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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7화 (17/475)

〈 17화 〉 17화 : “선포식을 거행합니다”

* * *

수도까지 쭉 숲이 이어지는가 싶었는데, 예상외로 시야가 탁 트인 평원으로 나왔다.

그간 빽빽한 나무 그늘에 익숙해진 탓에 숲길을 빠져나올 때 굉장히 눈이 부셨다.

“조심하세요~ 여기서 많이들 낙마하시더라고요.”

공주가 느긋한 말투로 말하자마자 “으악!” 하며 말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참고로 난 아니다.

아무튼 그 탓에 다들 잠시 멈춰야 했고, 덕분에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와…….”

이렇게 탁 트인 평원을 보는 건 난생 처음이다.

불어오는 바람도 숲과 초원보다 확연히 세차다.

멋대로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뜨리는 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푸른 하늘과 맞닿은 녹색 바다를 보고 있으니, 왠지 상쾌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드넓은 평원보다도, 내 시선을 확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우와아.”

장관이다.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흰 성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마치 하얀 보석을 통째로 깎은 것처럼, 온통 새하얀 성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눈부셔서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다.

분명 저 성 때문에 여기서 낙마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거다.

“굉장하죠? 저게 왕성, 랜드스타랍니다. 맑은 날 밤, 특히 보름달 뜬 밤에는 훨씬 더 아름다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보세요!”

옆에서 공주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성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랜드스타. 지상의 별.

성을 완성한 후 걸맞은 이름을 지은 게 아니라, 이름에 걸맞게 성을 지은 게 아닐까 싶었다.

외벽 문 앞에 도착하자, 공주가 앞장서서 위병에게 본인의 신분을 밝혔다.

위병은 굉장히 허둥지둥해하며 우리를 통과시켰는데, 문을 지나는 동안 자꾸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설마 여기 있는 내내 이런 시선을 받아야 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외벽 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린 건지, 왕성으로 향하는 내내 사람들이 길가에 우르르 서서 우리 일행을 쳐다보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

우와, 팔이 벌써 굳었잖아, 이거!

이따가 말에서 못 내리는 거 아니야?

옆에서 공주가 작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후후, 엄청나게 긴장하셨네요. 아아, 맞다. 카엘 님, ‘주목받는 것은 싫다’고 하셨지요? 이런,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거라고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네~”

이 사람이 지금 약올리나…….

“……사람들이 모일 줄 알고 계셨나보네요.”

“그야 물론, 내가 모이라고 했으니까요. 반나절 전에 알린 것 치고는 많이 모였죠? 후후, 일반 시민들도 용사님의 존안(?)을 뵐 기회를 줘야지요.”

“……”

일부러 이런 짓을……?

반나절 전에 알렸다는 건, 어제 그런 지시를 내렸다는 거잖아?

그것도 내가 ‘주목받는 거 싫다’고 한 다음에?

사악해……!

아니, 대언자님이니까 실제론 사악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악해!

긴장과는 다른 의미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공주가 또 다시 속삭여왔다.

“……이럴 때는 말이죠. 저~기 성 꼭대기를 보는 거에요. 그렇다고 길에서 벗어나지 마시고요. 요지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거에요.”

“어어, 으, 네…….”

하지만 사람들이 길 근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보든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국 말의 뒤통수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공주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왕성, 되게 머네……!

한참 뒤, 공주가 서서히 말의 속도를 늦추는 것 같았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나는 기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대언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와, 갑옷이다.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긴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왕성 입구에 각기 모여 있었다.

공주가 말에서 내리는 걸 따라, 나도 쭈뼛쭈뼛 말에서 내렸다.

“다들 모여 있나요?”

공주는 이때까지 보였던 사근사근하고 밝은 모습이 아닌, 굉장히 위엄 있는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예.”

“좋습니다.”

공주는 뒤의 사제들을 향해 돌아섰다.

“피리온, 일린, 수련사제들을 데리고 먼저 돌아가라. 헬리는 내가 지시해둔 것, 잊지 말고 준비해두도록.”

“예. 알겠습니다.”

사제들이 왕성을 지나쳐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가는 것을 지켜본 후, 공주는 멀뚱히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생긋 웃었다.

