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0화 (40/475)

〈 40화 〉 40화 : 이제, 잠들어 있던 번데기는 눈을 떴고

* * *

당신의 눈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한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고, 다른 한 명은 그 앞에 서 있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어쨌든, 지금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이미 두 자릿수나 이와 같은 피해자를 만든 전과가 있다.

이 경우,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

물론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내 답은 이렇다.

전과자를 냅다 후려쳐서 기절시킨 후, 나무에 몸을 꽁꽁 묶은 다음 심문한다.

죄상이 밝혀진 다음엔, 뭐, 촌장이 알아서 하겠지.

뭐? 위병을 불러?

내 고향마을, 왕국 최북단의 놋지빌엔 그딴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위병이 없는걸.

그러니 나도 놋지빌 사람답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상대가 메린이어서 불가능했다.

일단은, 음, 이 동요하는 마음부터 가라앉히자.

로나의 손을 놓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다음,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다시 눈앞의 참상을 직시했다.

피해자의 얼굴은 바닥을 향하고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머리카락과 귀 모양은 확인할 수 있었다.

뾰족한 귀에, 길게 풀어헤친 적갈색 머리카락.

혹시 지난번에 본 그 변태인가?

여기서 입 열면 뭐가 팍 터져나올 것 같아서, 말을 하는 대신 로나에게 대강 손짓했다.

정말 고맙게도,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피해자에게 다가갔다.

“기절했네요. 안에 눕혀 놓을게요.”

“……고마워. 부탁 좀 할게.”

로나는 곧바로 피해자를 들쳐업……지는 못했다.

키가 모자랐던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피해자의 두 어깨를 붙잡아 질질 끌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끌리는 소리가 멀어진 후, 나는 가해자 새끼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명해.”

“뭘?”

“왜 네 앞에 아까 그 사람이 쓰러지게 된 건지 설명하라고.”

내가 더 빡치기 전에, 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얼마나 거지 같은 놈이건,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설령 나에겐 개소리에 불과할지라도, 어쨌든 이유는 이유인 것이다.

메린도 마찬가지이다.

이 새끼도 아무 이유 없이 이딴 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등신 같은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걸 들어야 한다.

이유를 듣고, 그걸 반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먹히지 않는다.

메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밖으로 나왔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달려들었어. 떨어지라고 해도 안 떨어지길래 강제로 떨어뜨렸고.”

“그리고?”

“……도로 달려들길래제압했을 뿐이야.”

“……”

아니아니아니아니, 아직 아니야.

진정해. 진정해야 돼.

울컥 올라왔지만, 지랄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진 게 더럽게 빡치긴 하지만!

……일단 가라앉혀야 돼.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한 번 더 한 후, 물었다.

“그 사람이 너한테 달려들어서 뭐했어?”

“냄새 맡던데. 엄청 소름 돋더라.”

“……”

그 변태 엘프 맞구만.

돌겠네, 진짜.

참고로 메린은 지금, 내 얇은 겉옷만 걸쳐 입고 있는 상태다.

유니콘과 결투를 치르면서 이 녀석의 웃옷이 죄다 넝마조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속옷 포함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읽은 기사 이야기에도 이런 장면이 있다.

이런저런 일을 당해 옷이 없어지거나 없어지는 여인 하나는 꼭 만나더라고.

그때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여인의 어깨에 기사가 망토를 걸쳐주며, 굉장히 닭살 돋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맨날 이런 장면이 적힌 페이지만 해어져 있는 걸 보면,이게 여자애들에겐 되게 잘 먹히는 모양이다.

여자애들인지 어떻게 아냐고?

애들이 가끔 연극놀이 할 때 보면 다 티가 난다.

대사를 아주 그냥 달달 외우고 있더라.

물론 나와 이 녀석에게 그런 가슴 설레는 장면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애새끼와 보모 아닐까?

‘안 추운데 뭐 어떠냐’며 거지꼴로 다니려는 이 녀석을, 내가 눈을 부라리며 억지로 입혔으니까.

