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5화 : 출발이다!
* * *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몸을 일으켰다.
율리아 공주와 함께 촌장님 댁을 나온 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메린은?”
“……짐 챙긴다고 갔어요.”
“그러냐? 뭐, 어쩔 수 없지. 가자.”
……음? 의외로 그냥 넘어가네.
그 아줌마에게 한 난리 피웠으니 꾸중하실 줄 알았는데.
공주도 굉장히 태연한 얼굴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하냐? 가자니까?”
“어어, 네…….”
아, 촌장님 댁 거실에 검 놓고 왔는데.
뭐…… 그냥 흔한 검이니까 두고 와도 별 상관없겠지.
나는 아버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근데 아버지.”
“왜.”
“……저 옷 갈아 입으러 가면 안 돼요?”
무투회장에서 싸운 다음 곧장 끌려온 탓에, 난 아직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인데다, 뒤쪽은 하피의 피로 시뻘개진 상태이다.
아니, 언제까지 이 피 묻은 옷을 입고 있어야 되는 건데.
몸에 묻은 것도 다 말라서 안 닦이겠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해, 임마.”
아잇, 진짜.
“너무해!”
새된 목소리로 항의하는 내가 재미있는지, 공주가 킥킥 웃었다.
“죄송해요, 카엘 님. 금방 끝날 테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하…… 예에…….”
공주가 저렇게 말하는데 더 무어라 불평할 수도 없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고, 공주는 곧바로 임시로 마련한 간이천막, 임시 치료소로 향했다.
촌장님과 다른 장로님들은 아직 끙끙대며 신음할 뿐, 의식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다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라, 회복에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이거 떠나기 전에 인사하긴 글렀구만.
공주는 환자들을 돌보는 사제들과 한차례 이야기를 죽 나눈 후, 우리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이 마을엔 사제님이 안 계시나요? 안 보이시네?”
……그러고보니 천막 안 어디에도 우리 마을 사제님은 없었다.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치유 기도를 하는 사제들은 전부 공주와 같이 온 사람들이다.
그건 그렇고, 치유 기도라는 게 진짜 있긴 있구나.
우리 사제님은 얼마나 기도를 게을리했길래 모기 물린 상처도 못 고치는 걸까?
아무튼 기도를 못하면 몸으로 때우기라도 해야 할 텐데, 진짜 왜 안 계시지?
“아마 신전에 계실 겁니다. 작은 마을이라 부사제도 없어서, 사제님 혼자 신전을 관리하니 차마 비울 수는 없었겠지요.”
아버지의 말에공주가 눈살을 홱 찌푸렸다.
“이 상황에 신전에 틀어박혀 있다고요?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왔는데? 누구인지 몰라도 완전 빠졌…… 흠흠, 기강이 해이해졌군요! 한 마디 해주러 가야겠어요. 어차피 오늘 거기서 묵어야 되니 잘됐네요. 이 기회에 버르…… 사제의 마음가짐을 다시 잡아줘야지!”
왕족과 고위 사제가 절대 입에 담지 않을 말이 하나씩 들린 것 같았지만, 분명 내 착각이다.
주변의 환자들이 말한 걸 잘못 들은 거겠지.
공주는 천막 안을 둘러보며 세 명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린 사제들이 즉각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공주에게 다가왔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붕대를 감아주다가 곧바로 다른 사제에게 넘긴 후, 거의 뛰어오다시피 했다.
공주는 그 모습에 은근히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 이러고 지내나?
“알스, 나 대신 여길 맡아줘. 너희 둘은 날 따라오고.”
“어디 가십니까?”
“이 마을 신전. 혹시 모르니까 장비 챙겨오고.”
사제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공주의 말에 따랐다.
두 사제가 저마다 지팡이를 들고 다시 오자, 공주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 공주, 그리고 다른 두 사제가 함께 마을 신전으로 향했다.
