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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63화 (63/475)

〈 63화 〉 61화 : 위화감은 어쩔 수 없어 (1)

* * *

그로부터 이틀 뒤에 섬을 떠나기로 했다.

위슨이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있는 데다, 우리 역시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옷을 고치거나, 비축품을 챙기거나,

메린에게 대련으로 너덜너덜해지거나,

로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등,

바삐 움직이다 보니 이틀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섬을 떠나려는 우리를 마일린과 레볼트, 두 사람이 배웅해주었다.

마일린은 맹약서에 적혀 있는 ‘마일린의 딸들’을 ‘부엉이탑’으로 고치며, 그 수장으로서 이름을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맹약에 따라, ‘마일린의 딸들’이 모인 ’부엉이탑’이 힘을 보탭니다. 그 아이를 잘 부탁드려요. 용사님을 성심성의껏 도울 거에요.”

그 말에 동의하듯이, 위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일린은 그를 기특한 눈으로 보며 미소를 짓고, 품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에요.”

상자를 열어보니,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크기의 부엉이 모양 브로치가 네 개 들어 있었다.

위슨 몫까지 만든 듯했다.

“행운과 수호를 기원하며 만든 부적이니까 지니고 다니세요. 가끔 이걸 보면서 우릴 떠올려주시고요.”

마일린은 위슨을 향해 미소지었다.

“위슨, 용사님을 잘 돕도록 하세요. 제가 준 책들로 공부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거 참, 귀에 딱지 앉겠네. 나이 들었다고 티 내나, 잔소리, 악.”

위슨이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 툴툴대던 파랑새를 퍽 후려쳐버렸다.

……아, 저 놈이랑 앞으로 같이 다녀야 되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다.

“이 다음은 서쪽 산맥을 넘어가시겠네요?”

나는 레볼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꾸 그녀를 툭툭 건들여보는 메린의 손등을 찰싹 때려주었다.

“드워프랑 엘프의 나라로 갈 겁니다.”

“아~ ‘바위 궁전’이랑 ‘루 메호’? ‘바위 궁전’은 몰라도 ‘루 메호’라니, 또 고생깨나 하겠네요~”

“아잇. 복 떨어질라, 그런 말 하지마요!”

……그나저나 그런 이름들이었던가?

나는 무심코 맹약서를 다시 펼쳐보았다.

정말로 그 이름들이 적혀 있다.

은근히 잘 안 외워지네, 이 이름들…….

“……?”

‘부엉이탑’ 쪽에 공용어로 적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마일린이 조금 전에 한 서명인데…….

“……네이멜??? 엥? 마일린이 아니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내게, 마일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일린은 과거의 인물이니까요. 이미 옛적에 잠들어 있어야 하는 인물인데 갑자기 나타났다고 해봐요.‘높으신 분’을 포함해서쓸데없이 주목만 끌걸요? 게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네이멜’은 확실히 이 시대에 존재했으니까요. ‘높으신 분’도 넘어가주실 거에요.”

“……”

나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기억 속의 ‘그녀’와 같은 얼굴, 같은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만, 속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걸로 ‘그녀’의 이름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네이멜’은 이 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용사님…… 아니, 카엘 씨, 정말 감사했어요.”

내 손을 잡으며 마일린, 아니, 네이멜이 말했다.

“나와 내 딸들을 위해 싸워주신 것, 그리고……”

그녀는 살짝 몸을 낮추고,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나를 위해 울어주시고, 가슴 설레는 선물을 주신 것, 절대 잊지 않을게요.”

“……!”

“당신의 여정에 빛과 축복이 함께하기를.”

이마에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우리에게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그간 묻지 못했던 물음을 던졌다.

“……당신, 대체어느 쪽이에요?”

“후후, 비밀이에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산 현자는, 그저 능청스럽게 웃었다.

섬을 나간 우리는 레이크에게 말들을 돌려받았다.

그는 위슨이 우리와 함께 가기로 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슨, 너 정말 괜찮겠어? 미치…………도록 힘든 여행이 될 텐데.”

“……”

중간에 굉장히 신경 쓰이는 틈이 있었지만 구태여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웃고 있는 위슨의 어깨에 앉은 파랑새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미친놈들은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러냐?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

구태여,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관대하다.

레이크와도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숲을 빠져나간 다음, 각각 말과 엘크를 타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엘크다.

섬에선 말을 키우지 않으니 위슨이 타고 다닐 짐승이 필요하긴 했는데, 설마 엘크가 튀어나올 줄이야!

평범하게 말이 낫지 않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 내게, 위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딱 한 마디, 말을 띄웠다.

­­'엘크 멋있지 않아요?’

­­……

실용성보다는 멋짐을 더 우선하는 그 판단.

