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6화 : 공주님과 함께하는 신나는 수도 여행길
* * *
수도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물론 숲을 가로길러 가는 것이니 몬스터가 튀어나오긴 튀어나온다.
근데 하루에 네다섯 마리, 많아봤자 열 대여섯 마리밖에 맞닥뜨리지 않으니까 굉장히 적은 편이다.
우리 마을 근처는 심심하면 몬스터가 튀어나오니까 다른 곳도 별반 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율리아 공주 일행의 숫자가 너무 적다.
일반 사제 네 명, 수련사제 열 명, 다 합쳐서 고작 열 네 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급하게 왔어도 그렇지,몬스터 말고도 질 나쁜 강도들도 길거리에 있을 텐데.
그것도 대언자 겸 최고사제를 모시고서…….
“……”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하, 정말 걱정도 유분수였다.
속으로만 생각한 게 참 다행이지.하마터면 촌뜨기 티 낼 뻔했잖아.
첫 몬스터 무리를 만나자마자, 그 사실을 절절히 느꼈다.
왜냐하면……
“자비를 베푸소서!”
콰직.
“긍휼과 안식을!”
뿌득.
“……”
……이러고 있기 때문이다.
말만 들으면 굉장히 자비롭고 신실한 성직자인데, 그 뒤에 들리는 소리가 여간 심상치 않다.
“역시 날씨 좋을 땐 바깥에서 차를 마셔야지요~”
그리고 그들의 수장인 공주는 이 와중에 차와 과자를 먹고 있다.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수련사제들이 오크를 박살내고 있는 걸 구경하면서.
그리고 그 다과 테이블에는 나도 앉아 있다.
물론 나는 피 튀기는 걸 보며 하하호호 웃을 만큼 담력이 있진 않기 때문에,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진 과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된 걸까?
몬스터를 발견한 공주가 격퇴 명령을 내린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리고 사제 한 명만 공주 옆을 지키고, 나머지 사제들이 전투에 들어간 것도 어찌저찌 이해가 된다.
근데 공주는 사제들과 같이 싸우려는 나와 메린을 말리며, 같이 차 마시자고 굉장히 끈질기게 권했다.
이 부분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니,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렇게 우아하고 편안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거지?
공주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불편해 죽을 것 같아!
“핫!”
“크아아아아!”
빠악. 푸슉. 털썩.
“……”
또 어느 사제의 메이스나 망치가 오크 머리를 으깬 모양이다.
행색만 사제이지 거의 전사나 다름없다. 아니, 전사보다 더 심하다.
일반적인 전사라면 되도록 다치지 않도록 몸을 사린다. 이건 본능이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제님들은 달랐다.
피할 바에 더 달려들고, 막을 바에 둔기를 한 번 더 휘두른다는 태세다.
어쩌다 몬스터의 무기가 스쳐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냥 광전사 아니냐?
솔직히 무섭다.
“음음, 그럭저럭 괜찮네요. 어머? 제일 먼저 팔을 부러뜨리고, 그 다음 무릎을 때려야 되는데! 머리를 바로 노리다니 자비심이 부족하네. 서너 명은 훈련이 더 필요하겠어.”
“……”
자……비? 대체 어디가……?
차라리 칼을 쓰는 게 더 자비로운 거 아니야?
저건 그냥 고문이잖아!
잠깐, 사제들이 모두 저렇게 싸울 줄 안다면……
혹시 공주도?
나는 조심스럽게 공주를 살펴보았다.
딱 봐도 귀한 분이라는 게 티가 나는 얼굴이다.
피부엔 윤기가 흐르고, 손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없다.
굳은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기를 잡고 휘두르기엔 손가락과 팔이 너무 가느다랗다.
갑자기 공주가 나를 돌아보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으, 너무 쳐다봤나?
“왜요? 입가에 뭐 묻었나요?”
“아, 아니요. 율리아 님도 한 솜씨 하시나 싶어서…….”
솔직히 말하는 내게, 공주는 생긋 웃었다.
“전투는 제 일이 아니라서 잘 못해요. 저 아이들은 전투 보직이라서 훈련을 받은 거랍니다. 아, 그래도 호신술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모든 사제가 배워야 되거든요. 보여드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여기 있는 알스가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을 테니 양해해주세요.”
“음, 그렇군요. 무기는 뭘 쓰시는데요?”
“모닝스타요! 위력이 확실하거든요.”
“……”
음.
앞으로 사제님들에게 까불지 말아야지.
공주는 내가 굳게 다짐하는 동안, 한창 피가 튀기고 있는 작은 전장을 힐끗 돌아보았다.
