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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9화 (29/475)

〈 29화 〉 29화 : 고치 속 애벌레 (1)

* * *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

바깥에 멀뚱히 서 있는 게 민망하긴 한데, 남의 집에 그냥 들어가는 것도 좀 주저된다.

문이야 뭐, 손잡이 돌리면 열리겠지만…… 이거 그냥 들어가도 되는 건가?

그리고 내가 어물쩡거리는 사이에 메린이 태연하게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위슨~ 어딨어~?”

느긋하게 위슨을 찾기까지 하고 있다.

……대담하다고 칭찬해야 하나?

“……”

“……”

서로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로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 역시 나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어음…… 들어가자.”

“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주춤주춤 들어섰다.

복도에 들어가자마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꾹 닫힌 문이 보였다.

그 외에도 입구 양쪽에 아치 문이 달려 있는데, 그 어느 쪽에도 위슨이나 메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왼쪽은 어두워서 안이 전혀 안 보이고.

메린 이 녀석, 그새 어디 간 거지?

“……?”

왼쪽에서 무언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조심스럽게 아치 문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봤을 때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와 보니 손바닥 만한 창문으로 햇빛 한 줌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진열장밖에 없었다.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자루, 나무상자들이 진열장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데, 내용물을 살피기엔 조명이 너무 부족했다.

왠지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여긴 마녀의 창고다.

어디서 갑자기 이상한 게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야기소리는 창고 맨 안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희미한 빛줄기 하나가 밝혀주는 길을 조심조심 나아가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왠지 긴장되는데, 이거.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오, 이거 맨드레이크네요! 와, 말린 영지버섯도 있네!”

“……”

쟤는 뭔 애가 겁이 하나도 없네.

사제라서 그런가?

창고의 맨 안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이야기소리가 점점 커지며, 무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이 이 안쪽에 있나……?

물컹.

“……”

발을 딛었는데, 뭔가, 음, 발 밑에 뭔가 느껴졌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발을 도로 떼는 것도, 그냥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카엘 님? 왜 그러세요?”

뒤에서 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열장들 때문에 길 폭이 좁아서, 로나에게 내 대신 발 밑을 봐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무, 뭔가 밟은 것 같아서.”

“……? 아아,”

허리 쪽에서 기척이 느껴지며, 로나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거 숲해파리 같은데요?”

해파리……? 뭐야, 그게.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어쨌든 로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위험한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안도하며 발을 뗀 다음, 방향을 틀어서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자 물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무언가 얼굴에 찰박 붙었다!

비릿한 냄새를 느끼자마자 등줄기가 바로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꺄아아아아아악!!”

……본의 아니게 한바탕 큰 소란을 피우고 말았다.

창고 맨 안쪽은 작업장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 앞에 화덕과 조리대가 설치되어 있고, 맞은편 벽의 진열장엔 효능을 알 수 없는 물약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위슨은 한창 조리대와 화덕 사이를 바삐 움직이며 무언가 만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뒤에 서서 그녀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메린은, 위슨의 파랑새와 함께 아직도 웃겨 죽겠다는 듯이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푸하하하하하! 슬라임 밟고 잔뜩 쫄아서 기집애 같은 소리를 냈어! 아하하하하!”

“히히하하하하! 내가 여태껏 살면서 그렇게 완벽한 꺄아악 소리는 처음 들었다! 야, 네 덕에 간만에 크게 웃는다, 진짜! 으하하하하!”

“……”

그리고 나는 구석 모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쭈그려 앉아 있다.

아…… 쪽팔려…… 당장이라도 사라지고 싶어…….

참고로 내가 밟은 그 숲해파리라는 것과 슬라임은, 저 파랑새 새끼가 작당을 하고 거기 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 짧은 다리로 그딴 사악한 함정을 파냐고.

메린 저 새끼도 진짜, 그걸 안 치우고 그대로 두고!

……하…… 다 나쁜 새끼들이야…….

“기, 기운 내세요, 카엘 님! 깜깜한 곳이었으니까 충분히 놀랄 수도 있죠!”

“……”

“저, 저도 아무 생각없이 슬라임 밟고 액체 맞으면 깜짝 놀라서 막 소리 지를 거에요! 그러니까 기운 내세요, 네?”

흑…… 역시 로나는 착해…….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며 패닉에 빠진 나를 부축해서 이 작업장 안까지 데려온 건 로나였다.

내 키의 반 밖에 안 되는 체구로 날 부축하며 그 깜깜한 방을 헤쳐온 것이다.

신기하게도 로나는 감이 좋은지, 아니면 사제라서 운이 따르는 건지 진열대나 벽에 부딪치는 일 없이 술술 다녔다.

마치 그 어두컴컴한 방이 훤히 다 보이는 것처럼.

……잠깐. 뭐가 좀 걸리는데?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이며, 스멀스멀, 의심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로나는 내가 밟은 게 뭔지 어떻게 안 거지?

그러고보니 얘, 내가 뭘 밟기 전에도 진열대에 있는 물건들을 알아보고 좋아했었단 말야?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썼건 그냥 태생이건 창고 안이 다 보였다는 건데……

아무리 진열장 사이가 딱 한 사람 통과할 공간밖에 없다고 해도……

……저 앞에 있는 게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로나 너, 아까 창고 안, 다 보였어?”

