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7화 : 스러지는 이슬에 작별을
* * *
내 앞에 모인 정령들이 몸을 낮추며 말했다.
“길을 택한 용사에게 전하노라.”
내 눈앞에 빛무리가 모이더니, 그 안에서 반지가 나타났다.
정령이 보여준 과거에서 보았던, 아무 장식도 없는 은반지다.
“그 반지를 우리의 영원한 친우에게 전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자를 구하라. 그리하면 숲은 영원히 그대에게 감사하리.”
빛무리에 감싸인 반지를 손바닥에 받고,꼭 쥐었다.
할 일은 정해졌다.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내 앞에 모인 정령과 요정들에게 말했다.
“나 네이멜 집으로 갈 줄 모르는데.”
“……”
“뭐. 모를 수도 있지.”
딱 한 번 왔다갔다 했을 뿐이다.
내가 숲지기나 사냥꾼도 아닌데 그 길을 어떻게 외워?
그러니 이건 이 녀석들이 날 뚱한 얼굴로 쳐다볼 이유가 되지 못한다.
‘역시 맹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중상모략을 당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우리가 인도하겠다. 우리 본연의 힘으로 그대를 돕는 건 이것이 마지막이리.”
생색내긴.
속으로 툴툴대고 있는데, 초록빛 말 형체를 한 정령이 앞으로 나와, 우리 두 사람의 주위를 빙글빙글 뛰기 시작했다.
왠지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진짜로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붕 뜨기 시작했다!
“작별이다, 용사여. 그대의 여로에 축복 있으라. ……그리고 우리를 기억한 옛 친구에게 안식이 찾아오기를.”
정령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몸이, 굉장히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메린이 날 던졌을 때와는 차원이 달라!
그때는 주변이 탁 트여 있기라도 했지 이건 나무 사이사이를 막 다니는데 으아악 부딪힌다 아니네 근데 이거 너무 빠른 거 아니냐 비명 지를 틈도 없어 숨도 못 쉬겠어 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네이멜의 집 앞에 엎어져 있었다.
집 문이 열려 있어서 그런지, 그루터기를 두드리지 않았는데도 오두막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안쪽에서 발소리가 울린 후, 아까 낮에 들었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으응? 왜 문이 열려 있지? 어머, 카엘 씨에 메린 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그리고 카엘 씨, 바닥에 얼굴 박고 뭐하세요?”
“……대지의 기운을 얼굴에 좀 담고 싶어서……”
네이멜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린 모양이다.
메린의 무자비한 목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 녀석, 그냥 여기까지 날아오는 게 쫄려서 기운 빠진 것뿐이거든요.”
“시끄러, 임마. 사실(fact)로 공격하다니 이 비겁한 자식.”
“손발보단 낫지 않냐? 난 그게 더 편하긴 한데.”
“예. 훨씬 낫습니다. 앞으로도 그리 해주십시오.”
“너 하는 거 봐서.”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네이멜의 시선을 느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들고 있던 성검은 일단 다시 검집에 넣었다.
“어어, 그……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그 전에 이거 먼저…….”
안에서 차 마시다 까먹을라.
나는 꾹 쥐고 있던 손을 펴서, 네이멜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내 손바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웬 반지? 유실물은 탑의 그 애들에게 맡기세요.”
“당신 거에요.”
“제 거요? 으응~ 기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단 껴봐요.”
네이멜은 주춤거리며 내 손바닥 위의 반지에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두 손가락이 반지에 가까이 가다가……
다시 뒤로 홱 빠졌다!
“왜 그래요?”
“……왠지 꺼려져서……. 진짜 이거 제 거에요?”
“아, 맞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그러나 네이멜은 좀처럼 반지를 집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반지를 향해 뻗은 손을 자꾸만 다시 거두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러다 날 새겠네.
제길, 그냥 반지 끼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나.
나는 일단 다시 반지를 손 안으로 감추었다.
반지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서 다행이라는 듯이, 네이멜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쉬운 일이 하나 없구나.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어딘지 주눅이 든 네이멜에게 말했다.
“차 한 잔 하시죠.”
“……네, 그러죠.”
당당히 차를 요구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손님, 그리고 축 쳐진 걸음으로 뒤를 따르는 집주인.
우리 아버지가 이걸 보면 버릇없는 새끼라며 한 대 후려 갈길 거다.
하지만 예의를 차리기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이구, 요 버릇장머리 없는 놈 좀 보게. 네가 여기 주인이냐?”
“……시끄러, 임마.”
……어이씨, 순간 진짜 아버지인 줄 알았네.
짜식이 놀래키고 있어.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노움이 내준 차를 마시며, 나는 네이멜에게 위슨이 붙잡혀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차를 조금 쏟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대, 대체 그 애를 왜요?!”