우리 마을 신전은 마을의 가장 안쪽, 숲 바로 근처에 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언제 몬스터와 짐승이 덮칠지 모르니 이런 데에 집을 짓고 살진 않을 거다.
그러나 ‘신전’에는 창조주의 가호가 함께하기 때문에 숲 가까이에 있어도 안전하며, 오히려 그 때문에 마을 경계를 표시할 겸 구석에 지은 거라고 했다.
누가?
우리 아버지가.
그러나 신전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공주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이런 데에 신전을 세우다니, 참 희한하네요~”
“……그럼 원래 어디에 있는데요?”
“그야 광장이죠. 아니면 광장 근처이거나. 그래야 신도들이 찾아오기 좋지 않겠어요? 이렇게 구석진 곳에 있는 건 처음 보네요.”
“……”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날 속였어!
“음?”
신전 입구에 가까이 가자, 갑자기 공주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우리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지, 공주는 정색하고 있었다.
“여기가 신전 맞죠?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되나요?”
“예, 그렇습니다.”
“……흠.”
공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전이 너무 작아서 불만인가?
그러나 아버지가 앞서 입구에 다가가려 하자 공주가 재빨리 만류하더니, 자신이 데려온 두 사제를 돌아보았다.
“피리온, 헬리, 준비해라. 특히 헬리, 네가 이 두 분을 지켜드리거라. 내가 문을 열겠다.”
명령을 내리는 공주의 목소리는 낮고 간결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정반대의 말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두 사제가 척척 움직이고, 공주는 휘적휘적 신전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나와 아버지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자 사제가 우리 근처에 서서 느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 사람이 '헬리 사제'구나.
나는 왠지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헬리 사제에게 물었다.
"저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언자님이 하시는 거니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죠."
"……"
숨기려고 말을 얼버무리는 것 같진 않다.
그럼 뭐야,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데도 시키니까 그냥 하는 거야?
이건 이거대로 대단한데…….
그동안 신전 입구로 다가간 공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홱 열어젖혔다.
그러자 엄청나게 강한 바람, 아니 연기가 공주를 덮치며 마구 뿜어져 나왔다.
매캐한 기운에 눈과 코가 따끔거려 눈물이 줄줄 흘러나와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기침이 마구 터져나오는 건 덤이다.
그때, 앞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존자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갑자기 따끔거림이 사라지고, 숨 쉬는 것도 편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우리 앞에 선 헬리 사제를 중심으로 연기가 우리를 비껴가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보호막인가?
사제 굉장해!
“어, 공주님은?!”
연기가 너무 짙어서 공주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직격 맞았는데, 무사하신가?!
“대언자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곧 끝날 겁니다.”
헬리 사제는 무척 밝은 목소리로 단언하고 있었다.
"끝나다니, 뭐가요?"
"아무래도 저 안에 악마가 있는 것 같아요. 대언자님이 금방 처리하실 거에요."
뭐? 악마??신전에???
신전에 악마가 있다니 이게 무슨……?
아니, 공주야 그 커다란 악마를 단신으로 제압할 정도이니 무슨 악마가 튀어나와도 별 걱정할 필요가 없긴 하겠지만…….
……정말로 악마가 있다고?
갑자기 안쪽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공주의 호통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구역질나는 아가리 닥치지 못해! 감히 이곳을 더럽히다니, 불타 죽어라, 이 마귀 새끼야!”
“……”
이것도 못 들은 척해야 되나?
나보다 현명한 아버지는 진작에 그러기로 결정한 듯했다.
옆의 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뭇잎 숫자를 세고 있었다.
“끝났네요.”
그리고 헬리 사제는 여전히 밝았다.
저 공주님, 평소에 항상 저러고 지내는구나.
“피리온!”
“예! 지금 갑니다!”
연기 속에서 두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주변을 자욱히 감싼 연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나머지 분들도 들어오세요!”
공주의 목소리다.