“네? 네에, 뭐……. 아까 어둡길래 눈앞을 밝혀 달라는 기도를 올렸지요.”

너 혼자 말이지?

……딱 걸렸어.

“……그럼 내 앞에 뭐가 있는지 다 보였겠네?”

“……”

“……그런데도 너 아무 말도 안 했고?”

“음…… 그러니까……”

로나가 내 눈을 피하며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사실 내가 그거 밟고 놀라길 기대한 거 아냐?!”

“………………네.”

“젠장! 다 한통속이야아아!!”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그야말로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컷 나를 비웃은 사악한 파랑새는 내 머리 위에 멋대로 앉아서 로나에게 재잘거리고, 메린은 위슨 근처에서 그녀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가목 열매, 페퍼민트, 꿀…… 이건 뭐야?”

메린이 조리대에 올려놓은 약초들 중, 꺾인 나뭇가지처럼 생긴 약초를 가리키며 위슨에게 물었다.

메린은 부모님의 얼굴은 모르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약초꾼이었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렇게 약초에 관심을 가지곤 했다.

그리고 이 간만에 보는 훈훈한 장면을 도와야 할 파랑새 새끼는, 제 할 일은 안 하고 로나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새를 보고 당황해하는 위슨 대신, 내가 대답해주었다.

“리코리스 뿌리 같은데…….”

도감에 그려져 있던 것보다 좀더 두껍고 색깔도 시커멓지만, 단내 섞인 이 기묘한 향은 분명히 리코리스 뿌리가 분명했다.

내 대답을 들은 위슨이 눈을 약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훗, 역시.

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약초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게? 향은 그런 거 같긴 한데.”

“여기 숲은 특이하다잖아……. 우리 동네 거랑은 좀 다르겠지…….”

그녀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냅둬…….”

창피함과 자괴감에서 약간 회복되어 양지로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냥 이 자세가 편해서 그런 것뿐이다.

절대 다리가 풀려서 못 일어나는 게 아니다.

메린은 조리대 위의 약초들을 다시 한번 쭉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전부 목 아플 때 쓰는 거네. 네 거야?”

위슨은 고개를 젓고, 작은 사발과 공이를 든 채 다시 파랑새를 돌아보았다.

이 놈의 새는 여전히 로나에게 떠드느라 그녀의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새꺄, 그만 떠들고 네 일이나 해.”

머리 위에 앉은 파랑새를 툭 쳤다.

녀석은 화들짝 놀라 짹짹 울며 위슨의 어깨로 날아가 앉았다.

“위슨 거는 아니고 목감기 걸린 마녀가 부탁한 거야. 오늘 만들어서 가져다주기로 했거든. 그리고 너 이 새끼, 두고 보자, 너 임마, 날 때릴 수 있는 건 위슨 뿐이라고, 이 나쁜 놈아!”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어졌는데, 뒷말은 나한테 하는 얘기겠지?

하! 손바닥 만한 새가 위협해봤자지.

“어이구, 무서워라. 그러게 누가 농땡이 피우랬냐?”

“웃어? 오냐, 간만에 큰 웃음 주길래 봐주려고 했는데, 내가 조만간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소리의 정령한테 까불면 어찌되는지 똑똑히 가르쳐주지!”

나는 콧방귀를 뀌어주었다.

저 놈 주둥아리는 정신적으로 아프지, 물리적으로는 별로 아프지 않다.

겁낼 이유 따위 전혀 없었다.

위슨이 리코리스 뿌리를 갈아 솥에 넣고 마저 끓이기 시작할 때, 갑자기 매부리코 마녀가 작업장 안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멀었냐?”

“한 번 끓이기만 하면 끝이니까 저리 꺼져!”

파랑새가 마녀를 보자마자 소리를 빽 질렀다!

위슨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새를 보았다.

“입 닥쳐, 날벌레 자식아!! 위슨! 교육 제대로 시키라고 했을 텐데!”

“교육이 필요한 건 너다, 미친 마녀야! 지저분한 면상 치우라는 말도 못 알아먹냐!”

우와, 드디어 저 새가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긴 했는데 너무 빨리 왔어!

화가 머리 끝까지 날 대로 난 매부리코 마녀와 파랑새 사이에 험악한 말이 마구 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낀 위슨만, 가엾게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남의 집 사정에 껴드는 건 좀 그렇지만, 눈앞에서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는 걸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파랑새의 주둥이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어, 그, 네, 금방 끝나나 봅니다.”

“넌 또 뭐야, 개뼈다귀 같이 생겨선! 너한테 안 물어봤으니 끼어들지 마!”

개뼈다귀…….

매부리코 마녀는 다시 위슨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빽 질렀다.

“얼마나 남았냐고 묻잖아, 위슨!!”

위슨은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손가락을 퉁겼다.

내 손에 붙들려 있던 파랑새가 사라지고, 위슨의 머리 위에 글자가 피어올랐다.

[30분 정도 끓이면 끝나요.]

“······흥! 굼벵이 같으니라고. 다 끝나는 대로 출발해라! 해지기 전에 꼭 돌아오고!”

매부리코 마녀는 사납게 말을 내뱉고, 불쑥 나타났던 것처럼 홱 사라졌다.

“……”

어색한 침묵이 작업장 안에 깔렸다.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무겁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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