“제물로 쓰겠답니다. 이전부터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있었다네요.”
“네?! 그럼…… 위슨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당탕타당!!
엄청난 소리를 내며 네이멜이 의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
물론 깜짝 놀랄 소식이긴 하다.
충격 받을 만도 하고.
……근데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는 아니지 않나?
떨어지는 방식도 엄청 옛날 같은데.
네이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잠시 말없이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머리를 감싸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우아아아아아아!”
그러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격한 반응에 놀라서, 내 손에 차를 엎지르고 말았다.
뜨거!
“좀 진정해요! 그렇게 충격이 커요?!”
“나…… 난 그것도 모르고……!”
새하얗게 질렸던 그녀의 얼굴은, 이번엔 또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애 앞에서 몇 번이나 옷 갈아입고! 같이 목욕하자고 권하고! 칭찬한다고 껴안고 이마에 뽀뽀했는데!! 어쩐지 같이 목욕 한 번을 안 해준다 했어!!”
“……”
숨은 추행범이었다.
이야, 그런데도 지금까지 안 들켰던 거야?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아니, 뭐…… 그 애 자신도 안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아아아아아아!!”
따스한 미소와 함께 상기되어야 할 아름다운 추억들이 처참한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으랴……!
이게 다 베르메 때문이다.
그보다 제일 중요한 얘기는 따로 있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놀라면 곤란한데.
이거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갑자기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튀는 거 아니야?
음…… 차라리 이 사람을……
그때, 메린이 내 팔을 콕 찌르더니 귓속말을 해왔다.
“……야, 너 이 사람 정체 알려줄 거지? 어디 묶어놓고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
“……”
……뭐, 라고……?
충격이다.
내가…… 내가 이 녀석이나 생각할 법한 생각을 했다니!
안 되지, 안 돼.
상식인이 되어야지, 카엘 에스트렐!
아까 본 과거 때문에 너무 감정적이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정신 차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임마. 어떻게 사람 팔다리를 묶어 놓고 이야기를 하냐? 제대로 대화가 될 리가 없잖아.”
“저번에 호숫가 아저씨한텐 직접 했으면서.”
“그건 그 사람이 위험한 사람일수도 있으니까 그랬던 거지.”
“……그런 걸 궤변이라고 하지 않냐?”
……아까부터 진짜!
메린 주제에!
그동안 네이멜은 진정되었는지 다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손이 하도 떨려서 찻잔이 받침대 위에서 아주 그냥 왈츠를 추고 있지만 뭐, 제대로 앉아 있는 게 어디야.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나에게 물었다.
“……근데, 위슨을 왜 제물로 바치려는 걸까요? 대체 무슨 의식을 하려고?”
“아, 그거.”
네이멜의 격렬한 반응 덕분에, 나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침착한 상태였다. 찻잔을 내려놓고,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놀라지 마세요.”
소용없겠지만 일단 말해두었다.
“……베르메는 마일린을 되살리려고 하고 있어요. 위슨의 생명을 바치는 대신, 그 영혼을 다시 불러올 거래요.”
“아, 아니, 그게 무슨……! 그건 불가능해요!”
음, 마법적으로도 원래 불가능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맞아요. 불가능해요. 왜냐면, 네이멜. ……당신이 바로 마일린이니까.”
나는 정령이 보여준 과거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했다.
“……”
……응? 안 놀라네.
앉은 상태로 기절한 건가 싶었는데, 네이멜은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 제일 놀랄 줄 알았는데, 놀라기는커녕 굉장히 차분하다.
설마 잔 내려놓은 다음에 뭔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아니었다.
대신, 네이멜은 엷은 미소를 띄었다.
……과거에서 보았던, 서글픈 미소였다.
“……그렇군요. 제가, 마일린…….”
“안 놀라시네요?”
놀라지 않는 것에 놀라며 던진 메린의 질문에, 네이멜은 찻잔 속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놀라고, 있어요. 마일린에 대해선 저도 들었었으니까요. 놀라고 있긴 한데…….”
“무언가 짐작하고 있었나요?”
내 물음에, 네이멜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표정.”
“와아, 카엘 씨는 사람 표정을 잘 읽으시나봐요?”
“예에, 뭐. 조금이요.”
대강 얼버무렸다.
……좋아서 체득한 기술도 아닌데, 길게 떠벌릴 필요는 없지.
네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여러모로 납득했어요. 왜 자꾸 그 조각상에 끌리는지, 왜 기억은 싹 날아갔으면서 마법은 기억하고 있는지, 왜 이따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꿈에 나오는 건지…….”
“그럼, 믿으시는군요? 당신 자신이 마일린이라는 걸.”
