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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2화 (32/475)

〈 32화 〉 32화 : 한낮의 꿈, 꿈 같은 한때

* * *

위슨이 안내한 곳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밭이었다.

풍경 좋은 곳?

아니, 이곳을 그렇게 건조하게 표현하는 건 일종의 신성모독이다.

여긴 내가 아는 어떤 형용사를 써도 부족할 만큼 무척 아름답다.

왕국 전역의 대문호들이 머리를 맞대고 시를 짜내야만 겨우 이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

내 최대의 표현력을 쓰자면, 세상의 모든 색이 이곳에서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를 다양다색한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노니며 새들이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다.

중앙에는 아담한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나무를 둘러싸듯 샘이 파여 있다.

파랑색, 연두색, 분홍색 등등 사람이 명명한 색깔들과,

그 색깔들의 경계에 머무르고 있는 이름 없는 색깔들.

대지와 하늘, 나무와 꽃, 새와 나비가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는 무도회장.

여기가 바로 요정의 무도회장일 것이다.

“와아, 저 샘에 물고기도 있나 모르겠네.”

……그리고 나는 낭만에만 젖어 있을 수 없는 시골 청년이었다.

메린이 내 말을 들었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낚시하려고?”

“하겠냐.”

“할 거 같은데.”

당연하지.

낚시대가 없어서 못하지만.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코 안 가득 향긋한 꽃향기가 느껴지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떤 악몽 같은 일이라도 모조리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편안하다.

역시 숲은 좋아…….

이대로 꽃에 파묻혀 있고 싶어…….

“저, 저기, 카엘 님……? 여보세요~?”

바람 소리에 뒤섞여 무언가 들린 것 같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요정이 장난을 치려고 속삭인 거겠지.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 큰 해를 끼치진 못할 것이다.

아예 그냥 일주일간 쭉 여기 있을까?

그게 제일 나을 거 같은데?

마을에 돌아가봤자 그 마녀들 만나기밖에 더해?

그리고……

……

……으응?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하하하, 무슨 일이 있었든 아무려면 어때!

여기가 바로 낙원인데!

우리 고향과는 달리 주변에 몬스터도 없고!

“카, 카엘 님, 이거 보세요! 짜~잔! 예쁘죠!”

로나는 화관 하나를 만들어서 머리에 쓰고 있었다.

잠깐 모습이 안 보이던데, 꽃밭에서 놀고 있었구나!

약간 어색한 기색이 감돌긴 해도, 어쨌든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와, 손재주 좋구나! 응, 굉장히 잘 어울려!”

“그, 그리고 이것도 보세요! 이파리 네 개짜리 토끼풀이에요! 신기하죠!”

“응응, 신기하다. 로나는 눈이 좋구나~ 용케 그런 것도 찾고~”

로나는 참 대단한 아이야!

아직 열 네 살 밖에 안 되었는데, 깜깜한 곳에서도 문제없이 돌아다닐 수 있거든!

못된 장난을 치는 녀석들을 묵사발 만들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 로나가 어째서인지 진땀을 흘리고 있다.

뭐, 얼굴은 방긋 웃고 있으니 분명 더워서 그런 거다.

“이, 이거 드릴 테니까 그만 화 푸세요!”

로나가 화관과 토끼풀을 내밀었다.

선물은 고맙긴 한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를 풀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내가 왜 화가 나?

왜 로나에게 화를 내?

“하하, 무슨 소리하는 거니? 나 화 안 났어. 이렇게 낙원 같은 곳에 있는데 무슨 화낼 일이 있겠니?”

“화, 화 안 나셨어요? 정말요?”

무엇 때문에 로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얘가 날일부러 엿 먹인 적이 있기를 하나,감추고 싶은 비밀을 마구 파헤친 적이 있기를 하나?

이렇게 좋은 날, 좋은 곳에서 괜한 걱정을 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다구!

왠지 머리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드는 걸 무시해버리고, 나는 로나에게 웃어주었다.

“너도 참, 너무 걱정이 많은 것 아니니? 어린애가 벌써부터 남 눈치 너무 보면 안 돼~ 뭐 때문에 그러는데?”

……응?

왠지, 마지막 말은 해선 안 될 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참 이상하네. 이유를 모르니까 당연히 물어봐야 하는 건데.

왠지 실컷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집에 가자'며 초를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로나는 약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카엘 님의 고간이 부풀어오른 걸 본 거, 정말 화 안 나신 거죠?!”

………………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싫어어어어어엇!”

비명을 지르며 꽃밭 위에 엎어졌다.

아아, 다시 그 기억이 떠올라버렸어……!

있는 힘껏 애써서 다 잊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나버렸어!!

