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30화 : 고치 속 애벌레 (2)
* * *
폭풍 뒤의 고요.
지금 상태를 표현하기엔 이 말이 딱 맞을 것 같다.
무한 긍정인 로나도, 그리고 눈치 하나 없는 메린까지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국자 휘젓는 소리 아니었다면, 시간이 멈춘 줄 착각했을 것이다.
위슨은 그 폭풍에 직격타를 맞은 탓에 아직 덜덜 떨면서도 여전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몇 번 국자를 놓칠 뻔하면서도 그녀는 꿋꿋이 솥을 젓고, 약의 완성도를 가늠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불편한 고요를 깬 건 위슨의 문자 마법이 내는 방울 소리였다.
[어머니를 나쁘게 보지 마세요. 파랑새를 제때 치우지 않은 제 잘못이에요.]
그녀의 작은 몸은 아직 떨고 있는데, 머리 위에 뜬 문자는 굉장히 차분한 어조라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로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그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치가 상대적으로 빠른 아이니, 더더욱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거겠지.
메린은…… 예상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최고의 배려를 보여주고 있었다.장했다.
어쨌든…… 지금 여기서 무어라 말을 할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을 듯했다.
그래도 나 역시 말을 꺼내기 위해선 괜한 헛기침과 목을 가다듬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 파랑새가 마녀를 싫어한다고 했던가……?”
몇 명 빼고는 다 꺼졌으면 좋겠다고 했던가?
파랑새 본인이 직접 말했던 거니 사실일 거다.
위슨은 화덕 앞 솥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척 싫어해요. 특히 제 어머니는 더더욱.]
……그러고보니 위슨은 다른 마녀를 마주할 때마다 파랑새를 바로바로 치우고 있었다.
그땐 그냥 파랑새가 말이 험하니까 그런가보다 했는데.
설마 이렇게 마구 살의를 주고받을 정도로 꺼려할 줄이야.
이건 단순히 싫어하는 게 아니라증오하는 거다.
“그 놈 참 성격 꼬였네.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위슨은 고개를 저었다.
[비단 파랑새만 그러는 건 아니에요. 이 숲의 정령들은 거의 대부분의 마녀를 싫어하거든요.]
……엥?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법 중엔 정령의 힘을 빌리는 것도 있지 않나?
호수에서 싸웠던 그 ‘이상해진 레이크’도 골렘 소환할 때 대지의 정령 어쩌고 했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이 숲에 사는 거면 이웃사촌이나 다름없는데, 싫어한다고?
[저도 한번 이유를 물어봤는데,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넌 신경 쓸 필요 없다’면서…….]
“흠…….”
무언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뭐든 제3자이자 마법과는 전혀 연이 없는 내가 함부로 끼어드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부분은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럼 또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야 되나……?
생각을 짜내고 있는데, 방울 소리가 울리며 위슨이 다른 말을 띄웠다.
[저기, 섬 밖 세상은 어떤가요?]
“세상?”
[저, 이 섬이랑 레이크 아저씨네 집 말고는 나가본 적이 없어서……. 바람의 정령이 간간이 이야기를 들려주긴 하지만, 정령의 시선은 사람과는 다르거든요.]
위슨이 말하길, 정령에게 있어 사람이란 종족의 차이만 조금 있을 뿐, 개개인은 죄다 똑같이 보이는 생물일 뿐이다.
우리가 개미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관찰하지 않는 것처럼 (물론 간혹 그러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정령들은 사람이 무엇을 하든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마을에서 무엇을 보건, 그들은 항상 같은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인간이 무척 많았다, 건물이 많았다, 그런 뻔한 말 밖에 못한다며 위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아니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슨은 같은 사람, 그것도 자신과 나이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은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해 듣고 싶은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꿈꾸고 싶은 것이다.
“음…… 근데 나도 쭉 마을에만 박혀 있었는데. 메린 쟤도 그렇고.”
“난 그래도 너보단 숲 많이 돌아다녔어.”
“얌마, 숲은 여기도 있잖아. 그리고…… 로나도 밖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래서 그 강렬한 갈망을 해소시켜 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우리가 베테랑 모험가였다면, 위슨이정식 마녀가 되기까지의 그 시간동안 되새기고도 남을 모험담을 잔뜩 안겨주었을 텐데.
짤랑, 방울 소리가 울렸다.
눈을 다시 들자, 위슨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들려주세요.]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처럼 검은 눈동자 속에, 기대와 설렘이 별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어어…… 시시할 텐데?”
[그건 제가 판단할 몫인데요? 아무튼 들려주세요. 일상 생활이든, 축제이든, 뭐든지요!]
그녀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옷자락에 감춰져서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녀가 환히 웃고 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새삼 고향 얘기를 하려니까 이거 또 쑥스럽네.
나는 목을 가다듬고, 기억 속에 담긴 고향 마을의 모습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완성된 감기약을 병에 담은 후, 위슨은 우리와 함께 집을 나섰다.
행여나 그 매부리코 마녀가 또 튀어나오는 거 아닌가 걱정됐지만, 다행히 대문을 닫을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감기약 받을 사람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긴 한데, 정말 괜찮겠어요?]
“응. 괜찮아. 마을 구경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냥 산책하고 싶은 거거든.”
마녀의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나 식생(??)이 있다면 꼭 보고 싶긴 하지만,뭐,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다.
