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8화 : 친절한 마녀님 (2)
* * *
따끈한 차와 달콤한 과자 덕분에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는 한참 남아 있다.
이대로 밤까지 집에서 쉬는 것도 좋지만……
우리 방을 준비해야 하는 오…… 뭐였더라?
아무튼 그 사람에게 일거리만 더 늘리는 꼴만 될 것이다.
그래서 시간도 때울 겸, 나는 드와트에게 요 주변이라도 구경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어머? 피곤할 줄 알았는데. 역시 젊은 만큼 기운이 넘치는구나?”
“차를 마신 덕분에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후후, 신경 써서 준비한 보람이 있네. 그 차, 피로회복엔 그만이거든.”
기쁜 듯이 웃던 드와트는 곧 약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볼일이 있어서 다시 나가봐야 하는데……."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저희끼리 둘러보면 돼요."
"어머, 무슨 소리 하는 거니? 귀한 손님을 그렇게 내팽개칠 수는 없지! 그리고, 너희 아직 여기 주변 잘 모르잖아? 길을 잃으면 어쩌려고 그래."
드와트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내 묘수가 떠올랐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 마침 딱 맞는 사람이 하나 있었지! 위슨에게 부탁하러 가자. 너희도 비슷한 나이대인 사람과 다니는 게 훨씬 편할 거고. 그 파랑새가 조금 많이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위슨은 좋은 아이니까 참아줘.”
……역시 드와트도 그 파랑새는 영 불편한 듯했다.
그 마음 알지. 응응.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됐구나. 지금 갈 거지?”
찻잔 정리를 오베이에게 맡기고, 드와트는 우리를 데리고 위슨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여기 지리를 좀 익히는 게 좋을 거라며, 몸소 걷기 시작했다.
여기, 마녀들의 지상거주지는 드문드문 나무가 자라 있긴 해도 거진 초원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길이 있긴 있었다.
……풀이 좀 덜 자라거나 누워 있는 것도 길이라고 할 수 있다면.
드와트는 그 되다 만 길을 죽 따라가고 있었다.
“주문을 외울 수 있는 마녀는 다들 공간마법을 써서 다니거든. 마녀의 발이 대지를 거니는 건 숲 속을 다닐 때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도 길이 있긴 있네요?”
“'마녀의 조수'들을 위한 거야. 아니, 그 아이들이 만들었다고 해야 되겠구나. 따로 가르치지 않았는데, 알아서 같은 길로 다니지 뭐니? 참 신기해.”
마녀의 조수……?
아, 그러고보니 그 오베 어쩌고 하는 사람을 소개할 때 ‘조수’라고 했었지.
다른 마녀들도 그런 조수를 한 명씩은 데리고 있나 보다.
문득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궁금해졌다.
물어봐도 되나?
“……오베이 님이랑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내가 아직 망설이는 와중에 로나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로나도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졌던 듯했다.
그런데……어딘지 조금 딱딱한 말투였다.
드와트는 고개만 살짝 돌려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내가 돌봐주었단다. 정말 고맙게도, 훌륭히 커서도 내 곁에 머물러주고 있지.”
"오베이 님의 부모님이 찾지 않았나봐요?"
"시간이 지나도 찾으러 오지 않더구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요즘 바깥은 몬스터들 때문에 힘들잖니?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로나 쟤가 웬일이지? 저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로나의 표정은 여전히 밝고, 이상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음,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해진 건가?
“오베이 님도 부모님을 찾지 않았나봐요? 아, 혹시 아기였었나요?"
"물론 아니야. 대여섯 살 정도였을까? 글쎄, 잘 모르지만 너보다는 어렸을 거야."
"그럼 부모님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여기 쭉 남았다니드와트 님이 굉장히 잘 대해주셨나 봐요!
아니면,돌아갈 곳이 없었던 걸까요?"
"로나……?"
나나 메린에게도, 위슨에게도, 하다못해 호숫가에 있던 그 낚시꾼 아저씨한테도 이렇게 개인 사정을 캐묻지 않았는데.
그런 로나가 지금, 이상하리만치 드와트와 오베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아니,심문하고 있었다.
말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집주인의 사정을 지나치게 파고드는 건, 손님으로서 해선 안 되는 짓이다.
그러나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로나가 멋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앗, 죄송해요. 저는 갓난아기일 때 숲에 버려져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왠지 남일 같지 않아서, 헤헤."
"……"
정말로 그 이유 때문이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왠지 지금은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후후, 그랬구나. 괜찮아, 어린아이는 묻는 걸 좋아하는 법이니까. 그러면서 물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얻지."