“자, 두 분, 함께 가시지요. 모두 기다리고 있답니다.”

“……”

모두? 모두라니 또 누구?

하긴 용사 탄생을 선포한다고 했으니 또 모여 있겠지.

고개를 들고 성을 올려다보니, 가까이에서도 눈이 약간 아플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다.

하하, 성 크다.

설마 저 성 한가득 모여 있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 인파를 뚫고 들어가야 되는 건 더더욱 아니겠지?

……상상했더니 다리가 굳어버렸다.

가다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질 거 같은데.

콕콕.

“……?”

메린이 내 어깨를 가볍게 찔렀다.

긴장감 따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눈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녀가 슬며시 다가와 속삭였다.

“긴장되냐? 손잡아줄까?”

“……시끄러.”

누굴 애 취급하고 있어.

……그래도 녀석이 시덥잖은 소리를 한 덕분에, 긴장이 약간 풀린 것 같았다.

그래, 뭐. 애도 아닌데.

설마 죽기야 하겠어?

나는 심호흡을 한 후, 공주를 따라 왕성 안으로 향했다.

“오오! 그대가 바로 용사인가!”

“히익?!”

홀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나게 큰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와, 심장 멎는 줄 알았네.

근데 어떻게 아신 거지? 저 앞에 있는 알현실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공주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아바마마도 연습하고 계시네요. 긴장하시나봐요.”

“……예에?!”

일국의 왕이? 긴장을 한다고?? 에엥???

그보다 저 앞에 문이 닫혀 있는데도 이 정도인데, 직접 들으면 귀 멀어버리는 거 아냐?

아니, 그보다 연습이라는 건 또 뭐야?

놀라는 나를 향해 공주가 키득 웃었다.

“어머, 국왕도 사람이라고요? 특히나 용사 선포식은 엄청나게 중요한 의식이에요.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죠. 귀족, 평민, 사제, 어쩌면 이 왕국 바깥에 사는 이종족들 전부 다 주목하고 있을 걸요~?”

“……”

아까 성 밖의 사람들 시선 받는 것도 거북했는데, 왕국 바깥 이종족들까지 다 지켜본다고?

어머, 세상에, 이걸 어떻게 버텨?!

“저게 그 샹들리에구나. 근데 저렇게 높이 있는데 어떻게 불을 켜지?”

“아, 저거요? 저건 빛을 받으면 환하게 빛나는 수정으로 되어 있어서 따로 불을 안 켜도 돼요. 창문으로 햇빛 들어오는 거 보이죠? 초승달 밤에도 문제없답니다.”

“그럼 흐린 날 같은 때는……?"

“그때는 이렇~게 긴 막대 같은 걸로 저기 주변 초에 불을 붙여요. 그러면……”

“……”

이야, 대단해.

메린 녀석, 주위 경비병들이 엄숙하게 지켜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주와 재잘거리고 있다.

가끔은 이 녀석의 이 눈치 없는 성격이 부럽다.

반면에 나는, 긴장 때문에 다리가 뻣뻣해져서 제대로 걷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곳곳에서 경비병들이 엄청 무섭게 쳐다보고 있는데다, 지금 우리 세 사람 뒤에는 수많은 기사들과 사제들이 줄줄이 따라오고 있다.

여기서 어떻게 긴장을 안 해?

내가 왕족도 아니고!

……그리고 내 긴장은 알현실 안에 들어가서 정점에 달했다.

"……오, 신이시여."

공주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알현실 한 가득,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대부분이 귀족과 그 가족이겠지만, 중간중간에 사제복을 입은 사람도 보였다.

어린아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그 선포식이라는 걸 망칠까봐 들이지 않은 듯했다.

알현실 안쪽에는 계단이 몇 개 올려진 단이 있는데, 거기에 세 사람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딱 봐도 국왕, 왕비, 그리고 왕자(엄밀하게는 왕태자겠지)다.

공주가 우리 두 사람보다 앞서 걸어가다가, 나와 메린에게 슬쩍 멈추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혼자 몇 발짝 더 앞으로 가서 우아하게 인사했다.

