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2화 : 용사여, 무엇을 택할 것인가? (1)
* * *
폐허에 멍하니 서 있어도 해결되는 건 없다.
……그래, 드와트와 상의해보자.
그나마 좀 정상적인 사람이니까 무언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걸음을 서둘러 드와트의 집으로 향했다.
“드와트! 계신가요우와악?!”
집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마자 내 몸이 훅 끌려가기 시작했다!
발이 다시 땅에 닿자, 머리가 핑 도는 듯한 느낌에 몸이 휘청거렸다.
누군가 나를 부축해주었다.
“……난폭한 방법을 써서 미안해.”
“드와트?”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책상, 옷장, 서랍장.방이다.
침실이다.
……침실?!
나도 모르게 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앗. 저쪽에 있……
철컥.
“……”
……잠겼다.
썩을.
“저기, 드와트. 저는 그냥 할 말이 있어서,”
“알아. 위슨에 대한 일이잖니? 마녀들의 소문은 번개처럼 빠르단다.”
드와트는 나에게 책상 앞의 의자에 앉도록 권한 후, 자신은 침대에 걸터 앉았다.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설마 그 아이가 사내아이였을 줄이야. 정말이지, 폴레가 우릴 단단히 속였구나.”
“그리고 수장님이 중요 재료라면서 위슨을 데려갔어요. 드와트, 말해주세요. 대체 수장님이 하려는 의식이 뭐죠?”
그녀는 녹색 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이다, 겨우 입을 떼었다.
“……마일린, 우리 어머니를 불러오는 거야.”
“마일린? 천 년 전에 있었다는 그 대마녀요?”
“잘 아는구나.”
그야 어제 들었으니까.
“근데 그 사람은땅에 묻혔잖아요? 그럼 뭐야, 지금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는 거에요?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마법이지. 어머니를 되살리는 건우리 자매들의오랜 숙원이었어. 다음주에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천 년 전에 죽은 대마녀를 부활시키기 위해, 위슨을 중요 재료로 써먹는다고?
“이게 뭔…… 아니, 그 애를 뭐 어쩌려고요? 마일린의 영혼을 빙의시킬 건가요? 근데 위슨은 남자잖아요! 남자 몸에 여자 영혼을 넣을 거에요?!”
드와트는 내 말에 미소지었다.
“후후, 보기보다 아는 게 많구나? 물론 아니야. 하고 싶어도 못해. 네 말처럼 위슨은 사내아이고, 어머니는 여인이니까.”
“그럼 뭘 할 건데요?”
“그 아이의 심장을 바칠 거야.”
다정한 미소를 지은 입으로, 드와트는 세상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베르메 님은 자신의 성질을 써서, 위슨의 생명을 대가로 마일린의 영혼을 소환할 거야.”
어느새 뻗어온 손이 내 두 뺨을 감쌌다.
차가운 느낌에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선언에 몸이 마비된 걸까?
“그리고 베르메 님이 어머니에게 그 몸을 내줄 거란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돌아올 거야.”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식이 죽은 어미를 그리워하며, 돌아오길 바라는 데에 이유가 필요하니? 정 필요하다면…… 그래, 마녀들의 부흥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렴.”
나에겐 로나처럼 (이것도 못 미덥긴 하지만) 거짓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드와트의 눈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친어머니도 아닌 고대인을 되살리려고 하고 있다.
그걸 위해 십 몇 년을 알고 지낸 아이를 죽이려 한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희생시켜요? 당신, 설마 진짜로 그게,”
“옳다고 생각하냐고? 물론 아니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괴물이 아니란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뺨을 스윽, 쓸어내렸다.
“……하지만 누군가는 희생해야 해. 그렇게 천칭을 맞추어야 해. 그래서 베르메 님이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사내’를 찾으신 거야.”
“아니, 왜 하필 남자여야 하는데요?!”
“그야,우리는 전부 여인이니까. 자매를 희생시킬 수는 없잖니?”
아, 그래, 그러시겠지.
지금까지 들은 미친 소리 중엔 그나마 정상적이긴 했다.
“카엘, 그거 아니? 사랑하는 내 조수도, 그 조건에 부합한단다.”
드와트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약간 열을 띄는 것 같다.
어느새, 그녀는 내가 앉은 의자 위에 한쪽 무릎을 대고 있었다.
“그러니 카엘…… 내 것이 되렴. 너만 그렇게 해준다면,”
가늘게 뜬 두 눈동자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드와트는 두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내 눈을 들여다보듯 가까이 내려다보았다.
“위슨 대신, 오베이를 바칠게.”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처럼, 수줍게 속삭였다.
순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 지금, 나보고 오베이 대신이 되라고 한 거지?