바지도 군데군데 엉망이긴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바지까지 벗어줄 순 없잖아.

어쨌든 그 덕분에 아까 숲에선 좀 춥긴 했지만, 그래도 얘가 파렴치한 꼴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아, 물론 그건 내 심적 안정을 위한 거지, 다른 뜻은 없다.

……후우, 옷을 입고서도 속옷바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니 처음 알았어.

­­좀 불편한데…… 아으, 안에 거 벗어야겠,

­­여기서 벗지 마, 미친년아!!

아무튼 메린은 지금 위에 내 겉옷만 걸쳐 입고 있는데, 방한용 외투가 아니라서 가슴골이 훤히 보인다.

검사답지 않은 뽀얀 살결이 보여서 좀 민망하……

……잠깐. 살갗이 왜 보이지?

아, 맞다. 속옷도 같이 버렸지.

……그럼 쟤 지금 내 겉옷 속에 아무것도 안 입었다는 거잖아.

“……헉.”

드디어 너도 미쳤냐, 카엘 에스트렐?!

아니, 왜 쟤를 먼저 집에 안 보내고……!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무튼메린은 무죄였다.

완전무죄는 아닐지언정, 이 녀석의 행동엔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와 당위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마냥 칭찬할 수는 없다.

나는 메린의 양 어깨를 턱, 붙잡았다.

어딘지 체념한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론, 너 되게 잘했어. 그 변태는 당해도 싸. 뭐 다른 짓은 안 당했고?”

“다른 짓? ……아, 더듬더라. 엉덩이랑 사타,”

“뭐야?!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대낮에 뭔 지랄이야, 그게?! 와씨, 그 망할 년, 진짜 손모가지를 갈아버리든가 해야지!!

…………후우.”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메린을 마주보았다.

“……다음, 사회적인 의견. 너도 이게 한두 번은 아니니까 내가 뭔 소리 할지 알 것 같은데.”

“……상대가 살의를 품었을 때 빼곤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된다.”

“되게 잘 기억하면서 왜 지키지를 못하냐? 내가 말로 안 되면 그 자리를 벗어나거나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잖아. 이건 네가 잘못한 거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잘했다, 짜샤’ 하며 웃어 넘길 수 있겠지.

그러나 이 녀석은 안 된다.

메린에 한해선 결코 그럴 수 없다.

메린은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으니까.

고개를 떨군 메린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녀석이 시선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뭐야? ……맨날 헷갈리는 소리만 하고. 나보고 뭘 어쩌라고.”

“네가 어려워하는 거 알아.”

“……야, 그냥 너나 사회, 둘 중 하나만 따르면 안 되냐?”

“얌마, 나를 따른다고 하지 마, 말이 뭔가 이상하잖아. 그리고 전에 말했었지? 둘 중 하나만 따라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주홍빛 눈동자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도 안다.

마을 일원으로 살게 하려면 그냥 ‘사회적인 의견’만 주구장창 가르치면 된다.

다른 면에 대해 알려주는 건 이 녀석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그 어떤 사회도 규율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만 살지는 않는다.

한 명이라도 어기는 놈이 있기 마련이고, 이때 유연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위험에 빠진다.

예를 들어, 술집에서 어느 성질 더러운 놈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욕을 나에게 했다고 하자.

사회 규율은 이를 가만히 두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이걸 그냥 가만히 듣고 있겠는가?

같이 욕을 하며 말싸움하다가, 서로 주먹이 오가게 될 거다.

그러다 엄청 심각해지면 뭐, 칼 뽑고 싸우는 거지만.

그때는 먼저 칼 뽑은 놈이 잘못한 거다.

……어쨌든, 이게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나는 언젠가 이 녀석이, 다른 사람처럼 사욕과 규율의 경계선을 별 어려움없이 구분하며, 사회 속에서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난 이 녀석의 가능성을 믿는다.

“너도 힘든 거 알아. 그래도 좀더 힘내자고.”