인정한다. 이 녀석은 남자가 맞다.

그래도 엘크 정도면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지.

처음에 이 녀석이 골랐던 게 뭔지 아는가?

늑대다.

그것도 사람 하나는 그냥 집어삼킬 정도로 큰 늑대.

세상에, 늑대를 타고 다니겠다니.

눈에 띄는 걸 넘어서 아예 사냥 당하고 싶은지, 원.

그 다음에 본 게 엘크라서, 나는 늑대가 아닌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하며 수락했던 것이다.

한참을 달리다가, 문득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벌써 점심 때가 조금 지나 있었다.

“흠…….”

중간에 잠깐 쉰 것 빼고는 내내 달렸으니 슬슬 쉬는 게 좋겠지?

마침 저 앞에 숲도 보이고.

"워~ 워~"

작은 숲 앞에 말을 세우자, 다른 세 사람도 모두 내 뒤를 따라 멈춰 섰다.

“여기서 좀 쉬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나는 맘 편히 말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봄이 다 지나가는 초여름이라 그런지 햇살이 좀 따가웠다.

아, 그래, 물이나 뜨러 가자.

안장에서 물주머니를 꺼내는 순간, 로나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손에서 물주머니를 슥 가져갔다.

“헤헷, 제가 떠올 테니 쉬고 계세요~”

“엥? 아니 내가 갈……거 되게 빠르네.”

……잡을 새도 없이, 로나는 다른 사람의 물주머니까지 챙기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 참, 쟤는 지치지도 않나.

로나가 사라진 숲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어, 위슨, 왜?”

“뭐 먹을 거지?”

“응. 간단하게. 불은 안 피울 거야.”

너무 많이 먹고 말을 타는 건 심각하게 안 좋다.

소화에 좋지도 않고, 음, 뭣보다 뱃속이 뒤집어질 우려가 있다.

……그런 경험은 어렸을 때 한 걸로 충분하다.

위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엘크의 안장에 걸쳐 둔 자신의 배낭을 뒤적였다.

그 안에서 그릇을 꺼내더니, 몇 가지 과일을 거기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위슨의 배낭, 제법 작네.

분명 지난 이틀간 여행복이다 남자 속옷이다 부산스럽게 준비했던 것 같은데, 몇 벌 두고 왔나?

네이멜이 책 보고 공부하라고 했으니, 옷 대신 책을 챙겼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야야야, 위슨, 너 그거 혼자 다 먹을 거야?! 아니, 그보다 왜 계속 나와?!”

어느새 위슨이 든 그릇엔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뭐야, 저 배낭, 어떻게 된 구조야?!

“다같이 먹을 건데?”

“아니, 한 사람당 서너 개면 충분해. 아니, 그것보다 그 배낭, 안이 얼마나 큰 거야?!”

“이거? 몰라. 마지막에 시험해본 게 집 두 채였지?”

“……”

사람도 쏙 들어간다는 소리 아니야, 뭐야, 그거 무서워!

이 녀석, 설마 저 안에 산짐승을 넣어 온 건 아니겠지?!

끔찍한 상상에 약간 두통을 느끼는 나에게, 위슨이 밝은 눈으로 과일이 든 그릇을 내밀었다.

별별 과일이 다 들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만만해보이는 사과를 집었다.

“고마워.”

“고맙긴.”

위슨이 말 세 마리를 묶고 있는 메린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곧 그녀도 와서 과일을 받았다.

물 뜨러 간 로나에겐 미안하지만, 우리 셋 먼저 하나씩 과일을 깨물며 그늘에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멀리 나온 건 처음이지? 피곤하면 자도 돼.”

내 말에 위슨은 고개를 저었다.

“위슨은 이래 봬도 숲을 쏘다니느라 체력은 있는 편이야. 저 엘크도 그냥 짐승이 아니라 정령이니, 그만큼 부담도 덜하고.”

젠장, 부럽다.

정령을 타고 다니다니 멋있잖아!

게다가 완전 순수 짐승이 아니니까, 말처럼 별 거 아닌 거에 놀래서 사람 떨어뜨리는 그런 해괴한 짓도 안 할 거고.

밥도 안 먹여도 될 거고.

햐, 진짜 좋겠다!

“뭣하면 물약 하나 마시면 돼.”

“물약?”

위슨이 벨트에 걸린 물약 중 하나를 보여주었다.

손가락만한 작고 길쭉한 병 안에 연둣빛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뭔 약인데? 피로회복제?”

파랑새가 짹짹거렸다.

“각성제. 내일을 태워서 오늘을 사는 거지.”

“……아니, 내일도 움직여야 되거든?”

“그럼 모레를 태우면 되지.”

