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8화 : 돌격 앞으로!!
* * *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아직 새 한 마리도 깨어나지 못했을 시간.
숲 속 깊은 곳의 오두막집에선, 벌써 아침식사가 끝나고 한창 모닝 티타임 중이었다.
내 평생에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건 진짜 손에 꼽히는데, 물론 원해서 이 시간에 일어난 건 아니다.
근데 왜 일어났냐?
어젯밤에 내가 여기서 숙녀에게 반지를 끼워준 후, 요정 새끼들이 ‘마일린이 돌아왔다’면서 개지랄을 떨며 밤새도록 연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걔네들이 신나게 좋아하는 거 자체가 고까운 건 아니다.
영원한 친구라 부르는 사람이 진짜로 다시 돌아왔는데 당연히 환호하지.
좀 많이 씁쓸하긴 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걔네들이 축하 연회를 연 건 이해할 수 있다.
난 그렇게까지 야박한 놈은 아니다.
애초에 난 그 연회에 끼지도 않았고.
섬세하고 세심한 감성의 소유자답게, 나는 놀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아서 대충 구석에 드러누웠고,
메린은 원래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서 내 위에 담요 던지고 자러 갔으며,
마일린은 요정들과 약간 어울린 후 침실로 들어갔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와 메린은 처음부터 잤다.
마일린은 요정들과 ‘약간만’ 어울려주고 자러 갔다.
근데도 요정들의 연회는 밤새 이어졌다.
……애초에 지들끼리 놀려던 걸 마일린 핑계로 여기 몰려와서 난리친 거잖아, 거지 같은 새끼들, 저리 가서 놀든가 왜 집 근처에서 지랄이야!!
……덕분에 모두 잠이 부족한 상태였고, 특히나 나는 잠들자마자 꿈을 꿔서 눈이 더 일찍 뜨인 탓에 더 피곤했다.
떠올리기도 싫은 내용에 또 쓸데없이 생생해가지고……
이건 필시 어젯밤 일 때문이다.
하, 너무 감성이 풍부한 것도 안 좋구만.
다행히, 아침식사를 마칠 즈음엔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요리들도 전부 브라우니라는 요정이 만들었다는데, 젤리도 그렇고, 역시 요정이 만든 음식엔 무언가 기력 회복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하마터면 오늘 하루 그대로 날릴 뻔했네.
“……”
테이블엔 찻잔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도, 그리고 마일린도 아무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식사할 때야 음식에 대해 떠들면 되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당연히이 사람이 어디부터 기억하고 있는가, 이다.
하지만……
……도무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일린의 과거에 대한 것도, 어딘지 무거운 분위기가 될 것 같아서 꺼내기 어렵고.
그래서 나는, 자연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엘 씨.”
긴 침묵을 깬 건, 역시나 미숙한 내가 아닌, 천 년도 더 넘는 연륜을 지닌 마일린이었다.
“……당신은 이제 탑으로 가실 거죠?”
“네.”
단호하게 대답했다.
“계획이 있나요?”
“특별히 세운 건 없어요.”
“돌격이라도 하려고요?”
“아마도?”
“……”
왜. 뭐.
돌격이 뭐 어때서!
뭐!
메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 녀석, 제대로 된 토벌 작전에 참가해본 적도 없는 완전 생초짜거든요. 빡치는 놈들 다 조져버린다는 생각밖에 없으니 귀담아듣지 마세요.”
이 자식이 어제부터 희한하게 논리적이네!
메린 주제에!
“너 이 자식, 어제부터 자꾸 비겁하게 사실(fact)로……헉.”
말하다보니 중요한 걸 깨달았다.
여긴 요정들이 사는 숲이잖아.
요정들이 가끔 하는 짓이 뭐냐?
딴 사람 행세하며 속여 먹는 장난이잖아!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수수께끼는 다 풀렸다!
“너, 가짜지?!”
“뜬금없이 뭔 소리야, 잠 덜 깼냐? 내가 깨워줘?”