……그 밖에도 어렴풋하게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내가 크나큰 수치심에 사고회로를 꺼버린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 확실하진 않다.

왠지 그 뒤에 로나가 ‘다쳐서 부은 거 아니냐’면서 내 바지를 벗기려고 했던 것 같단 말이지.

다행히 그걸 메린이 막은 것 같은데…….

이 자식이 뭐라고 하면서 막았더라?

너무 충격적이었던 건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

그럼 영원히 떠오르지 마라.

메린이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나 참, 알맹이를 직접 보인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긴.”

“닥쳐! 네가 내 섬세한 감성을 알기나 해!!”

참고로 이 새끼는 대낮에 갑자기 덥다면서 옷을 훌훌 벗고 호수에 뛰어든 적이 있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주변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고, 당연히 이 새끼는 그날 나랑 엄마에게 무진장 혼이 났다.

덕분에 그후로 그딴 짓을 저지르는 걸 본 적이 없긴 한데, 난 지금도 얘가 큰 물에 발만 적셔도 흠칫 놀란다.

……그리고 내 명예와 창조주님께 맹세코, 난 그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날 굉장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셨고, 나는 그 억울함을 토로할 곳이 없어서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었다.

그나마 마을에 아무 소문이 안 난 게 그나마 다행이지.

아무튼 그 무시무시한 전적을 가진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또 입을 열었다.

“속옷 바람으로 마을 돌아다닌 적도 있으면서.”

“그건 어렸을 때잖아!”

“양들 발정기 때 교미하는 것도 눈앞에서 실컷 봤으면서.”

“그건 짐승이잖아, 그리고 나 안 봤어, 임마! 붙는 거 보자마자 바로 저 먼데 봤다고!”

참…… 사춘기 감성으로는 버티기 힘든 현장이었다.

이상하게 익숙해지지를 않더라.

메린 저 녀석이랑 같이, 자주 양치기 일을 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얘도일단성별은 여자잖아.

……아무튼 다시 그 악몽 같은 기억이 돌아온 나는, 좀더 기운을 차려야 한다는 핑계로 도로 꽃밭에 드러누웠다.

“……역시, 화 나셨죠? 정말 죄송해요…….”

로나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이런.

황급히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야, 진짜 화 안 났어! 그냥 곧바로 먼지가 돼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쪽팔렸을 뿐이야! 너한테 화나진 않았어. 그…… 몰랐잖아?”

“그래도……”

“괜찮아. 정말이야. 화 안 났으니까 걱정 마.”

그냥 더럽게 쪽팔려서 죽고 싶을 뿐이지, 내가 누구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니다.

굳이 낸다면, 쓸데없이 집적거린 그 변태 마녀한테 내야지.

로나는 그저 나를 걱정했을 뿐이다.

베일을 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로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본 후, 이내 헤실 웃었다.

……어쩐지, 이 아이가 웃는 얼굴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헤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공부해둘게요!”

“어디서 어떻게 할 건데! 아니, 그딴 거 하지 마!!”

……소란이 가라앉은 후, 로나는 다시 꽃밭으로 가서 꽃을 꺾으며 놀기 시작했다.

멀거니 내 근처에 서 있던 메린까지 끌고 가서 같이 노닥거리고 있다.

열 네 살 소녀다운 천진한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 얼굴빛이 좋아졌네. 다시 정신 돌아왔나봐.”

파랑새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위슨이 내 옆에 앉았다.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로나와 달리, 위슨은 별로 주눅이 들거나 하고 있진 않았다.

……나와 시선을 맞추려 하고 있진 않지만.

그녀를 대신하려는 듯이 파랑새가 푸드덕거리며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흠, 마법 기운도 다 빠졌구만. 거 봐, 위슨, 걱정할 거 없다니까?”

“마법? 아까 그 마녀가 했던 거?”

여전히 내가 아닌 저 앞을 바라보며 위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혹 마법이야. 사람이든 뭐든, 꼼짝없이 홀리는 질 나쁜 마법이지. 너 나한테 고맙다고 절해라, 임마. 나 아니었으면 너랑 저 꼬맹이 아가씨는 그 년한테 실컷 잡아먹혔을걸? 내가 너희 둘 생명의 은인이라 이거야.”

“……셋이겠지.”

“뭔 소리야?”

나는 저 앞 꽃밭에 앉아 있는 메린을 보았다.

저 녀석도 로나의 웃음 전염은 피할 수 없는지 킥킥 웃고 있었다.

……아니, 그냥 로나가 나비에 둘러싸여 있는 게 웃겨서 웃는 건가?

“그 마녀까지 셋이라고. 저 녀석이 그 마녀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거든.”