“태우지 마.”

자고로 오래 살고 싶으면, 오늘은 오늘의 활력만 써야 하는 법이다.

특히 이렇게 바깥에 나와 있는 때엔 더욱 더.

“농담이야, 임마. 푸핫, 바보도 아니고 누가 길 다니면서 그런 짓을 하냐?”

“……”

위슨은 웃고 있다.

저 말을 한 파랑새는 녀석의 어깨 위에 있다.

파랑새가 그의 말을 전할 때는 항상 어깨에 앉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위슨의 말을 전하는 건 아니다.

모르겠다.

방금 날 놀린 건 위슨일까, 파랑새일까?

놀리지 말라고 둘 다 꿀밤 한 대씩 주면 되나?

웃는 얼굴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숲 쪽에서 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엘 님, 카엘 님, 카엘 님!!”

응? 로나답지 않게 목소리가 다급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빈 손으로 후다닥 뛰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어라?

물주머니는 다 어쩌고……

“……?!”

나는 가까이 온 로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로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철퇴를 휘두르는 애가 얼굴이 완전 새파랗게 질려 있다!

“왜 그래, 로나? 무슨 일 있었어?!”

“저, 저, 저 안에……!”

얘가 이렇게 얼이 빠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 안에서 곰이 사람을 먹고 있어요!”

“……응?”

겨우 그거?

아니, 물론 사람이 먹히는 모습을 보는 건 끔찍하긴 한데……

……사람 팔다리 분지르는 애가 기겁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곰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니까요! 가서 구해야죠!”

“……응? 떠나는 게 아니고?”

“구해야 돼요!”

어라? 내가 이상한가?

곰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는 건,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거잖아?

근데 뭘 구해?

그러나 로나가 너무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내심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일단 일어났다.

“어…… 그럼 내가 갈 테니까, 메린, 너는 위슨이랑 같이 여기서 기다려.”

메린이 내 말을 듣고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곰 있다며? 내가 가는 게 낫지 않냐?”

“위슨을 혼자 둘 순 없잖아.”

“네가 여기 남으면 되지.”

“……싫어. 네가 뭔 짓을 저지를지 알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이 녀석이 내 눈 밖을 벗어나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다.

시야 안에 있어도 태연히 늑대고기를 챙기는 녀석이야.

분명 곰 잡으라고 보내면 쓸개 같은 거 챙겨오거나 할 거라고.

그리고 내가 딴데 볼 때 몰래 스튜에 넣겠지!

그때, 파랑새가 짹짹 울며 시선을 끌었다.

“야, 그냥 너네 셋이 갔다 와. 별 것도 아닌 걸로 시끄럽게…… 째짹, 위슨이 부탁이 있다는데.”

“부탁? 뭐?”

“곰 쓸개 가져와달래. 약재료로 쓴다는데.”

“……”

아, 그렇지.

위슨 이 녀석, 물약 만드는 게 특기였지.

메린 녀석의 얼굴에 약간 기대가 찬 게 보였다.

역시 이 자식, 도축할 생각이었구만.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개만 있으면 되지?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

“잘 다녀오라고. 아, 맞다. 야야, 가능하면 간도 가져와라.”

“……돌겠네, 진짜. 알았다, 알았어.”

오늘 저녁 메뉴가 곰 고기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숲 규모는 작은 데다 나무도 그리 빽빽하게 자라 있지 않아서, 로나가 물을 뜨던 냇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냇가엔, 그녀가 들고 갔던 물주머니 네 개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여기서 물 뜨고 있는데, 저쪽에서 소리가 났어요.”

로나는 조심스러운 몸놀림으로 자신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우리 역시 그녀가 맞닥뜨린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래, 로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먹히고 있긴 하다.

……허리가 갈려서 두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그렇지.

피가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죽은 지 몇 시간 된 듯하다.

주변에는 그 사람의 소유품인 듯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가엾은 희생자는 한창 팔을 잘근잘근 씹히고 있는데……

……곰이 아니라 버그베어였다!

곰털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오히려 고블린에 가깝게 생긴 그 버그베어였다!

“곰이라며?!”

목소리를 낮춘 상태로 외쳤다.

“곰이 벌레에 물려서 저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버그베어(Bugbear)잖아요.”

“……”

그럼 베어그래스(Beargrass)는 곰을 심어서 나는 풀인가?

돌겠네, 진짜.

아무튼 우리 저녁 메뉴는 날아갔다.

버그베어만 없었다면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드디어 보존식품 포장지를 뜯는구나!

……그와 별개로, 로나가 왜 ‘먹히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한 건지는 이해가 되었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몰라, 이렇게 본 이상, 사람 시신이 저대로 몬스터 뱃속으로 들어가게 둘 수는 없다.

