. 무서워 죽겠어.”
“근데 왜 굳이 데려가려고 하냐?"
"몰라서 물어?"
메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니까 물어보지. 이유가 뭔데? 검 실력 때문이야?”
뭐야?
아까는 나만 허락하면 바로 따라올 것처럼 굴더니, 납득시켜야 돼?
“그래, 임마, 네 검 실력 때문이다! 네가 있으면 내가 덜 다치고 덜 싸워도 될 거 아냐!”
“그래? ……왜 화내는 건데?”
“웃기지 마, 자식아, 화난 거 아냐! 굳이 말로 해야 된다는 게 기가 막혀서 그런 거다, 짜샤!”
“화났구만…….”
쪼그려 앉아 있던 메린이 자리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어디 가, 임마!”
“……너 목 안 아프냐? 어디 가긴, 집에 가지. 짐 챙겨야 할 거 아냐. 나중에 한번 들러서 집합 시간 같은 거 알려줘.”
메린은 내가 더 말할 새도 없이 휘적휘적 걸어가버렸다.
나 홀로 나무 밑에 누워 있자, 끓어올랐던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뒤늦게, 의문이 찾아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 왜 화냈지?”
괴물 어쩌고 하는 막말이 잘못된 거긴 한데……
……생각해보니 튜르 놈 때만 해도, 당사자인 메린은 별 반응 없었는데 내가 굳이 나섰단 말이지…….
방금 전에도 부인에게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고.
당사자는 가만 있었는데 말야.
“아니……”
……녀석이 가만히 있으니까, 더 열 받았던 건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진짜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생색부리는 것도 같잖았고.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걔한테 마을 규칙이랑 이것저것 가르친 건 나고, 종종 챙겨주고 여자로 사는 법을 알려준 건 우리 엄마밖에 없잖아?
그래 놓고 뭘 잘났다고……!
하, 웃긴 아줌마야, 진짜!
“……”
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차피 아버지랑 공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더 할 말도 없을 텐데, 빨리 안 나오고 뭐하시는 건지.
“하아…….”
왠지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악을 쓰고 소리질렀건만, 마음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득, 튜르를 안고 싸고 돌던 아줌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더 나았을까?
튜르를 감싸고 도는 그 아줌마처럼, 나를 위해 악을 써주셨을까?
……메린의 편도 들어주셨을까……?
“……”
눈을 팔로 덮었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강한 탓이다.
오후로 접어들며 햇빛이 너무 강해져서,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눈을 못 뜨겠는 것도, 뺨이 축축해지는 것도, 전부 다 햇살 때문이다.
……전부 다, 햇살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