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화 : 아아, 이건 악몽이야……!
* * *
다행히 더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에, 그 감기 걸렸다는 마녀의 집에 도착했다.
위슨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두드리자, 기침 소리가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적갈색 머리카락을 부스스하게 풀어헤친 여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귀가 뾰족한 걸 보니 엘프구만.
적갈색 머리의 엘프 마녀는 감기가 심한 지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으로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 선 위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으으…… 위슨이구나…… 콜록콜록! 부탁한 거 가져왔, 어머머머머머~?”
갑자기 마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목소리의 음색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아 올라간 건 덤이다.
엘프 마녀의 퀭한 눈이 나를 향해 포물선을 그렸다.
“어머어머어머어머, 이게 얼마만에 보는 신사분이시래? 후, 후후후후, 안녕, 자기? 네가 바로 어제 찾아왔다는 그 손님이구나?”
……이상하다.
그냥 손님을 환영하는 말인데, 왜 이리 소름이 돋는 걸까?
저 마녀의 혀는 저 입 안에 얌전히 잘 있는데.
근데 왜, 지금 무언가 축축한 게 내 얼굴을 핥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왠지 뺨에 물기가 어린 것 같다.
이건 땀이 흐른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너 뭐하냐?”
……정신을 차리니 메린의 등에 숨어서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보는 게 팍팍 느껴지고 있지만, 차마 떨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땅에 꽂아버리며 중얼거렸다.
“응……왠지 낯가림이 도진 거 같아…….”
“뭔 개소리냐? 네가 언제 낯을 가렸다고.”
아잇. 넘어가, 임마!
그냥 모른 척 넘어가라고!
저편에서 끈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부끄럼쟁이네? 귀여워라. 콜록콜록콜록, 으으…… 아, 고마워, 위슨. 약값은 나중에 집으로 보내줄게.
……응? 어머, 얘도 참. 너네 어머니보단 네 약이 더 잘 들으니까 그렇지. 콜록, 제조법은 다 같잖니? 그럼 특별재료가 들어간 약이 더 잘 듣겠지?
그래…… 예를 들면, 네가 가진 그 귀.여.움?”
……위슨이 쪼르르 달려와서 내 등 뒤에 숨었다.
이거 옆에서 보면 되게 웃길 거 같은데.
“킥킥, 역시 귀엽다니까! 콜록콜록…… 그건 그렇고, 파랑새가 보고 싶은데. 꺼내주지 않을래? 그럼 더 기운이 날 거 같아.”
“……”
퐁. 지옥의 파랑새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또 멋대로 내 머리 위에 앉더니 내 정수리를 콕콕 쪼아댔다.
이 놈이 나오자마자 시비 거네.
“……흥. 하나도 안 미안해. 미친 마녀를 미친 마녀라고 한 건데, 뭐.”
“너 또 폴레랑 싸웠니? 얘도 참. 우리 귀염둥이 곤란하게.”
“뭐야, 변태녀잖아. 약 받았으면 좋은 말할 때 들어가서 처먹고 잠이나 자라. 나 기분 안 좋다.”
계속 생각한 거지만, 이 새는 그냥 시비 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선 이 놈도 훌륭한 변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자마자 파랑새가 또 내 머리를 마구 쪼기 시작했다!
이 자식, 진짜 내 속을 읽기라도 하는 건가?!
그리고 파랑새의 시비조를 들은 엘프 마녀는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어머, 위슨에게 혼났구나? 콜록콜록, 너무 약해서 느낌이 안 와아~”
……무슨 느낌을 말하는 걸까?별로 궁금하진 않다.
파랑새가 내 머리에서 푸드덕 날아가더니, 마녀의 얼굴 앞으로 날아가서 빽 소리질렀다.
“남의 말을 뭘로 취급하는 거야, 이 개변태야!! 소름 돋는 콧소리 내지 말고 그 지저분한 면상 내 눈앞에서 저리 치워!!”
“하으으응♡ 이거야, 이거! 하루에 한 번은 꼭 들어야 한다니까!”
……좋아하고 있어! 욕 먹으면서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다고!
저게 말로만 듣던 피학성애자……!
너무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일어섰다가, 그만 마녀와눈이 마주쳐버렸다.
아아, 드디어……!
잡았다……!
"……?!"
지금, 뭐가 번쩍거린 것 같은데……?
아.몸이 안 움직인다!
그대로 몸이 우뚝 굳어버린 나를 보며 엘프 마녀가 헤실 웃었다.
마녀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감기 걸렸다고 했으니까 분명 그 열 때문일 거다.