“메린의 머릿속은 밤이 되면 굳어! 해를 봐야 겨우 돌아가기 시작한다고! 그런 애가 이렇게 새벽부터 사람을 논리로 팰 수 있을 리가 없어! 진짜를 돌려줘, 이 사악한,”
쿠웅!
……녀석이 테이블에 주먹을 세우더니, 내 뒤통수를 잡고 그 위로 꽂아버렸다.
이러면 눈앞이 아찔할 만큼의 고통은 느끼지만, 코뼈가 멀쩡하기 때문에 맞은 티가 거의 나지 않는다.
흔적이 옅으니 고발도 못한다!
이런 악랄한 공격을 태연하게, 막힘없이 매끄럽게 시행하다니.
소름이 돋는 이 무시무시함……!
음, 본인이 맞군.
“……진짜 메린이었구나. 다행이다.”
“너도 드디어 잠이 깨서 다행이야.”
덧붙여, 왠지 머리가 맑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마일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은 로나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레볼트는 그 애 혼자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고 하긴 했는데…… 마일린, 그 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없나요?”
마일린은 이상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대답했다.
“정령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저기, 근데 안 아파요? 굉장히 태연하게 앉아 계신데…….”
“아픈데요.”
“그, 그래요?”
“네. 그럼 미안하지만 마일린, 지금 로나가 어디 있는지, 무사한지 확인해주세요.”
마일린은 어딘지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감고 입술만 살짝살짝 달싹거렸다.
욱신거리는 이마를 슬쩍 건드려보았다.
앗. 혹 났다.
“음…… 로나 씨는 지금부엉이탑 동쪽의 감옥탑에 있어요. 아직 무사하시고요.”
“엥? 왜 거기에…… 혹시 붙잡힌 건가요?!”
“아니요. 갇힌 게 아니라…………가뒀는데요?”
“……예?”
가뒀다니? 마녀를? 감옥에? 로나가?
……뭔 상황이야, 대체.
마일린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감옥탑은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 정령들도 잘 보이지 않는대요. 그래도 바깥은 좀 심각해요. 마녀들이 출입문을 둘러싸고 있네요. ……응? 왜 그러세요?”
“네?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르겠네.
로나가 누구인지 안 물어본 걸 보면, 그 애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데.
하지만 마일린은 마녀들을 ‘그 애들’이 아니라 ‘마녀들’이라고 불렀다.
누가 누구의 기억을 이어받은 상태인 걸까?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뜬 후, 마일린이 전해준 말에 대해 생각했다.
마녀들이 문을 둘러싸고 있다.
그건 즉, 그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감옥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로나가 바깥으로 나오길 벼르고 있는 거지.
하지만 로나가 어젯밤 내내 마녀들과 대치했다면?
……아무리 전투사제라 해도 피로가 상당할 것이다.
설령 로나가 감옥에서 휴식을 취했더라도, 감옥인데 푹 쉬었을 리 만무하다.
가능한 빨리 합류해야 해!
“그 다음은요?”
“로나가 누굴 가뒀다고 했죠?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위슨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마녀들은 자신들끼리 거의 실시간으로 소식을 주고받으니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입을 열게 만들 겁니다.”
……설사로나의그 의식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불게 만들어야 한다.
마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두 분 먼저 감옥탑으로 가세요.”
“네? 당신은요?”
“전 준비할 게 좀 있어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지만, 당신은 한시라도 빨리 로나 씨와 합류해야 하니 먼저 가세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마녀들의 마법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갈 수밖에 없다.
그걸 위해선 무엇보다도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큰 문제가 있다.
나는 마일린을 진지하게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마일린.”
내 목소리에 심각성을 느꼈는지, 마일린도 진지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저 마을로 가는 길 모릅니다.”
“……”
뭐.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건데?
여기 와본 건 이제 겨우 두 번째잖아, 그것도 한 번은 정령이 휙 날려서 왔잖아, 길을 외웠을 리가 없잖아!
왠지 건조한 눈으로 보는 마일린에게, 억울한 마음을 한껏 담은 시선을 마구 쏘아주었다.