그럼 위슨 대신 오베이를 희생시키겠다는 거고.
“당신 미쳤어요?”
“아니, 난 그저 널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주세요.”
“왜? 위슨을 살리고 싶은 것 아니니? 너는 위슨을 살리고, 나는 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네가 내 것만 되면 다 이룰 수 있잖아? 이게 최선이야.”
최선…….
“카엘…… 사랑해.내 연인이 되어줘.”
“……”
드와트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고 있다.
아잇, 이거 내 인생 처음 받는 고백인데 왜 이 모양이야?!
분통을 터뜨리고 싶은 걸 눈을 질끈 감아 참았다.
심호흡을 한 후,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싫습니다.”
“……어째서?”
“존, 아니, 되게 소름 끼치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사랑하고 있니 뭐니 다 해놓고, 다른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기니 바로 갈아탄다?
그것도 모자라, 옛 상대를 거리낌없이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소름이 안 끼쳐?
물론 세상은 넓으니까 이런 사람이 취향인 사람도 분명 있겠지.
세간에선 그를 변태라고 한다.
“소름 끼쳐……? 내가……?”
“못 들은 걸로 해줄 테니 얼른 비키세요. 밀쳐버리기 전에.”
“그래…… 그렇구나.”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역시, 약간이나마 제정신이 있군.
아…… 근데 이 사람과 상의를 못하면 이제 진짜 어째야 되지?
“역시 너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콱.
내 얼굴을 감싼 드와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깐, 비키라니까 뭐하시는……!”
“그래도 상관없어.나는 이미 널 사랑하니까. 절대 놓치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큭?!”
드와트를 밀쳐내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리도, 심지어 고개마저도.
밀랍에 파묻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돌겠네!”
빌어먹을!
충격 먹어서 몸이 안 움직이는 게 아니었어!
드와트의 눈이 붉게 빛났다.
눈을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덕분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또 붙잡혔다.
망할.
“넌 내 거야. 내 동생, 내 아이, 내 조수, 내 사랑스러운 연인.”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카엘…… 카엘…… 널 영원히 사랑할게. 너를 지키며 돌봐줄게.”
마녀가 내 손가락 끝에, 목덜미에, 이마에,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 뜨거움에 살이 타는 듯했다.
고통 때문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녀는 그런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 속엔, 광기가 어려 있었다.
“너도 나를……? 아아……! 기쁘구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내 마음을 받아줄 줄 알았어!”
씨발, 내가 언제?!
이 여자, 진짜 미쳤어!
아, 젠장, 이젠 말도 안 나오네!
“자아, 맹세의 키스를…….”
마녀는 작게 헐떡이고 있었다.
이젠 흥분을 감출 생각도 없는 듯했다.
마녀의 손이 내 턱을 약간 벌렸다.
저항하려 해도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마녀는 애욕에 빠진 미소와 함께, 얼굴을 가까이 대기 시작했다.
직감이 왔다.
입술이 닿으면 끝이다……!
콰아아아앙!!
천둥 같은 소리가 머릿속까지 울렸다.
드와트가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내 위에서 사라졌다.
콰앙!
벽 쪽에서 무언가 묵직한 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서 큰 소리가 울린 탓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오오오, 움츠려졌어!
몸이 다시 움직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의 바닥을 구를 기세로 뒤로 물러났다.
문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일단 문 근처 벽에 기대어 앉았다.
덕분에 굉음이 울렸던 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건…….”
조금 전까진 책상이 있었던 벽에, 금속 막대기가 솟아 있다.
책상은 완전히 나무조각이 되어 널부러져 있었다.
드와트는 공간이동 마법으로 피했는지, 다른 쪽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그럼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나무 파편이 밟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노기를 띤 어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저벅, 저벅.
매캐한 연기를 주저없이 뚫고 들어오는 작은 체구가 보였다.
베일을 쓰고, 품이 커 펑퍼짐한 긴 사제복을 입은 로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벽에 꽂힌 금속 막대기를 잡고,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단숨에 뽑아 들었다.
파편이 튀면서, 보기만 해도 고개가 숙여지는 육중한 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근데 하루도 못 참고 이딴 짓을 벌여요? 하! 역시나, 당신도 그 여자와 똑같군요. 어쩐지 역겨운 냄새를 풍기더라니.”
거침없이 말을 내뱉으며, 로나는 드와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목소리에 잔뜩 분노가 서려 있는 것과 달리, 로나의 표정엔 아무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연한 금빛을 머금은 두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는 마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어라?
로나의 눈, 잿빛 아니었나?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당신이 우릴 대접한 마음만은 진실이었죠. ……물러나세요.”