몸을 자꾸 꼼지락거리는 건……
몰라,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기운이 빠졌나보지!
“어머머, 자기야, 드디어 나랑 놀 용기가 생겼어?"
"노, 놀긴 뭘 놀아요?"
그래도 말은 아직 나오네. 그나마 다행이다.
"너랑 나랑 둘이서, 즐겁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지. 후후후, 감기약도 있겠다, 원한다면…… 난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는데……?”
“무슨 말씀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후훗, 시치미 떼는 거야? 귀여워라. ……다 알면서.”
문틈에 있던 엘프 마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코앞에 나타났다.
“……!”
마녀의 뒤쪽 틈으로 집 안이 살짝 보이고 있었다.
즉, 마녀는 문 앞으로 나를 당겨온 것이다!
엘프 마녀의 손이 천천히 내 뺨을 감쌌다.
그 손이 너무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뼛속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나 마녀의 목소리는 열기를 띄고 있었다.
마치 그 뜨거운 숨결을 내게 나눠주려는 것처럼, 마녀는 내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들었어. 다 들었단다? 여기 이레동안 머문다며? ……자기야, 나랑 같이 지내지 않을래?”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 윽……”
젠장, 몸이 말을 안 들어……!
머리 위에서 파랑새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은 드와트가 벌써 침 발라놨어, 그것도 모르냐? 추잡하게 침 흘리지 말고 얼른 약이나 처먹으러 가!”
침 발랐다고 하지 마, 이 자식아!
“어머, 나도 알아. 드와트가 표시를 아~주 진~하게 했으니까. 근데 있잖아.”
엘프 마녀가 씨익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내가 그걸 왜 신경 써야 돼? 그냥 노는 건데……!”
무조건 통하는 게 아니었구나, 빌어먹을, 젠장, 살려줘요!
“안 그래? 귀엽고 귀여운 우리 자기,내 눈을 보고 직접 말해봐. 나랑 즐겁게, 놀고 싶지?”
마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 눈을 보면 안 된다고 본능이 마구 소리치고 있다.
고개를 못 돌린다면 시선이라도 돌리려는 순간,
“윽……!”
붙잡혀 버렸다.
이미, 나는 마녀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며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달아오른 숨결이 입술에 닿고 있다.
그 열기가 결국 옮았나보다.
얼굴이 뜨겁다.
손끝부터 발바닥까지, 온 몸이 뜨겁다.
분명 지금 내 머리 위에선 주전자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고 있을 것이다.
아아, 촉촉한 물기를 띈 그윽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붉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아……!
나랑 놀고 싶지?
속삭임이 들려왔다.
논다니, 한가한 것도 아니고 그럴 순 없다.
지금 한 순간, 아주 잠깐인걸? 후후, 후후후……
자아, 나랑 같이 즐기자?
"으…… 읏……"
젠장, 거절해야 되는데…… 머리가, 어지럽…….
아아, 이 타는 듯한 갈증을…… 갈망을……
목덜미에 입김이 닿았다.
허벅지부터 시작해 배, 허리, 등, 목덜미 순으로 차가운 손길이 훑어지나간 것 같았다.
이 지독한 애달픔을, 네 품에서 잊게 해줘……!
나를 채워줘……!
서늘한 두 손이 내 뺨을 잡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서서히 다가왔다.
“안 돼요!!”
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홱 잡아당긴 탓에, 힘없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아픔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감각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내 머리 위에 그림자가 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메린?”
메린이 내 앞에 서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가 마구 느껴지고 있었다.
검 손잡이를 쥐고, 당장이라도 뽑을 기세로 앞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로나가 서서 항의하고 있었다.
방금 크게 소리친 것도 로나인 듯했다.
“카엘 님을 건드리지 마세요! 필요 이상으로 집적대지 말라고요!!”
“……”
오늘따라 로나가 많이 날카롭네…….
머리가 너무 멍해서 그 외에 다른 생각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머? 우후후, 우리 자기, 인기 많네? 질투하지 않아도 돼요, 꼬마 아가씨. 언니는 귀여운 아이라면 다~ 좋단다? 후후, 후후후후……! 언니랑 같이, 놀래……?”
저 끈적한 목소리…… 웃음소리……
으으으!! 귓가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그만!
그만 쳐웃어, 빌어먹을!!
“……! ……카…………려! ……야, 카엘!! 정신 바짝 차리라고, 임마!!”
찰싹!
……아, 메린이다.
녀석의 얼굴이 시야 한 가득 들어오고 있다.