“사실이겠죠. 두 분, 정령이 여기까지 날려준 거잖아요? 그리고 그 반지에 마법이 걸려 있기도 하고요. ……네, 믿어요. 당신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좋아, 됐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믿는다면서 왜…….”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네?”
네이멜은 고개를 떨구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반지를 끼면, 네, 저는 마일린으로 돌아가겠죠. 천 년도 더 전에 살았던 마녀가 될 거에요. ……그럼, ‘나’는? ‘나’는 그대로 사라지게 될까요? 아니면 남는 걸까요? 만약, 남김없이 없어져 버린다면……?”
“아.”
“겨우 백 년이지만, 마일린의 세월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백 년 조금 넘게 살아온 내 기억도, 추억도, 아픔도…… 전부, 전부 묻혀버리게 되잖아요! 이 몸의 원래 주인처럼!”
아뿔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마일린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준 그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기억하고 있었다면, 네이멜이 처음 마녀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분명 언급되었을 텐데.
그녀를 알던 사람들이 모두 그날 다 죽은 것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아마 그날, 죽은 걸로 치고 잊어버렸겠지.
마일린이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변해 있었다.
본래 마일린의 목소리도, 몸 주인인 프리야의 목소리도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그러니 아마 얼굴도 달라졌을 거다.
……그 마녀들이, 자신의 자매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물론 프리야는 그날 죽었다.
마일린을 위해 내어주지 않았어도 어차피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적어도 무덤에 묻혀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아니면 마녀가 되어 있거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네이멜이 무얼 두려워하는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 되는 걸 무서워하고 있다.
반지를 끼면, 그녀는 네이멜이 아니라 대마녀, 아니, 옛날로 치면 대현자 마일린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마일린의 마지막 기억이 어느 부분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반지를 만들었던 그 시점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럼 아마, 마일린은 자신이 백여 년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고 느끼겠지.
기억을 나눈 시점에서, 네이멜과 마일린은 별개의 사람이 된 것이다.
……지금 네이멜이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위슨밖에 없다.
사는 곳도 다른 마녀들은 아무도 모르는, 깊은 숲 속에 감춰져 있다.
탑에 무언가 남긴 것도 없다.
일주일만 지나도,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에서 잊혀져, 완전히 죽어 없어진다.
“카엘.”
“안 돼.”
“……그래.”
무언가 속삭이려던 메린은,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얌전히 물러났다.
……녀석이 이 상황에 뭘 말하려고 한 건진 뻔하다.
그냥 강제로 반지를 끼우자는 거겠지.
그딴 짓은 절대 못해.
아니,하면 안 돼.
마일린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라도, 네이멜의 삶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설령 그게 마일린, 아니, 네이멜 그녀 자신일지라도, 용납되지 않을 횡포다.
‘그럼 포기할 건가?’
아니.
나에겐 포기하고 어쩌고 할 권리조차 없다.
이 반지엔 내가 어쩌지 못할 만큼 절실한 소원이 담겨 있다.
애초에 내 반지도 아니고.
그럼 남은 건?
설득밖에 없다.
나는 반지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네이멜의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네이멜.”
“……”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를 견디듯이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굳이 눈을 보며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대로 이야기하는 게 나에겐 훨씬 편하다.
지금부터 나는, 끔찍한 짓을 할 거니까.
“당신의 삶을 내가 감히 평가할 순 없어요. 하지만 요정들과 같이 살고, 또 아까 저희가 올 때 정령이 데려왔다는 걸 바로 아신 걸 보면, 분명 당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요정과 정령의 친구이겠죠.”
“……”
“다 이해한다는 둥, 뭐, 그런 입바른 소린 안 해요. 쓸데없이 위로하는 말도 안 할 거고. 대신,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네이멜, 당신은 사라지지 않을 거에요.”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나 쟤, 그리고 여기 없는 로나도 있고. 위슨도 있고. 누구보다도, 이 숲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기억 속에서 영원할 거다. 그런 이야기인가요?”
“뻔하죠? 하지만, 맞아요. 숲은 마일린을 쭉 기억하고 있었어요.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숲은 당신도 온전히 기억할 거에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젠장.
말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면 뭐해.
결국 ‘너 말고 딴 사람이 필요하니 사라지라’는 소리잖아.
빌어먹을.
누구보다 그 말을 싫어하는 내가, 그딴 소리를 입에 올리다니.
“그러니, 걱정 마시고……”
……뒷말을 삼켰다.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해야 되는데.
“반지를……”
두 눈이 뜨거워지며, 그녀의 얼굴이 부옇게 흐려졌다.
정령은 위슨을 두고 ‘사랑도, 축복도, 환영도 받을 수 없는 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 사랑받지도, 환영받지도 못한 건 누구인가?
정말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받을 수 없었던 건 위슨이 아니라……!
“그래, 어쩌면 반지를 껴도, 기억은…… 기억은 그대로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쉿.”