하지만 놈이 여기 혼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섣불리 피를 흘렸다가는 굉장히 성가시게 될 수도 있다.

“……야, 메린.”

“알았어.”

일어서서 튀어나가려는 녀석을 가까스로 다시 붙잡아 앉혔다.

“뭘, 임마, 뭘 알겠다는 거야, 나 아직 한 마디도 안 했거든?”

“저 놈 잡는 거 아니야?”

“아니, 맞긴 한데,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엉? 꺾어야 한다고 하려던 거 아니냐? 괜히 피 흘리면 다른 짐승들이 꼬이잖아.”

음? 이 녀석이 웬일이지?

아니, 뭐, 얘가 머리가 나쁜 건 아니긴 하다.

사고방식이 좀 많이 달라서 그렇지.

……그건 그렇고, 내가 무슨 말을 할 건지 대강 다 알고 있었구나.

뭔가 묘한 기분이다.

“아, 맞다. 곰이 없으니까 저녁거리가 없네. 그럼 피를 좀 흘려서……”

“하지 마, 임마, 절대 하지 마, 그냥 꺾어, 목이든 뭐든 그냥 꺾어버리라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메린 님!”

“쳇.”

……후, 큰일날 뻔했네.

진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아무튼 메린이 천천히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나 역시 허리춤의 가방에서 슬링과 조약돌 하나를 꺼냈다.

매번 돌멩이 줍는 것도 번거로워서 섬에서 몇 개 챙겨왔는데 이걸 바로 써먹네.

그녀가 덤불을 헤치고 나가는 소리를 들은 버그베어가, 들고 있던 팔을 내던지고 위협했다.

그르렁거리는 놈을 주시하며 그녀가 몸을 낮추자, 나는 곧바로 버그베어의 머리통을 향해 슬링을 쏘았다.

쌔액 소리를 내며 날아간 조약돌은 놈의 이마 정중앙에 푸욱 박혔다.

“구워어어억!”

놈이 그 타격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녀가 재빨리 다가가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쿠우웅!

우와, 몸집 괜히 큰 게 아니라고 땅이 울리네.

주변 나무에서 잎사귀도 몇 개 떨어졌다.

메린은 그에 대해선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놈의 가슴팍을 발로 힘껏 내리찍더니 목을 홱 꺾어버렸다.

……저 뿌드득 하는 소리는 참, 들을 때마다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내 뼈 꺾이는 것도 아닌데.

놈이 완전히 숨이 끊어져 축 늘어진 걸 보고, 나와 로나도 덤불을 헤치고 나왔다.

로나는 쓰러진 버그베어와 메린, 그리고 나를 번갈아 보며 감탄한 듯이 눈을 반짝였다.

“와아, 두 분, 손발이 척척 맞네요!”

“그야 일이 년 본 사이가 아니니까…… 근데 야, 너 뭐하냐?”

메린이 시체 옆에 쪼그려 앉아서 무언가 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건지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일단 물어봐주었다.

“뭔가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대꾸하며, 녀석은 시체의 손을 살피고, 벨트를 풀고,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는 전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잇, 진짜.

“……”

“왜?”

그녀가 고개만 돌려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해, 계속…….”

나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로나와 함께 주변에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모아, 갈갈이 찢어져 있는 배낭에 일단 넣었다.

바로 여기서 살피기에는 좀 위험하니, 말을 묶어 놓은 곳으로 돌아가 확인해볼 생각이다.

소지품을 보면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가는 길에 그곳에 들러서, 유족들에게 유품을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

메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되게 쓸데없이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다.

시체 뒤지는 게 썩 좋은 행동은 아니라 해도, 여행자가 죽은 사람 물건을 가져가는 건 필요악이라고 하나, 일종의 관례이다.

그러니 표정은 찡그리긴 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하아아…….”

……그래도 그렇지, 메린 저 녀석 어떻게 얼굴빛 하나 안 변하고……

하…… 누가 보면 떠돌이 출신인 줄 알겠네.

찢어진 배낭에서 물건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자, 가자.”

“……”

“로나?”

반응이 없어서 내려다보니, 로나는 어딘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앞에는, 시체에서 빼낸 물건 몇 가지를 챙기고 있는 메린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메린 님, 엄청 능숙하시네요.”

“……”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닌 일을 말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왠지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메린, 얌마, 작작하고 가자!”

일부러 녀석을 향해 크게 외쳤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갯짓을 한 다음 먼저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

두 사람 몫의 발소리가 내 뒤를 따라왔다.

등에 찌릿찌릿, 시선이 박혀 있는 게 느껴졌지만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서는 안 된다.

……그 일념 하나만으로 버티며, 숲을 나가기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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