헬리 사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우리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먼저 성큼성큼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아버지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후, 조금 주춤거리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출입문은 곧바로 예배당으로 이어져 있다.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엄숙히 울리는 예배 때와 달리, 싸늘한 적막감이 예배당 온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공주는 그 한가운데에 서서, 예배당 맨 안쪽의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단상 앞에 웬 잿더미가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고 있다.
그 주변에 검댕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불이 났던 것 같진 않다.뭐지?
공주는 우리가 가까이 가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잿더미만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첩자가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사제 행세를 할 줄은 몰랐네요.”
“네? 그럼 설마…….”
우리 사제님이 악마였어?
치유 기도 하나 제대로 못하긴 했지만, 매주 예배도 잘 주도하셨는데?
그럼 저 잿더미는 사제님의 잔해인가!
“네. 여기 사제라던 사람이 악마였어요. 나 참,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이건 창피한 일이야. 사제 중에 악마가 섞여 있다니!”
공주는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얼굴을 잔뜩 구기고,아버지에게 물었다.
“에스트렐 씨, 이 분, 언제부터 이 마을에 있었어요?”
“20년도 더 됐죠.”
“오래 됐네……. 뭐 이상한 점 못 느꼈었나요? 에스트렐 씨는 필경사라고 하셨으니까 의식이나 의례를 아실 것 같은데요.”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 이상한 점은 없었…… 아니다, 그러고보니 매달 초일과 말일의 정결 의식을 하지 않고 있었네요.”
“세례식은요?”
“하긴 했습니다. 그냥 기도만 하는 약식이었습니다만.”
“기도는요?”
“예배 기도는 그럭저럭 외우시던데, 치유 기도는 자꾸 깜빡깜빡하셨죠. 다 외우셔도 치유 효과는 없었고요.”
결국 공주의 인내심이 폭발했는지씩씩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왜 못 알아챈 거야?! 어딜 봐도 이상하잖아요! 전쟁 중인 것도 아닌데 의식을 약식으로 하질 않나, 기도를 못 외우질 않나! 기도를 해도 아무 효과가 없질 않나! 어떻게 아무 의심도 못할 수 있죠?!”
그러게. 나도 황당한데, 대언자이자 최고사제인 공주 입장에선 기가 막히다 못해 어질어질하겠지.
근데 다른 사람들은 어쨌든, 아버지는 사제님이 이상하다는 것쯤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가만히 계신 거지?
너무 신심이 깊어서 의심하는 것조차 죄라고 느꼈던 걸까?
공주는 책망하는 눈길로 매섭게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전혀 위축된 기색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대언자님, 이곳 놋지빌은 늘 전쟁 중이니까요.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가 상대이긴 한데, 전쟁인 건 마찬가지이죠.”
그것도 그렇다.
여기 놋지빌은 숲에 사냥하러 가면 오크 머리 하나도 딸려오고, 호수에 낚시하러 가면 리자드맨과 생선 쟁탈전을 벌이며, 광석을 캐러 가면 광물 하나당 고블린 한 마리가 따라오는 동네이다.
당연히 늑대나 곰 같은 짐승도 있다.
왜 환경이 이따위냐? 그건 간단하다.
우리 마을이 왕국의 최북단, 시골 중의 시골이라 그렇다.
무엇보다도 우리 마을 북쪽에 있는 그 놈의 산 때문이다.
거기 그 드래곤이 있어서 그만……!
그래서 대륙 사방 각지에 널리고 널린 게 몬스터이지만, 드래곤의 영향력 때문인지 유독 북쪽에 더 와글와글했다.
신기한 건 우리 마을보다 더 북쪽에도 사람 사는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왕국령이 아닌 자치령이라서 정보가 없긴 하지만.
아버지의 말은 이어졌다.
“또, 보시다시피 여긴 벽지(??)입니다. 어설픈 사제님이라도사제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지요. 여긴 순례 여행하는 사제님도 오지 않는 곳이니까요.”
“……”
어딘지 원망이 섞인 말투였다.