녀석의 손이 닿고 있는 양 뺨이 무척이나 뜨겁고 얼얼하다.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며 아주 살짝,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
“더럽게 아프네…….”
……분명 손자국 엄청 진하게 나 있을 것이다.
이거 팅팅 붓는 거 아니야?
“정신 들었냐?”
“몰라…… 뭐 이리 세게 때리냐, 진짜. 이빨 나간 거 아냐? 이 악랄한 새끼……!”
“흠, 정신 들었네.”
메린이 손을 놓았다.
지지대를 잃은 고개가 다시 아래로 푹 꺾이려는 걸, 목에 힘을 주고 앞을 향했다.
로나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집 주변을 울리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세요!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내 눈앞에서 누구 홀리는 꼴 보이기만 해요! 그 역겨운 눈알 뽑아서 으깨 버릴 테니까!!”
“……”
하하, 로나가 화가 많이 났구나.
얼마나 점잖은 사람이건, 화가 나면 말이 거칠어지는 법이다.
……그나저나율리아 공주님, 당신 대체 교육을 어떻게 한 겁니까?!
“어머머, 무서워라~ 후후, 그럼 귀여운 아가씨, 널 유혹하면 되겠네~? 하으으♡”
……그리고 저 변태 마녀는 로나가 씩씩대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돌겠네, 진짜.
마녀가 입술을 핥으며 야릇한 눈으로 로나를 향해손을 뻗었다.
붉은 마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질 그때, 파랑새가 마녀와 로나의 사이에 끼어들더니 입을 벌렸다.
“꺄아아아아악!”
갑자기 마녀가 두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새가 대체 뭘 했길래?
그냥 입…… 아니, 부리 좀 벌렸을 뿐이잖아?
파랑새가 마녀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드와트가 이미 찍었다고 했냐, 안 했냐! 발정 났으면 애꿎은 애 건들지 말고 너네 집 개랑 뒹굴어, 정신 나간 년아!! 고막 터뜨리기 전에 얼른 꺼져!!”
“아으으, 너무해애~! 심심해서 놀려던 것뿐인데!! ……칫.”
마지막에 굳은 표정으로 혀를 찬 것 같은데, 잘못 본 거겠지?
“콜록콜록! 흥, 나보다는 드와트를 더 조심하는 게 좋을걸? 내숭부리는 애가 원래 더 무섭다구! 흥이다. 저주 걸 거야!”
마녀는 토라진 듯이 쏘아붙인 후,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
로나는 잠시 씩씩대며 마녀가 들어간 문을 노려본 다음, 나에게 허둥지둥 뛰어왔다.
“카엘 님, 괜찮으세요?! 세상에, 완전히 다리가 풀리셨나봐! 어쩌죠? 저 기력 회복 같은 건 못하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로나에게,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기가 다 빨린 것뿐이야. 정력 좋은 거 먹이면 다시 살아날걸? 뱀 같은 거.”
“뭔 개소리야……. 그 놈의 뱀, 뱀, 뱀. 아니, 진짜 뱀 못 먹어서 뒤진 귀신이 붙었냐고…….”
힘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할 말을 하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뭐라고 안 하면 이 새끼, 진짜로 뱀 잡아와서 먹이려 들지도 모르니까!
“봐. 이 녀석 입이 살아 있잖아? 그럼 걱정 없어.”
“그, 그래도…….”
로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 얼굴이 조금 전에 눈알 어쩌고 하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질렀다니 믿기지 않는다.
뭐, 거듭 말하는 거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나면 성인군자도 쌍욕을 하기 마련이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하자…….
위슨이 내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허리춤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약병을 하나 꺼냈다.
그녀가 약병을 공중에 들자, 파랑새가 곧바로 날아와서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위슨이 내 입을 열고 들이부었다!
“우으읍?! 콜록콜록콜록!”
아니, 왜 내 주변엔 죄다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밖에 없는 거야?!
그냥 곱게 주어도 잘 받아먹을 수 있는데!
“……!”
아. 왠지 눈앞이 무척 또렷해진 것 같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던 머리가 맑아지고, 나른한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싹 사라졌다.
“뭐, 뭘 먹인 거야?”
“즉효성 각성 겸 피로회복 겸 영양제.”
용도가 너무 겹친 것 같은데.
어쨌든 덕분에 팔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설 수 있었다……만, 살짝 휘청거렸다.
메린이 재빨리 나를 부축해주었다.
파랑새가 내 머리 위에 올라와 앉아 짹짹거렸다.
“위슨이 미안하다는데? 다른 마녀에게 물약을 쓰면 결투 요청이 되니까 나설 수가 없었대.”