타닥, 타닥, 타닥.
경쾌한 발굽 소리가 숲 속에 울려퍼졌다.
말이냐고?
아니, 사슴이다.
아니, 정령이다.
마일린은 우리를 위해 바람의 정령을 불러주었고, 그 정령이 나와 메린 두 사람을 한꺼번에 태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사슴으로 변한 것이다.
“최대한 납작 엎드리는 게 좋을 거에요. ……그럼, 이따 뵐게요.”
휘익!
마일린이 휘파람을 불자, 사슴이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제 정령들이 직접 날려줬을 때보다 느리긴 해도, 훨씬 안정적이다.
승마 경험 덕분인지도 모르지만.
물론 사슴이라 나무뿌리를 콩콩 뛰어서 넘기 때문에, 자칫하면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 위험을 지적하며 메린이 뒤에 앉아선 내 등에 찰싹 붙었는데, 이걸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도는 줄 알았다.
아니, 이 녀석 지금 속옷도 없이 셔츠만 달랑 입고 있다고!
이게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냐고!
……라는 사소한 투정은, 출발하자마자 죄다 날아가버렸습니다.
이야~ 말 타고 울타리 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가지 쳐맞을까봐 자꾸 올라가는 고개를 숙이고,
퐁퐁 뛸 때마다 떨어질까봐 다리와 팔에 힘 바짝 주느라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숲을 빠져나오자, 하늘에 이제 막 해가 떠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세상에, 그 숲을 이렇게 빨리 빠져나오다니.
우릴 감옥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는지, 사슴은 숲을 빠져나온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흑단나무가 스스로 앞으로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흑단나무에 비하면 현저히 작은 복층 건물의 입구를 마녀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안에 있구나!
어떻게든 빈틈을 노려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 왔구만! 크게 한 방 갈 테니 꽉 잡으쇼!!”
“엉?”
사슴이 땅을 박찼다.
웬만한 나무 한 그루 높이까지 단숨에 뛰어오른 후,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아냐, 이건 떨어지는 게 아니야!
돌진이다!!
사슴은 건물의 문 앞 바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부딪힌다아아아아!
“응?”
사슴의 머리가 바닥에 닿는다 싶었는데, 갑자기 사슴의 모습이 사라지며 몸이 둥실 떴다.
그와 동시에,
“꺄아아아아아아!!”
우리 주변에 엄청난 돌풍이 휘몰아치며 마녀들을 죄다 날려버렸다!
괜히 바람의 정령이 아니구만.
메린이 발이 땅에 닿자마자 문으로 뛰어가 손잡이를 돌리고 바깥으로 당겼다.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끼기긱 열리기 시작했다.
로나가 문을 잠그진 않은 듯했다.
“서둘러!”
틈이 벌어지자마자 문 안으로 뛰어들어,두 발짝 정도 안으로 들어가서 우뚝 멈춰 섰다.
어쩔 수 없었다.
한 발짝만 더 갔다면, 내 갈비뼈는 가루가 되었을 테니까.
“어라라? 카엘 님?”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맑고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나야.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카엘 님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메린 님도 무사하시죠?”
“……응. 일단 이거 좀, 치워줄래?”
“아, 네!”
강제 예절주입기가 멀어지고,나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우씨, 설마 로나가 문 앞에서 대기타고 있었을 줄이야.
저거 맞았다면……
“히으윽.”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응? 너 뭐하…………아아.”
그동안 철문을 닫고 온 메린은, 한 눈에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나를 잠시 내버려두는 소박한 배려를 베풀며, 녀석은로나에게 물었다.
“로나, 여기서 밤샜어?”
“아니요. 조금 잤어요. 여긴 마녀들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대요.”
“문도 안 잠그고?”
“마녀들이 열쇠를 갖고 있거든요. 바리케이드로 삼을 만한 것도 없고요.대신 우슬초 연기 피웠죠. 그럼 역한 냄새를 풍기는 놈들은 절대 못 들어오거든요. 뭐, 그 탓에 이 안에 있는 마녀들도 좀 고생했지만요.”