“……내가 그 미친년 편드는 건 아닌데, 일개 인간이 마녀를 잡는 건 불가능해.”

하긴, 사전 동작없이공간이동을슝슝 해내는 작자들이다.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 이상 옷깃도 스치지 못하겠지.

하지만……

“글쎄, 왠지 저 녀석은 될 거 같단 말이지? 공간 자체를 베어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인간이 그걸 어떻게 하냐? 꿈도 야무지네.”

“그런가?”

진짜 될 것 같은데.

“그게 되는 건 마일린 정도나 되어야,”

딱!

한창 떠들기 시작한 파랑새의 말이 뚝 끊기며 놈의 형체가 사라졌다.

“……위슨?”

별일이네.

파랑새가 이상한 소리를 할 때마다 때리긴 해도, 하던 말을 강제로 끊은 적은 없었는데.

위슨은 여전히 저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옆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려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짤랑, 위슨의 머리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카엘 씨의 아까 그 현상, 생리적인 것이라고 했죠?]

“아까 그 현상?”

[생식기가 확대된 현상.]

“……”

오우, 학술적인 표현인걸?

왠지 내 얘기를 하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아, 그, 그거? 어, 어어. 생리적이라고 할까, 아까 그건 본능이지? 새, 생명이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

……그러나 그걸 진지하게 논의 주제로 삼기엔, 내 감수성이 너무 여린 듯했다.

정말 진지하게, 메린 몫의 소녀심까지 죄다 내가 가져간 게 아닌가 고민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숲의 짐승들이 그러는 걸 본 적 있어서 알아요. 번식을 위한 것인 것도. 사람도 그런다는 건 몰랐어요.]

아, 그래서 그렇게 뚫어져라 봤구나.

근데 그걸 모를 수가 있나?

드와트처럼 집에 조수가 있다면 가~끔 아침에 볼 수도 있을 텐데?

관리를 잘하나?

[조수? ……아아. 우리집엔 남자가 없어요. 어머니가 남자는 싫다면서 두려고 하지 않으세요.]

“흠…… 근데 그게 왜? 사람도 같은 생리현상을 가진다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거야?”

그제서야 위슨이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왜 그런 걸 묻냐’고 묻는 듯했다.

“그…… 침울하다고 해야 하나, 난처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검은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그녀는 잠시 바닥을 본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난처하긴 해요. 여러가지로.]

“뭐가 난처한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향해 웃음지었다.

입이 보이지 않는 탓에 그것이 억지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푹 쉬셨다면, 이제 갈까요? 마을을 안내해드릴게요.]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녀에게 다시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란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위슨은 꽃밭에서 놀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파랑새를 다시 꺼냈다.

위슨의 주위를 한 바퀴 뺑 돈 후, 파랑새는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았다.

“……?”

왠지 저 파랑새, 날 빤히 보는 것 같은데.

“캐지 마라.”

“……응?!”

방금, 귓가에서 말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그러나 내 주변엔 아무도 없다.

아마 누구 한 명 있었더라도 나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말을 걸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 있는 누구도 내지 못할 만큼 낮고 굵직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섬에 온 지하루만에 별별 괴현상을 다 겪고 있다.

이 숲은 마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었지.

그럼 내가 깔고 앉은 꽃과 풀에도 입이 달려 있기도 하고, 뭐 그런가?

“위슨에 대해 캐지 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특히, 베르메가 지켜보고 있는 넌 더더욱.”

“……”

저 앞에서 파랑새가 위슨의 머리 위에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놈은 꽃밭에 자리한 두 사람에게 쌩 날아가 무언가 재잘거리고 있다.

그 대신인지, 귓가에 들리던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뚝 끊겼다.

캐지 말라니, 무슨 비밀이 있길래……?

­­베르메가 지켜보고 있는 넌 더더욱.

수장실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곳을 떠나기 전, 수십 개의 작은 거울들에 둘러싸인 검은 장미 같은 여인이 웃음 짓던 것도.

­­그러니 명심해.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그 작은 거울…… 뭐랬더라, 탐색 마법?

정말로 그걸로 내 움직임을 하나하나 다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히익.”

왠지 오싹한 기운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꽃밭에서 놀던 두 사람을 데려온 후, 위슨은 이 주변에 절경(?)이 많다며 위험하지 않은 곳을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산책 목적이 더 크다고 했었으니까 이 편이 더 좋지? 그게 아니면 부엉이탑으로 가야 되는데 한 놈이 질색하잖아.”

“네. 제발 거기는 피해주십시오.”

겨우 기운을 차렸는데 허망하게 다 잃어버릴 순 없다.

위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간도 그리 많지 않으니 얼른얼른 따라오라고.”

