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62화 : 위화감은 어쩔 수 없어 (2)
* * *
과일을 우물거리며 책을 보고 있던 위슨은, 숲에서 나온 우리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손에 든 과일을 쪼아먹던 파랑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람 구한다며? 배낭 주우러 간 거였냐?”
“얌마, 이상한 소리하지 마, 너도 아까 ‘먹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던 거 들었잖아, 짜샤! 배낭 주인은 이미 죽어 있었다고.
이건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들고 온 거야.”
“뭐?”
이번에는 메린이 깜짝 놀랐다.
“싹 다 가져가려고 챙긴 거 아니었냐?”
“……”
이럴 때 귀찮다고 대충 대답했다가는,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니 조심해야 한다.
왜냐?
이 녀석이 눈치는 지지리도 없으면서, 머리는 또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안 써서 그렇지.
어떻게 그 두 요소가 이렇게 완벽하게 맞물릴 수 있는지,참…….
아무튼 얘가 뭔가 물어봤을 때대충 어물쩍 넘기려고 하면, 그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부분을 죄다 집어서 지적질을 해댄다.
그러면서 눈치가 없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 넘어간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는다.
그 탓에 몇 번 말을 주고받다가,결국 답답함을 못 참고 소리를 빽 지르게 된다.
누가? 내가.
그럼 이 녀석도 답답하니까 지랄해대기 시작하고, 나도 그에 맞춰서 더더 지랄해대기 시작하는 거다.
그야말로 피 튀기는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거지……!
……뭐,실상은 그냥 말싸움이지만.
근데 꼭 내가 한 대는 맞으니까 진짜 끔찍하다고.
나는 잠시 어떻게 이야기할 지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물건은 다 가져갈 거야. 내 말은, 이 사람이 죽었다고 고향이나 소속처에 알려줘야 된다는 거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죽였다고 덤터기 쓰는 거 아니냐?”
“그러니 귀중품 같은 것도 같이 돌려줘야지.”
“그래도 의심하면?”
“사제님이 있으니까 그렇게 심하게 의심받진 않을 거야.”
어리긴 해도, 로나는 정식으로 서품을 받은 어엿한 사제이다.
사제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존경을 받으니, 그 동료인 우리도 어느 정도 보증을 받을 수 있다는 거다.
뭐, 정 아니면 튀면 되고.
“……”
……그나저나, 로나가 조금 전부터 약간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단 말이지.
여느 때처럼 싱글싱글 웃지도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음……
일단 뭔가 움직이도록 하는 게 낫겠지?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한 후, 로나에게 말을 걸었다.
“로나, 위슨이랑 같이 그 사람 묻어주고 올래?”
“……네?”
굉장히 뜻밖이라는 듯이, 그녀의 잿빛 눈이 커졌다.
“아니…… 그 사람 시신이 몬스터 뱃속에 들어가는 건 막았지만, 못 묻어주고 왔잖아. 지난번에 위슨의 늑대가 땅 금방 파더라. 나랑 메린이 이거 살펴보고 있을 테니까 다녀와.”
“네…… 뭐……. 그럴게요.”
……의외로 그다지 의욕은 보이지 않았지만, 로나는 별말없이 순순히 일어났다.
“위슨,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늑대를 불러낸 다음 로나와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내 속에서 절로 한숨이 크게 터져나왔다.
로나 녀석, 역시 무언가 느낀 게 분명해.
“웬 한숨?”
“……”
……그리고 이 범인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돌겠네, 진짜.
“뭐. 왜.”
“……암~것도 아니다, 이 자식아. 이 속 편한 자식아. 이거나 봐, 이 자식아. 너 챙겼던 것도 도로 꺼내고, 이 자식아.”
“뭐 있구만…….”
일이나 하자, 일.
나는 찢어진 배낭을 뒤집어서 내용물을 바닥에 몽땅 쏟아부었고, 메린은 아까 챙겼던 물건들을 꺼내어 바닥에 두었다.
“넌 이쪽 보고 있어.”
“오냐.”
메린이 배낭 속에 있던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하자, 나도 메린이 두었던 물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디 보자~”
흠, 역시 몸에 지니고 있던 거라 그런지 대부분 귀중품이구만.
로켓, 시계, 반지, 돈주머니, 그리고……
“응? 편지?”
붉은 밀랍으로 단단히 봉해진 편지가 있었다.
속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건지,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
밀랍엔…… 아무인장도 안 찍혀 있군.
뭐, 어차피 난 못 알아보니까 찍혀 있든 말든 별 상관없지만.
나는 봉투를 뒤집어, 혹시 뒷면에 송신인이 적혀 있진 않나 살펴보았다.
“……없네.”
비밀편지인가? 나 원, 이거 뜯어볼 수도 없고.
혹시나 싶어 로켓을 열어봤지만, 연한 금발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 그림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
반지도 있겠다, 부인인가?
“음……”
로켓 같은 비싼 걸 갖고 있는 걸 보면 일반 농부는 절대 아닐 것 같은데.