로나는 풀 한 포기를 흔들며 헤헷, 웃었다.
저거, 그저께 나한테 준 그 풀이잖아.
……그래서 침입자가 내 방에 못 들어왔었던 거구나.
“무엇보다도, 히히, 두 분이 와주실 거라 믿었답니다!”
“훗, 당연히 오고 말고. ……그래서 로나, 마녀를 가뒀다며?”
“네! 확실하게,두 마리잡아 처넣어두었어요!”
“두 명! 마리가 아니라 명! 아니면 그냥 숫자만 세줘!”
엄청 빡쳤나봐.
난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짐승 취급은 못하겠는데…….
“마녀들은 위에 있어요! 가요!”
로나는 우리를 데리고 건물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자 수많은 창살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 중에 이미 쓰는 임자가 있는 건 단 세 개뿐이었다.
“둘이라며?”
“하나는 이미 쓰고 있었어요.”
아, 레볼트인가?!
“이 발소린…… 아가씨? 아아, 내 아가씨가 날 보러 와주셨어~”
역시, 하나는 레볼트였다.
두눈이 천으로 싸인 채, 팔다리가 꽁꽁 묶여 있다.
그리고……
“……흐으, 우윽. 으으어으으…….”
……적갈색머리의 엘프 마녀 옵센과 처음 보는 마녀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끈적하게 웃음을 흘리던 그 마녀가, 말만으로 사람 정신을 오염시키던 그 변태가!
쇠창살 안쪽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부들부들 떨며 괴이한 신음을 흘리고 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동안 로나가 대체,무엇을 했길래?
“로나, 너…….”
“맞다. 두 분께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요.”
로나는 환히 웃으며 내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모르는 게 좋을 거라는, 확연한 메시지였다.
그래. 어차피 나도 생각은 하고 있었잖아.
로나는 그걸 먼저 처리해준 것이다.
게다가 저 엘프 마녀는 줘패고 싶었……긴 한데, 그래도 저건 너무 심하지 않나?!
……아니야.
어차피 이미 끝난 일이야.
흘려보내야 돼.
나는 진지한 얼굴로 로나를 마주보았다.
“뭔데?”
“위슨의 위치요. 지금 마녀들의 제구고(???)에 갇혀 있대요. 제구고는 부엉이탑의 맨 꼭대기층에 있고요.”
“꼭대기?! 그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된다고?!”
우리는 마법을 못 쓰니 탑 안의 이동장치인 거울을 작동시킬 수 없다.
어디 계단이 있나?
근데 거길 언제 올라가?!
제길, 마일린이 그 거울을 다룰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 마세요! 이 분이 도와주신다고 했거든요!”
로나는 웃으며 감옥에 갇힌 마녀 중, 레볼트를 가리켰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두 눈은 천에 가려져 있고, 팔다리는 꽁꽁 묶여 있는 상태이다.
“……로나야……”
“아니거든요! 뭔 생각하셨는지는 몰라도 저 아니에요! 제가 여기 왔을 땐, 이미 이러고 계셨어요!”
“근데 왜 우릴 돕겠다는데도 안 풀어줬어?”
“안 열려서요.”
“그렇구나.”
타당했다.
쇠창살문은 열쇠로 열고 잠그는 구조였다.
마녀들의 감옥 치고는 굉장히 평범하다.
마법으로만 잠그고 열 수 있는, 뭐 그런 장치가 달렸을 줄 알았는데.
아, 여기 마법이 안 통한다고 했지.
하긴 마녀에게서 마법을 빼면 그냥 일반인이지, 뭐.
일반인이 어떻게맨손으로쇠창살을 부수고 탈출하겠어?
“……핫!”
“……”
물론 맨손이 아니라고 해서, 검으로 창살을 잘라버리는 사람이 정상 범위에 들어가진 않는다.
세상에, 검 이빨도 안 나간 거 봐.
우리 마을 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 최고급품인 게 아닐까?
