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화 : 역사, 사명, 그리고……밀지 마요!
* * *
율리아 공주는 돌발 환영인사를 마친 후, 곧바로 커다란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길다란 테이블 위에는 지도와 여러 문서들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고, 헬리 사제가회의실 한쪽 벽에 서서어딘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 안을 안내해드리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으니 그냥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공주는 흠흠,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두 분, 아니 카엘 님, 북의 대재앙, 아트라토스에 대해선 얼마나 아시는지요?”
나는 팔짱을 끼었다.
“어어, 그러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아주 멀고 먼 옛날, 하늘에서 추방된 드래곤이 지상에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참다 못한 대륙의 모든 지성체들이 들고 일어나 드래곤을 북쪽 산으로 쫓아냈는데, 또 날뛸까봐 다섯 명의 영웅과 최초의 대언자가 아예 봉인을 시켜버렸다.
그 다섯 영웅 중의 하나가 우리 왕국의 시조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공주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의외로 잘 아시네요? 역사책 읽으셨나봐요?”
“예에, 뭐……. 예배 때는 별 이야기를 못 들어서요.”
……그러고보니 그것도 이상했네.
드래곤 토벌은 천지창조 다음으로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때는 그냥 사람들이 하도 들어서 질려서 그러는 줄 알았지.
누가 사제님이 악마라서 그런 줄 알았겠어?
“그럴 것 같았어요. 카엘 님이 하신 이야기 중에 딱 하나 틀린 게 있거든요.”
“틀린 거라니요?”
공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트라토스, 그러니까 드래곤을 북쪽 산으로 쫓아낸 적은 없어요. 그냥 봉인하고 북쪽 산에 가져다 놓은 거지. 애초에 북쪽 산에 갖다 놓은 것도, 제비뽑기에 져서 그런 거고요.”
“……웬 제비뽑기?”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에요. ……사실, 드래곤을 누구 동네에 봉인할지 의견 다툼이 꽤 심했었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는데, 우리 인간이 짜잔~ 하고 당첨된 거에요.”
“……”
이거 참……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아아, 그래서,
“……그래서 몬스터가 인간 왕국에 몰렸군요?”
“맞아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 씁쓸해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봉인됐다고는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원래도 강한 생명체인데, 천상에서 추방되어 생겨난 드래곤이니 그 위세가 어디 가겠어요? 덕분에 별별 몬스터들이 다들 이쪽으로 몰려왔고, 자연히 인간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죠.”
역사책에 의하면, 본래 이 대륙 중앙에는 인간이 세운 나라가 여럿 있었다.
이 나라들은 서로 싸우고 연합하고, 같이 운동경기도 하는 등 떠들썩하게 지냈다.
그러나 드래곤이 북쪽 산에 봉인된 후, 전 대륙에 퍼져 있던 각종 몬스터들이 대륙 중앙으로 몰려들어왔다.
그 탓에 나라들이 하나, 둘 멸망했고, 결국 남은 건 우리가 있는 이 왕국 단 하나뿐이다.
……이 왕국의 이름마저 잊혀질 정도로, 오래된 옛날 이야기이다.
공주는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게 가장 최근에 완성된 지도에요. 보시는 것처럼, 왕국의 규모가 매우 작지요. 이곳 미드랜드를 중심으로, 20km 정도 범위는 몬스터의 위협이 없다고 보시면 돼요.
“우와, 그것밖에 안 돼요?”
“저도 더 넓히고 싶긴 한데, 인재가 부족해서……. 이번에 드래곤을 처리하면 좀더 형편이 나아지겠죠.”
공주는 한숨을 쉰 후, 테이블 위의 다른 종이를 스윽 내밀었다.
장식체로 수려하게 적힌 양피지였는데, 중간에 커다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메린은 그 종이를 보자마자 어지러워하며 바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고대의 다섯 영웅은 각각 자신의 무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들은 드래곤을 봉인한 후, 후손 대대로 이어질 맹약을 맺었지요. 설사 이행을 거절할지언정, 절대로 파기할 수 없는 맹약을.”
내 눈길이 양피지 위를 따라 움직이는 공주의 손을 따라갔다.
그녀의 손은 양피지 중간에 그려져 있는 문양, 커다랗게 빛나는 별을 날개 한 쌍이 위아래로 감싼 듯한 그 문양에 멈추었다.
자연히 그 문양 가장자리에 적힌 이름들과, 문양 아래에 적힌 선언문을 읽게 되었다.
“……마일린의 딸들, 루 메호, 올레이스, 바위 궁전, 탈타니스. 여기 다섯 나라, 다섯 종족은 아트라토스를 영원히 적대할 것을 맹세하며, 이를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들인데.
율리아 공주는 문양 바깥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입을 열었다.
“올레이스는 이 왕국의 이름이에요. ……인간의 나라는 여기 하나밖에 안 남은 지 오래니 다들 잊어버렸지요. 이외에는 차례대로, 마녀, 엘프, 드워프, 그리고 인어의 나라랍니다.”
“인어……요?”