“……모르면서.”

“알아.”

메린은 그 사람을 반송장으로 만들지 않고 깔끔하게 기절만 시켰다.

……집 안에 눕히지 않은 건 아쉽지만, 뭐, 적어도어디 다른 곳에 숨기지 않았다.

들키지 않으면 장땡이라는 말도, 절대로 들키지 않게 숨기는 방법도 잘 알고 있는데도.

왜냐?

마을 사람에게 해코지한 걸 숨겨도, 결국은 들킨다는 걸 아니까.

그럼 괜히 골치만 더 아파진다는 걸 기억하고 있으니까.

우린 아직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걸 아니까.

메린은 생각할 줄 아니까.

……이성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알아.

“너는 노력하고 있어.”

딴 새끼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지만 난 알아.

그래서 내가 이 굉장히 빡치고 답답하고, 가끔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생길을 걸을 수 있는 거야.

나 혼자 걷는 게 아니니까.

“그 쳐죽일 녀, 아니, 그 사람 깨어나면 사과해.”

“……”

“기절시킨 건 지나쳤어. 아무리 힘을 조절해도, 어떤 사람은 그 정도도 못 버티고 죽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네가 잘못했다는 거야. 사과해야 돼. 알았냐?”

메린은 약간 뜸을 들인 후,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녀석의 얼굴을 놓았다.

“다음에 그 사람이 또 그러거든, 손가락이나 손모가지만 부러뜨려.”

“……야, 공격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냐?”

“내가 경고해둘 거야. 그런데도 또 그러면, 어느 정도는 그 사람 책임이지. 처음은 말로 하고, 그 다음 경고, 마지막이 제압이야.”

이 녀석의 문제는 경고 없이 냅다 패버린다는 거다.

고향에 있었을 땐 아무도 이 녀석을 가까이하지 않으니까 별 문제없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겠지.

“그리고 제압 방법이 의식불명만 있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아무리 상대가 짜증나도 정도를 넘으면 안 돼.”

“……알았어. 선처할게.”

“그래, 제발 좀 선처해주라. 안 그래도 나 힘들다.”

이 이상 더 할 말은 없다.

나는 짧은 숨을 내뱉은 후, 메린의 안색을 살폈다.

……역시, 얼굴이 약간 어두워져 있다.

‘네 잘못’이라며 지적질을 당했는데 기분 안 나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냥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기운을 차리겠지만……

젠장, 애초에 얘 잘못이 아닌데.

“아, 그렇지.”

마침 잘 됐다.

나는 품속에서 네이멜에게 받은 꾸러미 하나를 꺼내어 메린에게 건넸다.

약간 풀이 죽은 그녀의 눈이 꾸러미와 내 얼굴을 오갔다.

“……뭐야?”

“젤리. 네이멜한테 얻었어.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끝내주게 맛있으니까 먹어봐.”

“……”

어라?

젤리라고 듣자마자 가져갈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다니 의외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싫어? 싫으면 이따 다시 주고.”

“……보통 네가 먹지 않냐?”

“너 주려고 챙긴 건데 내가 왜 먹냐? 다같이 나눠 먹으려고 따로 받은 것도 있어. 아니면 뭐, 너한테 하나 얻어먹으면 되지. 일단 맛이라도 봐. 자.”

젤리를 하나 꺼내서 메린에게 내밀었다.

녀석은 약간 뜸을 들이더니, 작게 입을 벌렸다.

쏙.

우물우물.

“……!”

그늘졌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펴졌다.

깜짝 놀라기까지 하고 있다.

훗, 그 심정 알지.

“엄청 맛있지?”

끄덕끄덕.

다시 그녀에게 꾸러미를 내밀자, 이번엔 순순히 받아 들었다.

어지간히 맘에 들었는지 꾸러미를 들고 싱글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내가 너냐?”

……이야, 역시 요정이 만든 젤리는 다르다니까.