“……후, 후후, 내가? 천만에. 꼬마 사제님, 물러나야 할 건 너야.”
마녀는 비틀대며 몸을 일으킨 후,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미 카엘은 내 손에 들어왔는걸? 이 아이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얌전히 물러나. 난 누구처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취향은 없단다.”
“영혼이 썩으면 뇌도 썩어버리나요? 헛소리는 작작하시죠.”
“못 믿겠으면 보여줄게. 자아, 카엘, 내 사랑,나에게 오렴……!”
녹아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문이 박살나기 직전에 당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향긋한 입김. 뜨거운 입술.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
물기 어린 눈동자.
상기된 뺨.
아름다운 얼굴로 독을 뿜어내던 마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벽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손에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나무 조각이 들려 있었다.
언제 집었냐, 이거.
마침 잘 됐네.
“그래…… 자아, 이리로 오렴……!”
환희에 찬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나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마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마 알고 있는 거겠지.
나는 웃음을 머금고,
들고 있던 나무조각을 마녀에게 던졌다.
나무조각은 마녀의 발치에도 닿지 않고 바닥에 튕겨 굴러갔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마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어째서……? 내가 한 ‘표시’도 그대로 있는데.”
표시? 아, 그 손님 어쩌고 한 그 표시?
젠장, 역시 뭔가 있었구나.
느낌 이상하다 했어.
“내 요리도, 차도, 과자도 먹었는데, 어째서 통하지 않은 거지?!”
“먹을 거에까지? 와, 이거처음부터 작정했었구만?!”
“말도 안 돼! 너도, 다른 마녀도, 아무도손댄 흔적이 없는데!”
내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나보다.
악에 받쳐 혼자 소리치는 마녀에게,무심한 목소리가 내려꽂았다.
“좋은 차를 얻어 마셨거든요. 우슬이라고 아시나요? 관절에 좋은 약초로 알려져 있지만, 저희는 그걸 부정(不?)을 없애는 데에 쓴답니다.”
차? 우슬?
차는 네이멜의 집에서 마신 것밖에 없는데……
아, 그러고보니 노움이 그랬던가.
우슬 뿌리를 달인 거라 몸과 영혼에 좋다고!
“그 분들은 별 뜻없이 대접한 거였겠지만, 덕분에 제 수고를 덜었네요.”
“크으……!!”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마녀는 또 다시 눈을 붉게 빛냈다.
“이미 난 맹세했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고! 무엇을 바치더라도!! 어떤일이 있어도!!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죽여버릴 거야!!”
“어리석긴……!”
로나가 두 손으로 철퇴를 쥐고 자세를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긴장감이 돌았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심지어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싸움이 터져버릴 것이다.
젠장,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오, 열렸네. 야, 카엘, 살아있냐?”
“엥.”
메린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방 안에 들어왔다.
양손을 겉옷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녀는 살벌하게 대치 중인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본 후, 나를 보았다.
“열렸으면 나오지, 뭐하고 있냐?”
“어……”
“아, 맞다. 오베이였나? 그 남자가 갑자기 공격하길래 제압했어. 두 다리 부러뜨리고 위층에 던져놨으니까 알고 있어라.”
“……”
어이씨, 사람 다리 분질렀다는 소리를 뭔 닭 잡아놨다는 듯이 하고 있어.
역시 이 자식이 제일 무섭다.
“너…… 그 옷…….”
마녀의 멍한 목소리가 들렸다.
앗.
그러고보니 메린 녀석, 아직 내 옷을 걸쳐 입고 있는 상태였다.
“너…… 너 이 여우 같은 년!! 내 오베이를 다치게 한 것도 모자라, 내 사랑 카엘의 옷을 입고 있어?!”
“와, 뭔 낯짝이 곰 뱃가죽보다 더 두껍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느닷없이 불똥을 맞은 메린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릴 뿐, 곧바로 내 팔을 잡았다.
“뭐해, 가자니까.”
“야, 눈치 없는 것도 적당히 좀…… 앗.”
마녀의 두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새된 고함을 내지르며 마녀가 손을 움직였다!
손에 무언가 검푸른 기운을 두르고, 휘두르려는 찰나,
콰아아아앙!
마녀의 몸이 벽을 뚫고 저만치 바닥을 굴러갔다.
로나는 아직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메린 역시, 내 팔을 잡은 채 눈을 깜박이고 있다.
……엉?
그럼 이거 누가 한 거야?
“네까짓 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가 들리며, 우리 앞에 다른 마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랏빛의 짧은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이 마녀는,
“네까짓 게 아가씨를 죽이려 해?!”
메린 앞에 서서 분노를 마구마구 내뿜는 이 마녀는 바로……
……그 ‘정상인인 줄 알았던 마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