‘그쪽이 진작에 잘 챙기던가.’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있지만, 결국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 것이다.
공주는 그 뜻을 충분히 알아차렸는지, 구겼던 표정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그랬군요. 사정도 모르면서 화부터 낸 것, 사과드릴게요. 애초에 제대로 관리를 안 한 우리 탓이죠. 면목없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안일했습니다. 전혀 생각도 못했던지라…….”
고개를 숙이는 아버지를 향해, 공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못하는 게 당연하지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요. 수도로 돌아가는 즉시, 새 사제를 파견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손색없는, 제대로 된, 사제를.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려요.”
“감사합니다, 대언자님.”
“음, 이번 기회에 왕국의 사제들을 싹 다 조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또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음음, 이번 회의 때 안건으로 올려야지.”
두 사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확 굳었다.그럴 만하다.
마을마다 작든 크든 신전이 꼭 하나는 있다.
그걸 일일이 찾아가서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올해 안에 절대 안 끝날걸?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공주에게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피리온 사제는 “으어…… 올해는 꼭 고향 가려 했는데……” 라며 울먹이기만 하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직접 목격한 게 있으니 두 사람 다 조사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고 느끼는 듯했다.
공주를 거스를 수 없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닐 것이다. 음음.
“어쨌든 오늘은 고생 많으셨어요. 내일 아침기도 후…… 그러니까, 오전 6시에 광장에서 뵐게요. 거기서 출발하도록 하죠.”
안녕히 주무세요, 공주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신전 안쪽으로 들어가버렸다.
또각또각 하는 구두소리에 섞여, “졸려 죽겠다”며 푸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가보세요. 특히 용사님께선 여행 준비도 하셔야 하잖아요? 내일 뵐게요.”
헬리 사제가 머쓱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손짓했다.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먼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자연히 나도 그 뒤를 따라 신전을 나섰다.
“……공주님 대단하신 분이네요.”
정말 여러모로 굉장한 사람이었다.
말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솔직히 그녀가 이 왕국에서 왕 다음으로, 아니 왕보다도 더 귀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특히 수다 떠는 모습은 진짜, 좀 비싼 옷 입은 동네 여자애나 다를 바 없는데.
아버지는 내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단하지. 저 젊은 나이에 대언자에 최고사제라니……. 근데 웃긴 게 뭔지 아냐? 네가 용사인 게 더 신기하다는 거다.”
“……”
젠장, 무슨 말을 못하겠네.
왜 모든 대화가 날 까는 걸로 끝나는 거야?
그러나 아버지는 내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공주님처럼 태어나기 전에 예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어날 때 무슨 징조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근데 용사가 됐단 말이지. 참 신기해…….”
음, 의외로 제대로 된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읽은 영웅들은 정말로 태어나기 전에 다들 나름 징조가 있다.
예언, 별똥별, 그것도 아니면 점성술사의 이야기 등등, 무언가 신비한 징조가 나타난 후에 영웅이 탄생했다.
근데 나는 그런 거 없이 그냥 평범하게 태어난 거다.
그런데도 용사가 됐다. 신기한 이야기이긴 하다.
문득, 메린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그럼 메린은요?”
“메린? 메린은 그때…… 어, 그래, 일식이 있었지. 그것도개기일식이었어. 이야, 그때 진짜 갑자기 확 어두워져서 얼마나 놀랬던지!”
“……”
영웅은커녕 마왕이잖아, 그거!
괜히 그 녀석이 그 모양인 게 아니었어!
전설도 무시할 게 못 된다는 걸 깊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시간에 맞춰 광장에 도착하자, 율리아 공주와 사제들이 일제히 반기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카엘 님. 길을 떠나기엔 최고의 날씨이네요!”
“아, 예. 잘 주무셨습니까, 공주 전하.”
공주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지금은 공주가 아니라 사제에요. 근데 구분하는 것도 귀찮을 테니,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아니면 말 놓을래요? 어차피 제 또래잖아요?”