“친애하는 국왕이여, 마침내 용사가 당도하였소이다. 지존자께서 선택하신 자임을 이 눈으로 확인하였으니, 국왕께서는 친히 일어나 맞이하시오!”

공주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 자리에는 '공주'가 아닌 '대언자'로서 행동하는 모양이다.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하자, 좌우의 왕비, 왕자도 그 뒤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근데 바로 시작하는 거야?!

뭔가 그, 개회 선포 이런 거 안 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공주가 내게 슬쩍 옆으로 오라고 눈짓했다.

뻣뻣한 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여 메린을 남겨두고 공주의 옆에 서니, 국왕이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오오! 그대가 바로 용사인가!”

……다행히 걱정했던 것만큼 귀가 아프진 않았다.

왕이 아직 오고 있는 동안, 공주에게만 들리도록 슬쩍 물어보았다.

“저기, 폐하가 오시면 꿇어야겠죠?”

“전혀요, 그냥 서 계시면 돼요.”

어, 진짜? 진짜겠지?

나는 공주를 믿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섰다.

그러나 왕이 내 앞에 점점 다가오자, 무릎을 꿇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샘솟았다.

왕은 아까 성문 앞에서 본 기사에도 지지 않게 굉장히 건장하고 키가 컸다.

왕이 내 손을 꽉 맞잡자, 굳은살이 잔뜩 배겨 있는 게 느껴졌다.

그보다, 아프다!

손 부숴질 거 같아!

“잘 와주었다, 용사여! 이 세계의 명운을 짊어진 자를 맞이하게 되어 기쁘도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평범한 청년이나, 그 또한 겉모습에 치중하지 말라는 창조주의 뜻일 터. 용사여,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카엘 에스트렐이라 합니다.”

“음, 강인한 이름이로다.”

“……”

강인하다고? 어디가?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졌다.

어릴 적 겨울축제에서, 겨울요정에게 선물을 받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구체적으로는,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겨울요정이 알고 보니 술집 주인아저씨가 변장한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같다.

그러고보니 공주가 연습 어쩌고 했었지…….

‘선포식’이니까 진행 순서야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아니 대사까지 다 짜져 있는 거냐고.

주위 시선들은 진짜일 테니 굉장히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그런 와중에 왕은 계속 말을 이었다.

“용사 카엘이여, 나 미드랜드의 통치자, 퓰리에스 디왈리가 청하노라. 부디 그 강고한 팔로 북의 대재앙을 물리치고 이 세계를 구해다오!”

“……”

왕이 내 손을 붙잡은 채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

손을 안 놓고, 무언가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응? 뭔가 말을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되지?

나는 공주를 흘깃 보았지만, 그녀는 위엄을 가장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 힌트도 주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나오는 대로 질러버려!

“……카엘 에스트렐, 국왕 폐하의 청을 받드옵니다. 비록 미력한 몸이나, 소인이 용사가 된 것은 분명 신의 뜻일지니, 존귀한 창조주께서 함께 하시리라 믿고 소임을 다하겠나이다!”

“오오! 역시 용사로구나, 실로 믿음직스럽도다!”

……하……

이거, 얼른 안 끝나려나……?

알현실에 들어서기 전까진 엄청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 긴장 대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다른 감정이 온 몸을 지배하고 있다.

국왕이 내 손을 놓고 몇 걸음 물러서자, 이번엔 공주가 내 앞에 서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 용사가 이 땅에 임했음을 선포할 때가 왔노라. 그대 용사여, 용사의 증표를 내게 주시오.”

증표?

뭔 증표?

공주가 내 허리춤을 향해 눈짓했다.

아, 검?

…………

엑, 이거 그냥 평범한 검인데?!

공주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검, 주세요.'

…………

……진짜 괜찮은 거겠지?

공주도 이게 그냥 검인 건 봤으니……

아, 몰라, 될 대로 돼라.

나는 허리춤의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 참,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짰구나.

“……허?”

공주에게 검을 내밀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히 아침에 찰 때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철검이었는데,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건 그때 휘둘렀던 그 성검이다.

……이것도 그, 각본인가?

검이 알아서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야?