다른 마녀를 만나는 것도 나쁘진…………않을 것 같기도 하고.
……드와트가 뭔가 한 것도 있고, 또 위슨도 같이 있으니까 뭔가 위험한 일이 있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제발.
위슨은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드와트의 마력이 감싸고 있네요. 그럼 뭐, 괜찮겠죠.]
그녀는 앞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문을 외울 수 없어서 공간마법을 못 쓴다며, 그녀는 살짝 어깨를 늘어뜨리며 사과했다.
“산책하고 싶은 거라 괜찮다니까. 아, 근데 그 주문이라는 거…… 파랑새는 못해?”
분명 호숫가에선 파랑새가 대신 뭐라뭐라 말을 해서 ‘문’을 열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마법이고, 주문이잖아? 되지 않을까?
[못해요.]
단언했다.
흠…… 하긴, 된다면 벌써 하고 다니고 있겠지.
“난 마법은 전혀 몰라서……. 그럼 호숫가에선 왜 된 거야?”
[아, 그거요? 그건 그냥 절차를 밟은 거에요. 음, 암호를 말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
그러고보니 로나가 ‘수순을 밟아야 한다’고 했었지.
위슨이 했던 게 그 ‘수순’이라는 것인 모양이다.
아무튼 파랑새는 진짜 말을 전하는 거 말고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쯧.
나는 앞서 걷는 위슨을 보았다.
처음엔 베르메가 역정을 낸 만큼 미숙한 마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슬쩍슬쩍 보이는 실력을 보면, 마법에 문외한인 나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어쨌든, 위슨은 어엿한마녀라는 것을.
그녀가 띄우는 저 문자만 해도, 내가 딴 데 보고 있으면 읽을 때까지 방울 소리를 울려 이목을 끈다.
그뿐 아니라, 그늘이 낀 곳에선 조금 빛을 내기도 하고, 해 아래 밝은 곳에선 주변에 그림자가 끼기까지 한다.
그렇게 세밀한 조정을 즉석에서 할 수 있는 걸 보면, 아직도 정식 마녀가 아니라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흠…… 드와트는 ‘때가 되면 될 것’이라고 했었지.
어쩌면 우리…… 아니, 나 혼자라도 그 ‘때’가 빨리 오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위슨은 내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 받을게요. 누가 도와줘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 그 자격이란 게 뭔데?”
그녀는 뺨을 긁적이며 조금 주저하더니, 아주 짧은 글자를 띄웠다.
[달거리.]
“……”
어…… 음……
누가 도와줘서 되는 게 아니긴 하군.
위슨의 얼굴이 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별로 부끄러워할 거리는 아닌데, 소녀의 여린 감성으론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근데 내 얼굴은 왜 화끈거리는 걸까?
나도 마음만은 소녀였던 걸까?!
그러고보니 비명 지를 때 자꾸 여자처럼 지르고 있긴 한데……
……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달거리가 뭐에요?”
정말 고맙게도, 로나가 내 쓸데없는 잡생각을 한 방에 날려주었다.
뒤를 돌아보니 로나가 또랑또랑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쟤도 아직 모를 때인가?
아니, 그래도 신전에서 가르칠 거 같은데??
아니, 이거 내가 가르쳐줘도 되는 거야???
메린이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달거리? 왜 있잖아, 한 달에 한 번 가랑이……”
“얌마! 나 안 들리게 얘기하라고!”
큰 소리로 얘기하고 싶으면 좀 돌려서 얘기하든가!
쟤 몫의 소녀심은 대체 누가 가져간 거야?
혹시 나야?!
그래도 나머지 이야기는 귓속말로 했는지, 잠시 후에 로나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아! 세간에선 그걸 달거리라고 하는군요. 하나 배웠어요!”
아무래도 단어를 몰랐을 뿐인 듯했다.
“근데 자격 조건이 저희랑 같네요? 저희도 여자가 정식 서품 받으려면 초경 지나야 되거든요. 역시 어디든 비슷하네요~”
“그래? 사제도 꽤 어릴 때부터 할 수 있구나. 하긴, 너도 어리지.”
평생 몰라도 됐을 것 같은 지식이 또 하나 늘었다.
“근데 아직이라고? 위슨, 너 몇 살인데?”
그리고 메린의 질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 귀 막고 싶다. 그냥 귀 막을까?
……아니지. 이거 뭐, 딱히 이상한 이야기하는 건 아니잖아?
나도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성인이잖아.
성인식 치른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그래, 어른답게 태연하게 듣자고.
뭐, 내가 의견을 내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
[저요? 열 다섯이요.]
“열 다섯? 어라?늦네?”
“사람마다 다르지 않나요? 저 아는 사람도 열 일곱 살에 겨우 시작하고 서품 받았어요. 뭐, 그 사람, 자꾸 단식 고행을 해서 몸이 약해서 그랬지만요.”
흠흠, 그렇구나. 흠흠.
[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에이, 그럴 리가요! 맛있는 거 팍팍 드시고 잠도 일찍 푹 주무시다 보면 어느 순간 짠! 시작할 거에요. 경험자가 하는 말이니까 믿으세요!”
……이어서 로나의 특별 강의가 시작되었다.
간간이 메린까지 한두 마디 덧붙이는, 정말정말 유익한 강의였다.
내가 여자였다면 말이지.
아…… 뭔가, 엄청나게 강한 소외감을 느끼는 한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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