이윽고 시작된 ‘투어’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반짝이는 포자를 내뿜는 거대한 버섯들 (사람 두 명분만큼 컸다!),

나무들을 빙빙 돌면서 노래를 부르는 픽시들,

무심한 눈으로 되새김질하며 지나가는 유니콘,

사슴뿔이 달린 곰을 쪽쪽 빨아먹고 있는 숲해파리……

……사실 숲해파리는 좀 무서웠다.

내장이 다 보이는 투명한 머리를 가진 놈이 투명한 촉수를 길게 뻗고 날아다니는 게 참……

생물이 아니라 유령 같은데.

아무튼 이걸로 드와트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충분히 확보했다.

그리고 푸른 하늘에 점점 노란빛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위슨은 우리를 작은 공터로 데려왔다.

“여기가 마지막이야.”

공터 중앙에는 조각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가 관리하고 있는지 주변 풀이 죄다 짧게 깎여 있어서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살펴본 우리는, 하나 같이 탄성을 내질렀다.

조각상은 횃대에 앉은 거대한 부엉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숲 아니랄까봐 돌이 아닌 나무로 되어 있었다.

깃털도 하나하나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꼭 살아 있는 부엉이가 그대로 나무 조각상이 된 것 같았다.

로나가 조각상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질렀다.

“와, 꼭 살아 있는 거 같아요!”

“마일린이 키우던 부엉이야.”

파랑새가 조각상 위에 앉아 짹짹거렸다.

“본 적 있어?”

“아니.”

“뭐? 너 이 숲에서 제일 오래됐다며?”

“소리의 정령 중에서 제일 오래됐지.”

……이 새끼가?

파랑새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섬이 위험해지면 이 부엉이가 다시 되살아나서, 땅 속에 잠든 마일린을 다시 깨울 거라는 전설이 있어.”

“흠, 그 마일린이라는 사람 땅에 묻혔구나.”

“당연한 거 아니냐? 천 년도 더 전에 살던 마녀라고.”

그렇구나.

……모를 수도 있지!

대마녀라며, 그럼 지금까지 살아서 어디 은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깨우면, 그 마일린이라는 사람이 섬을 구하는 건가?”

“글쎄? 마일린이 깨어난다고만 하지, 뭘 할 거라는 이야기는 없거든. 여기 계속 살 거라면 구하겠지.”

지당한 말이었다.

나는 다시 부엉이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눈 부분에 박힌 수정이 햇빛에 반짝였다.

“근데 이거 누가 만든 거야?”

“몰라.”

“언제 만든 거야?”

“몰라.”

“……무슨 나무로 만든 거야?”

“몰라.”

……이 새끼 대체 아는 게 뭐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여기 누구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왠지 그런 거 같은데.”

“나야.”

저 부리 달린 공이 진짜……가 아니지. 목소리가 완전히 달랐다.

뜻밖의 등장인물에 놀란 건 위슨도 마찬가지였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여자가 서 있었다.

파랑새가 솜털 같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그 여자에게 날아갔다.

저 놈 또 시비 털려고……!

그러나 내 긴장도 무색하게,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파랑새는 그 손가락 위에 앉아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다.

“안녕, 에코? 위슨도 안녕?”

“이 시간에 밖에 나오고 웬일이냐? 몸에 핀 곰팡이 떼러 왔어?”

말투는 여전히 거칠지만, 저 놈이 여태껏 다른 마녀를 대하는 태도 중에선 제일 유순했다.

아무래도 맘에 드는 마녀들 중 하나인 모양이다.

“고, 곰팡이라니 그런 거 안 폈거든?! ……흠흠, 이 근처를 지나는 길에 소리가 들려서 와 봤어. 오길 잘한 것 같네.”

여자는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어 파랑새를 날려보낸 후, 우리를 향해 웃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여러분이 여기 섬에 찾아왔다는 손님이죠? 만나서 반가워요. 취미로 여기 조각상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베르메나 드와트, 그 밖에 탑과 지상에서 본 마녀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마녀라기보다는…… 그냥 숲에 사는 평범한 여자 같다.

뾰족한 귀와 그녀 주변에 빙글빙글 도는 빛만 아니었어도, 나와 같은 일반인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멍청아. 이름을 얘기 안 했잖아.”

“얘, 얘기하려고 했어! 나 참, 너도 정말 변하지를 않는구나. ……흠흠, 미안해요. 제가 낯선 사람을 만난 게 좀 오랜만이라…….

나는 네이멜. 멜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저어기 숲에 살고 있는 마녀이고……”

네이멜은 싱긋 웃었다.

“다른 마녀들이 제일 싫어하는,이름 없는 마녀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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