“……넌 괜찮고?”
“난 자유의지를 가진 정령이니까.”
파랑새가 공격한 건 위슨의 의지가 아니라 정령이 멋대로 한 거니까 상관없다는 것 같았다.
“다른 변태가 오기 전에 얼른 뜨자고. 위슨이 풍경 좋은 곳 소개시켜준대.”
“아직 제대로 못 걸을 것 같은데…….”
위슨이 강제로 들이부은 물약 덕분에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긴 했지만, 누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곧바로 다시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 대체 그 마녀, 나한테 뭔 짓을 했길래…….
직접 그 마녀의 눈을 봐서 그런지, 흑단나무에서 당했던 것보다 훨씬 피해가 크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왠지 허리 아래 느낌이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은데?
힐끗 시선을 내려 확인해보았다.
…………
완만한 동산이 순식간에 고산(高山)이 되었습니다.
오, 주여. 왜 제게 자꾸 이런 시련을?!
젠장, 아까 그 변태 마녀 때문에……!!
그나마 다행인 건, 내 곤란한 상태를 눈치챈 사람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젠장, 이거 어떻게 가라앉히지?
"그럼 여기서 좀 쉬었다 가야겠구만."
아싸!
좋아, 이 틈에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
“아냐, 괜찮아. 내가 끌고 가면 되니까. 위슨, 안내해.”
뭐야?!
“야, 뭔 소리하는 거야, 끌긴 왜 끌어!”
“너 업고 가기엔 내 키가 좀 모자라잖아. 그럼 끌어야지, 뭐 별 수 있어?”
메린이 자신의 양 겨드랑이에 내 팔을 하나씩 끼우더니, 그대로 쭈우우욱 끌고 가기 시작했다.
기운도 없겠다, 이런 험한 취급을 당하는 건 일상다반사니까 이에 대해선 별 불만은 없다.
……문제는 내 몸이 하늘을 보는 상태라는 거다!
안 돼애애!
이 꼴로 가다간 내 존엄성이 완전히 박살난다고!!
시집 못 간다고!!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아무튼 안 돼!!
“야야야야야! 놔! 야, 임마, 놓으라니까?! 메린 님, 제발 놔주세요, 제가 직접 걸어갈게요! 야, 이 새꺄, 안 들려?!”
“잘 들려.”
“들리면 놓으라고!”
“안 돼. 네 발로 걸어가는 건 너무 느리잖아.”
젠장, 이걸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이 팔을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카엘 님 발이 끌리네요. 제가 들어 드릴게요!”
으아악, 하필 지금!
“아냐아냐아냐아냐! 로나, 안 그래도 돼! 안 그래도 된다니까! 됐으니까 떨어져! 떨어져어어!!”
“에이, 이 정도는 수고도 아닌데요, 뭘. 저한테 그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너도 나한테 마음 안 써줘도 되는데!
특히 지금은 더더욱!
로나는 내 간곡한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두 발을 들었고,
“어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두 발을 든 로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로나가 놀란 것에 이끌린 위슨도, 결국 보고 말았다.
아아, 결국 보이고 말았다.
……그보다 왜 둘 다 고개를 안 돌리는 거야.
돌려. 돌리라고!
위슨의 머리 위에서, 파랑새가 킥킥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수컷이라 이거냐? 아주 그냥 본능에 충실~하구만?”
“……하…….”
얼굴을 감싸고 싶어도, 두 팔이 메린에게 붙들려 있어서 불가능했다.
아, 차라리 그 마녀에게 풀려났을 때 그냥 기절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메린이 내 얼굴을 찌그러뜨릴 양 세게 붙잡았을 때라도.
아니, 사실 지금도 그렇게 늦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불행히도 위슨의 물약 덕분에 내 정신은 무척 또렷했고,
내 섬세한 마음은 무참히, 갈가리, 처참하게 가루가 되고 말았다.
이게 세계멸망을 바라는 악마들의 계략이라면, 아아, 진심으로 축하한다.
너희가 이겼다.
덕분에 삶에 대한 의지가 한 방에 사라져버렸다, 이망할 자식들아!
그러나 내가 패배를 인정했는데도 이 지옥 같은 시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이런 거,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죽여줘…… 이제 그만 죽여줘어…….”
“싫어.”
내 흐느낌을 들었는지, 나를 질질 끌고 가던 메린이 끼어들었다.
“설령 네 사지가 전부 날아가더라도 죽게 두진 않을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넌 계속 가기나 해라…….”
……그냥 도착할 때까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카엘 에스트렐, 잠시 휴업합니다.
찾지 마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