“네, 인어. 인간 모습을 한 물고기 종족이라 생각하시면 돼요. 뭐~ 개중엔 집게도 있고, 문어도 있지만.”
……문어?
문어라면 그, 뱀 꼬리 같이 생긴 다리가 여럿 달린, 그거……?
거기에 인간 모습이라고?
……상상이 안 되는데.
그보다 여기가 '올레이스'이고, 이 맹약서를 지금 나한테 내민다는 건……
“카엘 님은 이제부터 다른 네 군데를 방문하셔야 해요. 이걸 각 장소 책임자에게 보여주고, 드래곤 퇴치 협력을 구하시면 됩니다.”
……그럴 줄 알았지.
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근데 어떤 협력을 받아야 되죠?”
“당연히 사람이죠. 말씀드렸잖아요? 드래곤 퇴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그게 안 되면 적어도 자원이라도 줘야 해요. 물론 정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협력을 거절할 수 있긴 하지만, 자존심에 아주 큰 손상을 입을걸요.”
그리고 애초에 그럴 가능성이 적은 무리들이 맺은 맹약이라 덧붙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각각의 위치는 여기 지도에 나와 있어요. 마일린의 딸들, 속칭 ‘마녀의 숲’은 여기 동쪽에 있고, '바위 궁전'은 서쪽 산맥, '루 메호'는 그 산맥 너머의 서쪽 숲, 그리고 마지막 '탈타니스'는…… 여기, 북동쪽 섬에 위치가 적혀 있어요.”
마지막이 이상한데.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위치가 적혀 있다고?
그럼 그 섬에 갔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가야 할 수도 있겠네?
아이고…….
“그…… 찾아가는 순서는 상관없죠?”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다행이다!
최소한 동서 왕복은 안 해도 되겠네. 가까운 곳부터 가야지.
“아, 탈타니스의 위치를 알려면 특별한 마법이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그거 감안하셔야 할 거에요.”
“……”
제길, 서쪽부터 가야 되겠네.
엘프들은 분명 마법을 쓸 수 있을 테니까 먼저 그쪽 동네들부터 가고, 그 다음 동쪽을 들러야겠군.
처음부터 산을 타야 되다니, 좀 센데?
그렇게 계획을 짜고 있는데, 공주가 지도에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찍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마녀의 숲'을 먼저 가는 게 좋을 거에요. 미드랜드에서 제일 가까우니까 종소리도 제일 먼저 들었을 거에요. 그리고 마녀들은 마법에 뛰어나니까, 누구 한 명 지원받을 수 있다면 이후 여행이 좀 수월해질 거고요.”
“……”
굉장히 타당한 이유였기 때문에,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마법’이 뭔지 모르니 '마녀의 숲'을 간 다음 바로 북동쪽 섬으로 갈 수도 없잖아.
젠장, 결국 동서 왕복해야 돼……!
속으로 절규하는 동안, 공주가 회의실 벽에 서 있는 헬리 사제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녀가 바깥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어떤 소녀와 함께 돌아왔다.
품이 큰 사제복을 입은 소녀는 잿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와 메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주가 그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자, 소녀는 겸연쩍은 듯이 뺨을 약간 붉혔다.
“맹약에 따라, 올레이스가 용사에게 힘을 보탭니다. 이 아이를 데려가세요. 이래 봬도 정식 전투사제니까 여러분의 여정에 창조주의 빛을 비출 거에요.”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어린애인데, 정식 사제라니.
그것도 전투사제……
전투사제라면 지난번에 본 그, 무기 휙휙 휘둘러서 몬스터 팔다리 분쇄시키는 그 보직?!
경악에 빠져 있는 나를 향해, 소녀가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처, 처음뵙겠습니다, 용사님! 지, 지난주에 전투사제로 서품받은 로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진짜 이 자그마한 체구의 아이가 둔기를 막 휘두르는 거야?
괴리감 장난 아닌데…….
“로나는이 날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아이에요. 실력은 제가 보증하니 염려 붙들어 매세요.”
이 날을 위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공주에게 물었다.
“용사에 대한 예언은 대강 일주일 전에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일주일 동안 특훈이라도 받은 겁니까?”
재능이 보이는 아이에게 바로 서품을 내리고, 일주일 동안 맹훈련을 했다……든가?
공주는 내 질문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미소였다.
“……맞아요.
북의 대재앙이 마침내 속박의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며 깊은 어둠의 장막이 드리우리라.
아아, 그대, 지상에 강림한 빛이여, 그 손으로 새벽을 일깨우라.
그대는 지존자의 칼날이요, 대재앙의 심판자이니.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약속을 들고 나아가라.
……이런 예언이었죠.”
지극히 예언다운 예언이다.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구절로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예언이 있기 전에도 드래곤은 있었지요. 그리고 잊으신 건 아니죠? 저는 대언자랍니다. 제 삶이 끝나기 전에 봉인이 풀릴 거라는 계시가 있었어요.”
……그렇구나.
날짜는 불확실해도,드래곤의 봉인은 반드시 풀릴 것이니로나를 미리 준비시킨 거야.
생각보다 그게 빨랐던 것뿐인 거지.