시든 꽃처럼 축 늘어져 있던 걸 한 방에 원상복구시키네.

나도 모르게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들어가자.”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메린이 나를 불러세웠다.

제자리에서 몸을 반만 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메린은 내가 준 꾸러미를 두 손으로 감싸며, 얼굴 가득 웃음 짓고 있었다.

“……고마워. 이 말 하는 거 깜빡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천만에.”

정해진 인사말엔 정해진 답인사를 해야 하는 법이다.

……설령 굳이 전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완전히 기분이 풀린 메린이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이 손이 많이 가는 녀석과 함께, 위슨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오른편에 있는 거실을 슥 들여다보니, 널찍한 의자 위에 적갈색 머리카락의 피해자가 드러누워 있는데……

……역시 그 변태 마녀였다!

그녀를 돌보던 로나가 나와 메린을 보고 빙긋 웃었다.

“이야기 잘 되셨나봐요? 위슨 씨는 어디 있는지 안 보이고, 위슨 씨 어머니가 안쪽 방에 누워 계세요.”

“엥? 왜? 어디 아프셔?”

“아니, 그냥 기절한 거야.”

“네가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허? 아,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내 옆에 있는 녀석을 의뭉스러운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나 아니야.”

“……누가 뭐랬냐?”

“네 눈깔이 말 다하고 있다, 새꺄. ……위슨이랑 작업 중에 갑자기 들어와서는, 위슨에게 막 뭐라뭐라 소리지르더라. 그러다 조리대를 쾅 내려쳤는데, 하필 그 위에 있던 약초가 솥 안으로 들어가서, 펑!”

머릿속에 저절로 그림이 그려졌다.

아니, 어제랑 거의 똑같은 상황이잖아.

또 그 파랑새가 지랄했겠지.

“펑 터진 다음엔?”

“기절했어.”

“……아, 그래.”

그냥 사고였다.

솥이 폭발한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메린이 입은 내 옷은 깨끗했다.

이 녀석이 잽싸게 범위 바깥으로 피했나보다.

다행이다. 옷 버릴 뻔했네.

“그럼 위슨 찾아보고 올게. 작업장엔 없는 거지?”

“네.”

그럼 뒤뜰에 있나?

거실을 나와 뒷문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따라 들리길래 돌아보니, 메린이 내 뒤에 있었다.

“너도 오게?”

“심심해.”

“……그래라, 그럼.”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어보았다.

드와트네보다는 작지만 약초밭, 꽃, 덤불 등 어쨌든 있을 건 다 있다.

하지만 정작 위슨의 모습은 없었다.

“어라, 여기도 없네.”

로나가 작업장에는 없다고 했으니, 창고에도 없을 것이다.

그럼 남은 건…… 지하실뿐인데.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서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

까매!

어두운 걸 넘어서 완전 시커멓잖아, 이 계단!

이거 지하가 아니라 심연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안 내려가고 뭐하냐?”

“오, 주여…….”

“쫄았구만.”

메린은 한숨을 쉬더니 먼저 계단을 척척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계단이 보이나?

살짝만 미끄러져도 끝장날 것 같은데 겁도 없네!

……어쨌든 이제 와서 거실로 돌아갈 수도 없다.

조심조심, 메린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실 문은 빼꼼 열려 있었다.

홱 열어젖히려는 메린을 가까스로 말린 후,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실은 생각보다 환했다.

계단은 빛조차 삼켜버릴 정도로 극한의 암흑이 자리하고 있는데, 문 안쪽은 사물의 형태와 색깔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밝았다.

아, 조명이 있구나.

바닥에 놓인 커다란 고양이 모양 조명이 지하실 안을 환히 비추고 있다.

귀에만 불이 켜져 있는데 되게 밝네.

……잠깐, 저거 스라소니잖아.

그것도 위슨이 다루는.

스라소니가 앉아 있는 뒤쪽에는 큰 나무통이 있었다.

나무통과 조금 떨어진 곳엔 침상이며 서랍장이며, 침실에 있을 법한 가구가 놓여 있다.