오우, 주변 사제들의 눈초리가 엄청나게 따가운걸?
나는 잠긴 목을 가다듬고 정중히 사양했다.
“말씀만으로도 황송합니다. 존함을 입에 올리는 영광을 허락해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율리아 님. 이 이상은 과분하오니 통촉해주십시오.”
사제들의 눈초리가 편안해졌다.
반면, 공주는 굉장히 샐쭉한 표정이었다.
“어머머머머, 그런 딱딱한 말투, 여기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은데요? 당신한테 어울리지도 않고요. ……혹시 제가 너무 어려운가요? 공주에 대언자라서?”
아니요. 당신 뒤의 사제들 눈이 너무 아파서요.
그 중 한 명은 무시무시한 살기까지 내뿜고 있네요.
어제 당신이 ‘나 대신 맡으라’고 지시했던 그 알스 사제인 것 같은데 말이죠.
하하, 사제가 살기를 뿜다니 신선한데?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나는 멋쩍게 웃었다.
“하하,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엄격한 예법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가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율리아 님.”
“네, 잘 부탁드려요, 카엘 님. 아, 말 타고 갈 건데, 탈 수 있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나 메린 둘 다 승마는 문제없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공주는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슬슬 깨우셔야 하지 않을까요?”
공주가 가리킨 건 나, 정확하게는 내 등에 업혀 자고 있는 메린이다.
아침잠이 많긴 해도 평소엔 잘 일어나는데,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힘들었던 모양이다.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다 싶더니, 아예 도로 잠들어버렸다.
여기 오기 전에 이 녀석 집에 먼저 들른 나의 현명함에 건배를.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깨워도 소용없어요. 당분간은 제가 얘 데리고 갈 테니 걱정 마세요.”
사제 중 한 명이 말 한 마리를 내주었다.
나와 메린의 배낭을 실은 뒤, 우선 메린을 먼저 안장에 앉혔다.
다른 사제가 메린이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사이에, 그 뒤에 앉아 한 팔로 허리를 감싸 안고, 나머지 한 팔로는 고삐를 잡았다.
뒤이어 말에 오른 공주가 나를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꽤 먼 길인데…… 그러고 가실 수 있겠어요?”
“가다가 일어나겠죠.”
해가 완전히 뜨면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날 거다.
햇빛이 비추는 방향으로 이 녀석 고개를 꺾어서 얼굴에 쬐여줄 거니까.
그런데도 공주는 출발하지 않고, 계속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으음……그렇게 불안해보이나?
뭐, 보기엔 좀 그럴 수도 있지만, 이래 봬도 나 말 타는 건 자신 있어서 별 문제없는데.
마을 사람들도 내 승마 실력만큼은 인정해준다.
메린도 나한테 배웠으니 말 다했지.
그래서 공주에게 걱정 말라고 다시 말해주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히죽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긴장했다.
“왜, 왜요?”
“아니요~ 에스트렐 씨가 하셨던 말씀이 새삼 생각나서요. 히히, 약혼한 사이가 맞긴 맞네요. 이야~ 자세 봐, 되게 자연스럽네~ 평소에도 그러고 다니셨나~?”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젠장, 보는 눈만 없었어도 그냥 안장에 묶어서 가는 건데!
……아무튼 우리는 좀 소란스럽게 마을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 누구도 우리를 배웅하지 않았다.그러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난생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멀리 나가는 거긴 하지만, 딱히 섭섭하지도, 어떤 서글픈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안장 위에서 흔들리면서도 잘도 쿨쿨 자고 있는 이 녀석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하하, 나도 참,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어느 정도 길로 나오자, 앞의 사제들이 저마다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천천히 속도를 높였다.
정말로 마을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다.
이제야 실감이 조금 드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메린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자.”
곤히 잠든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 참, 태평한 녀석이야.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이른 아침 공기를 가르며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땅을 거세게 때리는 소리에 귀가 징징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여행이 시작된 거다.
나는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