역시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을 받은 사람은 무언가 다르구나.
미래에 대한 계시를 직접 받다니.
게다가 율리아 공주는왕족이니까, 왕성에 어느 정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다.
……혹시 그 때문에 공주를 대언자로 만드신 건가?
이것도 신의 섭리, 뭐 그런 거야?
“자! 그럼 필요한 설명도 마쳤고 인사도 나눴으니, 후딱 출발하시죠.”
“……출발? 네? 지금 바로요?!”
“네, 지금 바로! 한시가 급하다고 했잖아요? 자자, 출발~ 출발~”
갑자기 공주가 바깥으로 내 등을 밀기 시작했다!
버티려고 해봤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공주의 손에서 메린과는 다른 느낌의 힘이 마구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아아아, 쭉쭉 밀린다아아!
“아니아니아니아니, 잠깐만요! 질의응답 안 해요?!”
“안 해요~ 이번 임무에 대해 궁금한 건 로나에게 물어보시면 돼요~”
우와, 이 사람, 보기보다 더 강압적이야!
이래도 되는 거야?!
신이시여, 당신이 택한 사람인데, 뭐라고 한 마디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공주에게 등 떠밀리며 바깥으로 나가는 우리의 뒤로, 로나 사제가 자신의 짐인 듯한 배낭을 매고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었다.
그 두 손에는 소녀의 몸 절반쯤 되는 크기의 철구가 달린 철퇴가 들려 있었다.
엑, 저런 거 휘두르는 거야?
아아앗, 당황하는 사이에 페이스가아아아!!
……그렇게 떠밀려서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아아, 맞다. 각 대표에게 협력을 받았다면 여기여기, 문양에 적힌 이름에 꼭 도장 받으셔야 돼요! 이렇게요!”
공주는 맹약서에 인을 찍고는 지도와 함께 내 손에 쥐어 준 후,
“그럼 부디 몸 조심하시고, 사명을 완수하시길! 로나를 잘 부탁드려요!”
우리를 향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고, 다시 계단 아래로 쏙 사라져버렸다.
“……”
이거……
그러니까……
“우리 쫓겨난 거냐?”
“……그런 거 같지?”
나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거 많았는데,지들 할 말만 하고 휙 내보내?
쯧. 드래곤이고 뭐고 그냥 확 토껴버릴까.
심지어 밥도 안 줬어!
“저, 저기!”
로나 사제가 어딘지 안절부절한 얼굴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이, 일단 마구간 쪽으로 가시면…… 그…… 말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응? 말? 아~ 뭔가 이것저것 준비가 되어 있나보네……요?”
휴, 하마터면 건방지게 반말할 뻔했네.
어린애라도 상대가 사제라면, 그에 걸맞게 예를 갖추어야 한다.
……특히나 저렇게 큰 철퇴를 들고 있다면 더더욱.
“아, 네. 그…… 아마 두 분 짐도 말에 실려 있을 거에요. 아마 방향이…… 저쪽……일 거에요. 제,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뻣뻣한 발걸음으로 앞서 걷는 로나 사제를 따라, 우리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봐도 엄청 긴장하고 있는 게 팍팍 느껴지고 있다.
하긴 나나 메린이나 얼마 안 됐긴 해도 성인식을 마친 어른이니, 긴장도 되겠지.
좋아. 어른인 내가, 어른답게 긴장을 풀어주자!
일단은 제대로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낫겠지?
“흠흠, 저, 로나 사제님.”
“네, 네에?!”
……방금 한 1m는 튀어오른 것 같은데?
어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낯을 많이 가리는 성품인 모양이다.
나는 되도록, 최대한 방긋 웃으며 말했다.
“모처럼이니 다시 인사할게요. 저는,”
“저, 저기, 용사님!”
막 이름을 말하려는데, 로나 사제가 말을 끊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해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흔들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그냥 ‘로나’라고 불러주세요. 존댓말도 안 하셔도 돼요! 편하게, 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어어……”
……저렇게 철퇴를 꽉 쥐고 말하고 있는데, 혹시 시험해보려고 던지는 말인 건 아니겠지?
나는 바닥을 보고 있는 로나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수줍은 듯이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작은 소녀는, 긴장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서도 어딘지 설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구나.
그럼 뭐, 안 들어줄 이유는 없지.
“……로나, 모처럼이니 다시 인사할게……요. 난 카엘 에스트렐. 앞으로 잘 부탁해……요.”
하하, 참 신기한 현상이야.
분명 머리에선 편한 말투로 말을 짰는데, 혀가 멋대로 존댓말로 끝내다니 말야.
저 철퇴 저거, 효과 좋은 예절 주입기인걸?
그래도 호칭은 바람대로 해줄 수 있었다.
반면, 메린은 전혀 거리낌없는지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난 메린 소더. 잘 부탁해, 로나.”
로나가 약간 동그랗게 뜬 눈을 몇 번 깜박이고,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얼굴 가득, 환한 웃음꽃을 피웠다.
“……네! 잘 부탁드려요!”
저 하늘에 뜬 햇살처럼, 눈부시게 밝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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