“메린도 수고하지 말고 같이 마시면 좋을 텐데요.”
계속 자리를 지키는 나와 다르게, 메린은 찻잔을 비우자마자 다른 전투사제들과 합류했다.
자고 일어나서 몸이 찌뿌둥하다며 나간 거지만, 아무래도 공주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공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어려운 걸까요?”
“설마요. 메린은 누구 어려워하는 애가 아니에요. 정말로 그냥 몸을 풀고 싶은 거에요.”
맨손으로 오크를 상대하고 있는 게 무엇보다 큰 증거다.
녀석은 직접 오크를 죽이지 않고, 무장해제만 시킨 다음 가까운 수련사제에게 넘기고 있었다.
가끔 발차기가 오크의 목을 쳐버려서 세상 하직시키기도 하지만.
아무튼 저 녀석은 지금 아침 체조 중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평범하게 체조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다행이고요. 제 주변 사람은 모두, 저를 무슨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처럼 올려다보거든요. 같이 과자 먹자고 불러도, 과자 하나 집고는 바닥에 넙죽 절하고는 가버린다니까요! 저랑 같이 과자 먹어주는 건 림밖에 없어요. 아, 림은 제 까마귀인데, 똑똑한 아이랍니다.”
공주가 푸념을 늘어놓자, 알스 사제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대사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자주 다과를 나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대사제님이 섭섭해하세요.”
“누구, 블라이스? 얘는, 그게 다과니? 사전 회의이지. 이런 안건이 있다, 이렇게 처리하려고 한다, 이런 얘기밖에 안 하잖아. 아무리 향긋한 찻잎에 달콤한 과자를 앞에 두어도, 그딴 얘기만 죽 늘어놓으면 입맛이 싹 달아난다고. 어쩔 땐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니까!”
웃어야 하나? 아니면 맞장구를 쳐줘야 하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다쟁이인 공주는 내 반응은 안중에도 없이, 혼자서 계속 불평을 죽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그간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이윽고 공주의 불평이 대사제의 가발이 갑갑해보인다는 이야기까지 갔을 무렵, 전투를 끝낸 사제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그 동안 메린은 내 옆으로 슬쩍 와선 테이블 위의 과자를 몇 개 집어먹었다.
공주는 보고를 듣고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모두 고생 많았어요. 다시 출발합시다!”
이윽고 다시 길을 달리기 시작했고, 도중에 몬스터를 발견하면 반드시 멈춰서 퇴치한 다음, 또 길을 떠났다.
수련사제들의 경험 축적이 목적이라서, 가능한 많이 싸워야 한다나?
그런 식이니 자연히 행군 속도가 늦어져, 사흘이나 지나서야 수도 근방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날이 이미 저물어, 수도로 들어가는 건 내일로 미뤄야 했다.
“흠, 드래곤이 깨어나긴 깨어났네요. 확실히 갈 때보다 몬스터가 늘어나 있어요.”
테이블에 차려진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공주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몬스터는 훨씬 적게 출몰했다.
심지어 이 근방은 수도가 가까워서 그런지, 거대 지렁이 한두 마리만 가끔 보일 뿐이었다.
몬스터가 이웃사촌이던 우리 마을에 비하면 완전 평화지대이다.
그러나 공주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 근방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 흔한 자이언트 랫도 없었는걸요. 그런데 이 마을 바깥에 걸려 있는 거 보셨어요?”
그러고보니 마을 입구에 무슨 짐승 시체가 마구 널려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었지. 이 동네에서만 사는 놈인가?
“그림자고양이에요.”
"……네? 그게 고양이였다고요?"
우리 마을 역사상 제일 못생긴 고양이보다도 더 얼굴이 뒤틀려 있었는데?
그걸 고양이라고 하는 건, 전 세계 고양이들에게 큰 실례가 아닌가?
공주는 충격에 빠진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 처음 보시는군요? 하긴, 도시에서만 나오는 몬스터이거든요. 그림자고양이는 죽은 고양이가 원한을 품어서 생기는 건데, 그림자속에 숨어 있다가 사람이나 가축의 피를 쪽쪽 빨아먹어요. 크기는 평범한 고양이와 똑같죠.”
우와, 듣도 보도 못한 몬스터다.
우리 마을의 몬스터 도감에도 안 실려 있던 것 같은데.
최근에 생긴 몬스터인가?