공주는 성검을 받아 들고, 눈을 감고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알현실 가득 퍼지기 시작하며,찬란한 빛 속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물의 창조주, 만사의 지존자께서 명하신다. 이 시간, 여기 이곳에 용사와 그의 검이 당도하였으니, 너희 모든 지성 있는 필멸자들아, 옛 약속을 기억할지어다. 사명을 인지할지어다.”

빛에 감싸인 성검이 저절로 공주의 손을 떠나 공중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왕을 위시한 알현실의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나와 메린만 멀뚱히 서서 공중에 뜬 검을 올려다보았다.

공주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기쁨의 태양이 저물고 비탄의 밤이 도래(??)했도다. 필멸자들이여, 일어나 여명을 되찾으라! 겨울을 헤치고 나아가거라! 용사가 길을 인도하리라!”

공주의 말이 끝나자, 검이 공중에 우뚝 멈추더니 양쪽 창문을 향해 빛을 내뿜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검이 빛덩이로 변하더니 내 허리춤의 칼집으로 날아와 꽂혔다.

“……우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앵­ 대앵­

갑자기 바깥 저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지는 음색이었다.

“검의 빛을 받고 울리는 거에요. 왕국 바깥의 이종족들에게 알리는 거죠.”

공주는 그렇게 말하고서,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국왕을 향해 돌아섰다.

“이걸로 끝이에요. 그럼 폐하, 저는 용사님과 함께 신전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강녕하시길.”

그러자 갑자기 국왕이 벌떡 일어서더니 공주의 손을 잡았다.

“율리아, 어찌 그리 서두르느냐? 이렇게 온 가족이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용사도 있으니 함께 점심을……”

“온 가족은 무슨! 퍼시벌 오라버니는 어디 가시고 프레데릭 오라버니가 앉아 있는 건데요?! 피터 오라버니도 없고! 됐어요. 점심은 규례대로 여기 모인 사람들과 드시지요. 저는 갑니다.”

“아니, 그리 매정하게 굴지 말고……”

공주는 손을 내저으며 국왕의 말을 딱 잘랐다.

“아~ 아~ 한시가 급하거든요? 얼른 용사님 보내드려야 되거든요? 지극히 황송하오나 소녀는 바빠서 함께할 수가 없사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럼 이만.”

그리고는 나와 메린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채로 끌려가다시피 하는 내 뒤로, 국왕이 공주의 이름을 부르는 처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그…… 폐하가 거의 울고 계신 거 같은데…….”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올 때마다 저러시니까. 뭐, 관습 같은 거에요.”

“……”

이 나라, 괜찮은 건가?

안뜰 중앙에 나오고서야 공주는 우리의 손을 놓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 참, 사람도 많은데 호들갑 떠시긴. 아, 그래도 너무 나쁘게 보지 마세요. 여러분의 국왕 폐하는 갈아치우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분이 아니랍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보다 난 절대 저런 생각 안 했다. 정말이다.

“어…… 그럼 이제 다 끝났나요? 드래곤 퇴치하러 가면 되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단 저와 함께 신전으로 가셔야 해요.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드래곤 퇴치는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에요. 그 외에도 이것저것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자, 저를 따라오세요.”

공주를 따라 안뜰을 지나, 어느 통로로 들어가 긴 복도를 따라가니, 어느새 예배당으로 들어와 있었다.

몇몇 사제들이 그녀를 보고 꾸벅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공주는 예배당의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또 복도를 걷고,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던 공주는, 지하의 커다란 공간에 들어선 후에야 겨우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두 팔을 벌리며 생긋 웃었다.

“카엘 님, 메린, 교단의 본산, 지하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발랄한 그녀의 목소리가 거대한 홀 안에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게 무슨 신호였는지, 사제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한 줄로 죽 서서 우리를 향해 몸을 굽혔다.

“……”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한 줄로 서서 거의 절을 하고 있는 사제들, 안쪽에 있는 거대한 제단, 그리고 홀 중앙에 서서 생긋 웃고 있는 대언자 겸 최고사제…….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그것도 굉장히 최근에 본 장면과 비슷한 것 같다.

다른 거라고는 여기가 지하라는 것밖에 없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미리 짰어요?”

“아니거든요?!”

발끈한 그녀의 목소리가 홀 안에 메아리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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