어느새 나는, 반지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있었다.
고개만 돌린 채 나를 보고 있던 네이멜은, 어느새 내 얼굴을 감싸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울지 마세요.”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가만히 내 눈가를 쓸었다.
어쩐지 눈앞이 잘 안 보이고, 말이 잘 안 나온다 싶더라니.
……라고, 속으로 쓰게 뱉으며 주의를 돌리려 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울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짓을 해야 되는 이 상황이 분했다.
면전에서 죽어달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네이멜에게 미안했다.
자그마치 백 년이다.
한 인간의 일생이나 다름없는 세월이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동안, 마녀에게는 적대시되고, ‘숲의 자녀들’에게 백안시 받아왔다.
사랑을 베풀어도 보답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홀로 버텨 왔는데.
기억도 안 나는 ‘이 섬에서 해야 할 일’ 때문에 어딘가로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게 견뎠는데……!
그런데 그 결말이, ‘너는 필요없으니 사라지라’는 말을 듣는 거라니.
그것도 하필 나한테.
……뭐냐고, 이거.
나와 저 녀석의 결말도 이렇게 될 거라는 거야?
미리 알고 있으라는 거야, 뭐야……?!
“카엘 씨.”
네이멜이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시선을 들어 그녀와 마주보았다.
“고마워요.”
자신에게 잔혹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녀는 웃으며 감사의 말을 입에 담았다.
“……고맙다뇨? 저, 저는 지금……!”
“‘나’를 위해 울어주고 있잖아요?”
황금빛 눈동자는 따스한 빛을 품고 있었다.
“아무 의미없던 네이멜을 위해. 곧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나’를 위해.다들 마일린이 돌아오기만 바라는 이 순간에.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네이멜은 내 얼굴을 감싼 손을 떼고, 기쁜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 응. 반지를 낄게요. 저도 위슨을 구하고 싶고, 그 애들을 어떻게 하고 싶고요. 근데 그러려면 ‘나’로는 안 돼요. 마법도 약하고, 무엇보다도 정령들이 잘 안 도와주니까. 그 애들, 자기 스스로를모르는사람을 싫어하거든요. 이 몸을 준 아이의 소망을 저버려서도 안 되고요.”
“……”
“후후, 혹시 알아요? 어쩌면 정말로, 지금 이 상태에서 마일린의 기억만 추가될지도 모르죠!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아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는,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기억을 새겼으니까.”
네이멜은 한 손으로 반지를 쥔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반지를 집으려다 멈칫했다.
역시, 말로는 괜찮다고 해도……
“나도 참! 깜빡했네.”
그녀는 반지를 집으려던 손을 거두더니, 오른손을 나에게 뻗었다.
꼭 인사를 요청하는 귀부인처럼, 손등을 하늘에 보인 채.
“……?”
손등에 키스해달라는 건 아닐 테고……
뭐지?
“……마지막 선물을 주세요. 마일린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거든요.”
“네? 뭘……?”
“반지 끼워주세요.”
“예?!”
그녀는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신사분이 숙녀에게 반지를 바치는 거잖아요? 당연히 당신이, 내 손가락에, 직접 끼워야죠!”
“……저 그런 거 안 해봤는데요.”
“어머머, 그런 것도 안 해보시고 여태 뭐하셨어요?”
“당신도 받아본 적 없다면서요?!”
쿡쿡 웃으며, 그녀는 오른손을 흔들었다.
“아, 얼른요! 마지막에 아름다운 기억을 갖고 가고 싶단 말이에요! 아무 손가락이든 괜찮으니 사내답게 콱 쑤셔 박으시라고요!”
“쑤셔 박다니, 그게 숙녀 입에서 나올 소리에요?! ……나 참.”
반지 끼우기라니.
헛허, 세상에, 별 짓을 다 하네.
커다란 창문에선 달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집엔 촛불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달빛만으로도 방 안이 밝아지니 필요없었던 거겠지.
네이멜의 오른손을 내 오른손으로 가볍게 받쳤다.
그녀의 손은 역시, 약간 떨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숙녀를 부끄럽게 하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온 힘을 다해 괜찮은 척하는 그녀를 위해, 나 또한 각오를 다졌다.
아무 손가락이나 상관없다고 했지만, 역시…… 약지가 좋겠지.
가느다란 네이멜의 약지를 부드럽게 잡고, 천천히, 반지를 끝까지 밀어넣었다.
아무 장식도 없는 투박한 은반지에서 강한 빛이 번쩍였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내 앞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긴 한숨.
“마침내, 때가 되었구나……”
그렇게 말하며 내 오른손을 맞잡는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증표를 가진 자여.”
붉은 머리카락에 뾰족한 귀,
……그리고 슬픈 빛을 띄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대현자, 마일린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