공주는 내 추측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옛날부터 있던 몬스터인데, 최근에야 도감에 올렸어요. 한 석 달 됐나? 그간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고양이가 미친 건 줄 알았거든요. 몬스터로 판명되자마자 왕국 전체가 대대적인 정화 의식을 했죠. 특히 수도 근방은 정기적으로 정화 의식을 해서 완전히 근멸시켰고요. 근데 지금 다시 튀어나오기 시작한 거에요.”
그녀는 신을 섬기는 사제답게 몬스터에 정통한 듯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그간 품고 있던 큰 의문 하나를 풀기로 했다.
나는 공주가 음식물을 삼킬 때까지 기다린 후 물었다.
“그런데, 왜 드래곤이 깨어나면 몬스터가 활발해지는 거죠?”
마왕이면 또 몰라, 드래곤이 몬스터를 통솔할 것 같진 않다.
그냥 독립적인 생물일 텐데, 왜 드래곤이 깨어났다고 몬스터가 강해지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주는 포크를 입에 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음…… 아시다시피 아트라토스는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에요. 원래 천상에 살던 놈이었던 만큼, 본래 지니고 있던 힘이 강해요. 그 놈이 지상에 떨어지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몬스터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는 거였어요. 그러니 놈이 깨어나면, 자연히 몬스터들이 더 힘을 받고 강해지죠.”
그러니까 이런 건가?
전투에서 열세에 빠져 사기를 잃은 병사들 앞에,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전설의 장군이 짜잔~ 하고 나타나 지휘를 하는 것이다.
덕분에 사기가 충만해진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 적을 픽픽 쓰러뜨리는 거지.
덤으로 적군은 '전설의 장군이 되살아났다!' 면서 기세가 팍 죽고.
“아무튼 여기가 이 정도이니, 카엘 님의 고향, 놋지빌이랬나요? 거긴 더 힘들 거에요. 내일 신전에 가자마자 사제를 보내야겠네…….”
공주는 한숨을 쉬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알게 된 건데, 우리 마을 남자들의 체구는 장난이 아니게 큰 편이었다.
즉,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고향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다. 나는 평균이었다!!
……뭐, 그래도 내가 좀 비실한 편이긴 하지만.
그리고 또 하나, 역시 이건 나 혼자선 불가능한 여행이었다.
좋지 않은 난리를 피우며 동행한 거긴 하지만, 메린과 같이 온 건 신의 뜻인지도 모른다.
“아, 그러고보니…… 두 분, 떠나는 길이 너무 조용했었죠? 이제 와서 제가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좀 쓸쓸하셨겠어요.”
“예?”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몰라 의아해하는 우리를 향해, 공주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원래는 환송식을 받으셨어야 하는데……. 전날 분위기도 그렇고, 어차피 서둘러야 하니까, 또 저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잘 됐다 싶었는데……. 그래도 역시, 죄송해요.”
“아아…….”
난 또, 뭔 얘기라고.
죄책감 때문인지 약간 시무룩해하는 공주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진짜 진심으로 괜찮습니다. 아버지와 인사 충분히 했거든요.”
“그래도 친구분들이나, 또…… 촌장님에게 축복을 받으셨어야 하는데…….”
“됐어요, 그런 거.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별로 없고, 딱히 아쉬운 사람도 없고…… 주목받는 것도 싫고요.”
메린도 별 생각은 없을 거다.
그래도 본인이 직접 말하는 게 낫지.
메린을 힐끗 쳐다보자,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나? 나도 뭐, 딱히? 사범님과 인사도 했고, 마지막 대련도 했고…….”
……이 자식, 지금 뭐? 대련?!
“너 그 뒤에 대련했어?! 아니, 한바탕 싸워 놓고, 그 다음날 새벽에 출발해야 되는데 대련을 또 해?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어쩐지 햇빛을 얼굴에 마구 쏴대도 안 깨어나더라.
젠장, 어디 아픈 줄 알고 좀 걱정했는데.
내 걱정 물어내!
녀석은 허탈해하는 내 속도 모르고,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범님이 간곡히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
“아니, 그 양반은 정작 무투회 때는 안 싸우고 기권하더니 또 왜…….”
그 무투회는 좀 정상적인 게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맘 편히 겨루고 싶었던 건가?
심정을 모르겠네.
아무튼 공주가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 놈의 마을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라고 할까…… 이번에 좀 큰 실망을 했다고 할까?
그래서 섭섭하거나 쓸쓸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공주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럼 다행이고요. 어쨌든 오늘은 푹 쉬세요. 어쩌면 내일 바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 맞다. 이 여관, 방마다 욕실이 있는데, 온수용 밸브가 시범 설치되어 있어요. 그…… 이렇게 돌리는 건데. 혹시 아시나요?”