아, 설마 여기, 위슨이 쓰는 방인가?

지하에서 자는 거야?

찰박.

물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보니, 나무통에 동그란 검은색 구체가 얹혀 있다.

저거 사람 머리 같은데.

……는 십중팔구 위슨이잖아, 목욕하고 있잖아, 당장 여길 나가야 되잖아!

일단 나는 무조건 나가야 되잖아!

그때, 좀더 커다란 물소리가 나면서 소녀가 뒤를 돌았다.

등허리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잡아 물기를 짜며 목욕통에서 나온 후……

“……”

“……”

봐 버렸다.

호리호리한 몸과……

아.

눈 마주쳤다.

“……!!”

위슨이 등을 돌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이 안 보여서 잘은 모르지만, 분명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을 거다.

하지만,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내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속히 퇴출(?出)하라!!”

스라소니가 우리를 위협하며 크게 외친 덕분에, 딱 달라붙었던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문을 박차고 나와,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허억, 헉, 헉……!”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공포가 아닌, 있을 수 없는 것을 본 충격에 기인한 떨림이다.

……대체, 내가 뭘 본……

아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일단 어디에 앉아야 했다.

여기 계속 있다가 힘이 빠지면, 지하실 계단을 굴러서 목이 홱 꺾일 수도 있다.

아니면 스라소니 발톱에 목이 날아가든가.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거실로 향했다.

“어라? 위슨 씨, 못 찾으셨어요?”

대답할 겨를도 없이, 나는 빈 의자에 무너지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카엘 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입이 가려져 있어도 망정이지, 말도 안 돼!

사람은 직감이라는 게 있다.

특히 성별에 관해선, 한창 나이대의 사람이 가진 직감은 거의 예지……까진 아니지만 아무튼 노인의 혜안보다도 뛰어날 때가 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혈기왕성 할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 하읍.

오. 산딸기맛이네.

꽃꿀로 만든 것도 좋긴 하지만, 역시 젤리는 과즙을 넣은 게 가장 맛있지, 가 아니라!

나는 메린을 쏘아보았다.

녀석은 젤리가 든 꾸러미를 손에 들고,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거리고 있었다.

“얌마, 너 나 표정 심각한 거 안 보이냐? 누군 지금 심각한 고민 중인데 장난이나 치고, 이 자식아, 내가 뭐 새냐, 입에 젤리는 왜 넣어?!”

“입 벌리고 멍청하게 있길래 혹시 반응할까 해서.”

“큭……!”

일반적인 과자나 사탕이었다면 집중이 절대 안 깨졌을 텐데, 하필 요정이 만든 끝내주는 젤리라서 그만……!

제길, 난 아직 멀었구나.

“카엘 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세요? 카엘 님 정도나 되는 분이 완전히 넋이 나가다니, 보통 일이 아닌 거죠?!”

……이거 말을 해야 되나?

근데 나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나도 큰 일이라 입이 간지러워 죽겠다.

하지만 이건 생각없이 털어놓을 우스개소리나 허풍거리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묵직한 이야기잖아.

근데, 진짜 내가 본 게 맞긴 한가?

내 눈과 머리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먼저 확인해야 한다.

다행히 내 바로 옆에 또 다른 목격자가 있지.

“……메린, 너 봤냐?”

“뭘?”

“아까 저기 밑에서…… 봤냐고.”

“뭐, 위슨이 목욕하고 나오던 거?”

앗.

왠지 맞은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거 십중팔구 눈을 마주치면 죽는다!

나는 재빨리, 하지만 자연스럽게 두 손과 팔을 지지대 삼아 이마를 짚고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이 취하는 자세이다.

마침 딱 맞는 자세이다.

난 지금 고민에 빠져 있으니까.

왜냐면 내가 본 건, 즐거운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가 파렴치한 짓을 당한 가련한 소녀가 아니라……

“……남자였다니, 씨발, 말이 되냐고……!”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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