"……"
"물론, 지금 건 대답해줄 수 있어. 부모님을 찾지도 않고, 또 여기 쭉 머물기로 한 건 그 아이 자신의 의지였단다."
"와아, 드와트 님이 굉장히 잘 대해주셨나봐요!"
"물론 잘 대해주었고 말고. 난 그 아이를 사랑하거든. 그 아이도 나를 사랑하고. 내 입으로 얘기하니 왠지 부끄럽구나.”
드와트는 정말 쑥스러운 듯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로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죠. 창조주님께서도 기뻐하신답니다. 저도 좋아하고요. 보기 힘든 만큼 가치가 크거든요.”
“어머? 아직 어린 아가씨가 꿈이 없구나?”
“제가 있던 지하 신전은 수도에 있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거든요.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많이들 뒤늦게 사랑을 찾고,배우자를 버리고 연인과 함께 도망가더군요. 아니면몰래 다른 연인을 만들거나. 정말 한탄스럽다니까요.”
로나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표정 역시 활짝 웃고 있다.
그러나, 웬걸.
그녀의 두 잿빛 눈동자 속엔 서늘한 칼날이 가득 담겨 있었다.
“……후후, 어린 아가씨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드와트의 어조도 약간 냉기를 띄고 있는 것 같았다.
“사제로서 격려해드리고 싶어서요! 사랑을 지키는 게 이렇게 무척 어렵잖아요? 저, 매일 드와트 님을 위해 기도할게요!”
“어머, 나만? 오베이를 위해서는 안 할 거니?”
“네.안 할 거에요.”
로나는 배시시 웃었다.
“기도도 안 하고, 관여도 안 할 거에요. 원하신다면 아예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대하도록 하죠."
"어머……"
"그러니,"
로나의 눈초리가 더 매서워졌다.
확연히 드와트를 쏘아보면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그만큼드와트 님이 더 많이 노력해주세요. 사랑이 절대로 어그러지지 않도록.”
“……후후. 재미있는 사제님이시네.”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한겨울의 거센 눈보라가 마구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위슨의 집에 도착했다.
위슨의 집은 드와트의 집보다 더 작고 오래되어 보였다.
어지간히 다른 마녀들과 떨어져 살고 싶은 건지, 거의 숲 코앞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구석진 곳에 있었다.
드와트는 집 문을 두드리려다, “어머” 하면서 손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표시해둬야 하는 걸 깜빡했네. 미안해, 나도 손님을 맞은 건 오랜만이라서.”
“표시? 아, 이 팔찌 말인가요?”
나는 아직도 팔목에 차고 있는 검은색 린넨 팔찌를 가리켰다.
파랑새는 이 팔찌가 흑단나무 안에 있을 때만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나무 바깥으로 나온 뒤에도 왠지 팔찌를 떼기 싫어서 계속 차고 있었다.
드와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부엉이탑 손님용이라서 바깥에선 안 통할 거야. 너와 두 아가씨가 내 손님이라는 표시를 따로 해야 돼……. 잠깐만 가만히 있으렴.”
드와트는 먼저 메린과 로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 다음, 내 머리에도 손을 올리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음, 왠지 신전에서 축복 기도를 받는 느낌이다.
찌릿.
……응?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났는데…….
“좋아, 다 됐다.”
그녀의 손이 머리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그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은 제법 오래 남았다.
나는 다른 두 사람을 힐끗 보았지만, 두 사람은 별 느낌 없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냥 내 착각인가?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동안, 드와트는 위슨의 집 문을 두드렸다.
곧 쿵쿵 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화 삽화에 나올 법한 매부리코 여자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뭐야, 재수덩어리 드와트잖아. 왜 또 왔어?”
“위슨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집에 있지?”
“없는데.”
그러나 나는 봤다.
매부리코 마녀의 뒤에서 파랑새가 우릴 향해 날개를 흔드는 걸 봤다!
드와트도 이 마녀의 말은 전혀 믿지 않는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나 대신 내 손님들에게 마을 구경 좀 시켜줬으면 해. 저녁 식사는 우리집에서 할 거니까 그건 신경 안 써도 되고.”
“내 알 바 아냐! 위슨 없다고 했잖아!”
“위슨! 그럼 부탁할게!”
그녀는 열린 문 안쪽을 향해 크게 외친 후, 돌아서서 척척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다, “아, 맞다,”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이 다시 몸을 돌렸다.
“식사 때 무슨 구경을 했는지 물어볼 거야.……폴레, 알아서 잘 처신할 거라 믿어.”
“……!”
드와트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매부리코 마녀는 무슨 위협이라도 받은 것처럼 몸을 바짝 움츠리더니 집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문도 쾅 닫아버리고.
“그럼, 손님들,”
드와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시간 보내. 이따 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