공주가 무언가를 잡고 한쪽으로 돌리는 시늉을 했다.
당연히 그냥 봐선 알 턱이 없었다.
“뭐, 저도 그냥 보고 썼으니까 별 어려움 없을 거에요. 이번 시범 사업이 잘 되면 왕국 전역에 보급할 예정이라니까, 꼭 써 보시고 소감 알려주세요!”
절대 망가뜨리지 마시고요, 공주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
이상하네.
방금까지 별 생각없었는데, 공주가 저 말을 덧붙이니 갑자기 굉장히 불안해졌다.
나는 메린을 힐끗 보았다.
녀석은 음식에 온 관심을 쏟으며 열심히 접시를 비우고 있다.
……설마, 우리 둘 중에 누가 그 밸브라는 걸 망가뜨리는 건 아니겠지?
저녁 식사 후, 내일 모일 시간을 정하고 각자 방으로 올라갔다.
메린에게 밸브에 손대지 말자고 하려 했지만, 녀석은 그 말을 전할 새도 없이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으, 할 수 없지.
신의 가호를 비는 수밖에……!
하지만 불안한 건 불안한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 아니겠는가?
시범 설치한 물건이라면 왕국에서 여기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 아니야?
이건 반드시 기록해야지!!
나는 배낭에서 수첩을 꺼내 들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안엔 욕조와 용변기, 그리고 세면대가 있었다.
구석에는 커다란 물항아리가 있는데,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나무로 된 관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나무관에는 무언가 마개 같은 게 달려 있고, 나무관 바로 밑에는 커다란 나무 물통이 놓여 있다.
아, 이게 그 밸브라는 건가?
근데 어떻게 쓰는 건지 설명이 없네.
공주는 그냥 돌리면 된다고 하긴 했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둘러보니, 세면대 근처 벽에 양피지가 붙어 있었다.
“오, 설명서.”
어디 보자……
『위에 달린 마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물이 나오고, 왼쪽으로 돌리면 물이 안 나옵니다. 물은 펄펄 끓인 상태이니 데지 않게 조심하세요.』
“……부술 시 수리비로 금화 열 닢 청구할 것임.”
더럽게 비싸!! 금화 열 닢이면 양 다섯 마리잖아?!
으으, 그냥 찬물에 씻을까…….
…………
그러나 나는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후, 조심스럽게 마개를 돌렸다.
콸콸콸
오, 진짜 나온다. 정말 펄펄 끓인 물인지 김이 마구 솟아오르고 있다.
물통이 절반쯤 찼을 때, 밸브를 다시 조심스럽게 돌렸다.
정말로 뜨거운 물이 더 나오지 않았다.
“이야, 신기하네.”
수첩에 기록을 남긴 후, 욕조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마 물항아리가 여기 있는 건, 알아서 물 온도를 조절하라는 것이겠지.
적당히 온도를 맞추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히야~”
온 몸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정확한 원리는 몰라도, 이런 게 집집마다 설치된다면 확실히 편할 거다.
일반 가정용으로는 뜨거운 물이 안 나와도 될 테니 보급하기 더 쉽겠지.
특히 우리 마을 사람들은 굉장히 안전해질 것이다.
몬스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우르르 몰려가서 물을 뜨는데, 밸브가 있으면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지니까.
“……메린 녀석, 괜찮으려나.”
그 녀석, 힘이 세긴 해도 아무 생각없이 막 휘두르고 그런 애는 아니니까……
뭐, 설명서도 붙어 있으니까 별 문제없겠지.그림도 그려져 있고.
…………
불안하다!
결국 목욕을 마친 후, 메린을 찾아가 밸브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다행히 메린은 뜨거운 물 필요없다고 아예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래도 일단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신기하다며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간 뒤에도 손도 대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편안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휴, 괜히 불안해했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향에서 먼 곳까지 온 거라, 나도 모르게 예민해진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린 덕분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숙박비를 계산하는 중에 율리아 공주가 남몰래 주인에게 금화 열 닢을 건네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
쓸 줄 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감히 공주에게 그 사실을 재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물어보더라도 대답을 안 해줄 게 뻔하다.
나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그녀는 내가 자신을 본 줄도 모를 것이다.
메린이 내가 꼼지락거리는 걸 봤는지 힐끔 쳐다보았다.
“일기? 아침부터?”
“음, 작은 역사도 남겨둬야 하거든.”
빠르게 적은 후 수첩을 집어넣었다.
“자, 가죠! 요 앞이 바로 수도 미드랜드에요.”
공주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여관을 나섰다.
나 역시 태연한 얼굴로 메린을 데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