“와, 이게 되네.”
저지른 장본인도 놀라고 있었다.
아무튼 메린이 감옥을 물리적으로 열어준 덕분에,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레볼트, 깨어 있죠?”
“네. 으음, 그 목소리, 부스러기 씨 맞죠? 내가 엘프가 아니라서 소리 구분이 어렵네요.”
……메린 발소리는 귀신 같이 구분했으면서?
이 사람이 무어라 대답할지 뻔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네. 부스러기입니다. 그리고 카엘이란 이름이 있죠.”
나는 그녀의 팔다리를 묶은 끈을 단도로 잘라 풀어주었다.
“알아만 둘게요. 고마워요, 부스러기 씨.”
“아니, 이름 부르라고. 아무튼 우릴 돕는다고요? 왜요? 반항기 때문에? 그리고 눈은 왜 가리고 있어요? 다쳤어요?”
“왜 한꺼번에 물어본대?!”
잠시 후, 레볼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당신들을 도울 거에요. 전부터 내 자매들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그리고 반항기라고 하지 마요, 사춘기 같잖아요! 또 뭐였죠? 아, 눈 다쳤냐고요? 네. 다쳤어요. 오드르 그 년이 뽑았거든요.”
“………………뭐?”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누가, 뭘 했다고?
“안 믿겨요? 그럼 확인해봐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린 천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아연했다.
두 눈꺼풀은 굳게 닫힌 채 바느질로 꿰매져 있었다.
그걸 의미하는 건 단 하나뿐이다.
“……세상에, 레볼트.”
본인의 성질 때문이든 메린을 향한 정열 때문이든, 어쨌든 그녀는 우리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눈을 잃어버렸다.
“말해두는데, 미안해하지 마요. 난 전혀 후회 안 하거든요. 아가씨를 위해 바쳤다는 생각도 안 하니까 헛다리 짚지도 말고. 이건 증거에요. 반항의 마녀로서 훌륭히 행동했다는 증거.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날 데려가세요. 당신들을 위슨에게 데려다주고, 그 년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에요.”
“……오드르요?”
“걔요? 걔도 짜증나긴 하지만, 지 성질대로 한 걸 뭐 어쩌겠어요? 내가 말하는 건 베르메에요.”
의외였다.
눈을 뽑아간 장본인이 아닌, 수장에게 살의를 불태우다니.
“……절대 못 잊어요. 날 이렇게 만들며 웃던 그 면상. 내 동생을, 언니를 죽인 그 손!”
제법 차분하게 말하던 레볼트의 목소리가, 점차 격렬한 감정을 띄며 날카로워졌다.
“다 그 년 때문이야! 그 년 때문에 정령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어! 그들이 날 보지 않게 됐어!!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용서못해!!
……그러니 나를 데려가요. 알았죠?”
“옙.”
눈도 안 보이는데 어쩌려고요?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호흡과 심장 소리를 따라가 물어뜯어버릴 거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딴죽을 걸었다간, 날 시험대로 삼을지도 모른다.
오래 살려면 분위기를 잘 읽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어쨌든 이제 정말로 준비가 끝났다.
동료도, 구해야 하는 사람의 위치도, 그곳에 갈 방법도, 모두 갖추었다.
눈이 안 보이는 레볼트는, 움직임이 날래면서 근력도 센 메린이 들쳐업고 가기로 했다.
“헤헤……아가씨의 손…… 따뜻해……헤헤헤……”
“……”
진짜 괜찮겠지?
아무튼 이제 준비를 마쳤으니, 저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돌격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검 자루를 쥐었다.
성검이 아닌 일반 철검이 나오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성검이 나설 차례니까.
검을 힘차게 뽑았다.
검집보다도 폭이 넓은 검신을 자랑하며, 성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리는 듯이, 검신에 새겨진 글자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마법을 막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길을 막는 마녀들을 이 손으로 없애 버릴 거다.
“가자!”
메린이 철문을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귀청을 찢을 듯한 파열음을 뒤로 하며 뛰쳐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