의외로 뭐가 안 나오네.
“……”
자꾸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뜯고 싶다……!
뭐가 적혀 있을지 궁금해!
하지만 참아야 한다……!
괜히 건드렸다간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 게 뻔해!
비밀을 함부로 들춘 사람은 밤에 슥삭 사라지는 법이라고!
그때, 내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속삭였다.
……저 밀랍, 살살 뜯은 다음에 위슨의 스라소니에게 부탁하면 다시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으아아! 썩 물러가라, 마귀 새끼야!!”
유혹을 떨치려 소리친 순간, 몸이 홱 나자빠지며 풀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덕분에 나를 유혹하던 사악한 속삭임이 사라졌다.
후, 위험했어.
“아, 깜짝 놀랐네.”
그리고 깜짝 놀랐다고 사람을 굴려버리는 이 녀석은 역시 위험하다.
근데 하나도 안 놀란 말투인데.
표정도 되게 뚱하구만.
나는 대충 옷을 툭툭 털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돌아갔다.
“그쪽은 뭐 없냐?”
“별 건 없는 거 같은데.”
메린 역시 태연하게 대답하며, 내 머리를 손으로 털어 이파리를 떼어주었다.
……나나 이 녀석이나왜 이딴 거에익숙해져 있는 거지.
왠지 서글퍼졌다.
“일단 이 정도야.”
메린은 붕대나 보존식품만 따로 빼두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둔 채 그냥 보기만 하고 있었다.
……산딸기를 우물거리면서.
배낭에 있던 거겠지.
나 참, 진짜 속 편하다니까.
“??”
말없이 녀석을 빤히 쳐다보자, 녀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빨간 산딸기 한 줌이 손바닥에 놓여 있다.
“……”
애가 생긴 게 이런 걸 뭐 어쩌겠어?
나는 녀석의 손바닥에서 산딸기 두세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입 안에 퍼지는 새콤달콤한 향을 삼키며, 녀석이 내버려둔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두툼한 망토, 속옷과 겉옷 두서 벌, 지도, 빨랫비누, 면도용 칼, 여행용 성서, 부싯돌……
이야, 진짜 뭐 없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아무 생각없이 성서를 집어 펼쳤다.
“오.”
할렐루야!
신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나는 성서에 끼워져 있던 물건을 집어, 하늘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는 나를 향해, 발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메린에게 보여주었다.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듯한 녀석이 눈이, 곧 의아한 빛을 띄며 약간 동그래졌다.
“뭔데? 부적?”
이 녀석처럼 처음 보는 사람은 부적인 줄 알 법도 하다.
술잔 주둥이처럼 둥근 데다, 중앙에는 메리골드 문양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으니까.
그러나 이건 부적 따위가 아니다.
여러 번 말리고 연기를 쐬어 보존처리한 나무를 깎아 만든, 왕성에서 각 마을 대표에게만 하나씩 발급해주는 패(?)다.
당연히 각각의 마을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왕성이나 중요 도시에 들어갈 때 신분보증도 해주는 무척 귀중한 물품이다.
소문으로는 말도 빌릴 수 있다던데.
다만, 신분보증을 받을 수 있는 건 이 나무패를 지닌 사람 딱 한 명뿐.
동행인은 얄짤없이 신분증명 절차를 밟아야 한다.
또, 이 나무패를 갖고 있다 해서 여관을 무료로 쓰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성문을 좀더 빨리, 편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외엔, 실상 아무 혜택 없는 셈이다.
그 덕분에 귀족 인장과 화폐보다도 현저히 낮은 위조율을 자랑한다.
……뭐, 일반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편, 이 나무패는 왕국이 해당 마을을 직접 관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걸 받은 마을들은 일 년에 한 번, 마을 대표를 수도로 보내서 인구 등등을 신고할 의무가 있다.
물론 시기는 정해져 있다.
바로 매년 1월에 열리는 신년축제, 즉, 농사 쉬는 때다.
참고로 우리 마을 대표는 내 아버지인데,올해로 십 년째 됐나?
왜냐, 아버지 빼고는 글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촌장님밖에 없는데, 여행하시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 탓이다.
평소에 나무 패고 사슴 잡고, 이따금 튀어나오는 오우거 배때지도 뚫어버리시지만, 아무튼 여행은 못하신다고 한다.
그냥 가기 싫어서 핑계 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그렇다.
어쨌든 내가 이 나무패를 알아본 것도, 아버지가 매년 출발하기 전에 보여주신 덕분인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왠지 나한테 떠넘기려는 밑작업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내 친절한 설명을 들은 메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딱 한 마디 했다.
“아, 그래.”
“……”
되게 성의없네.
작은 보복으로 녀석이 입에 넣으려던 산딸기를 낚아채서 내가 먹었다.
하나 더 먹으라며 녀석이 내 콧구멍에 산딸기를 쑤셔넣었다.
무섭다.
……어쨌든 이제 됐다.
이제 이 사람의 최초 출발지를 알 수 있다고!!
코에서 흐르는, 피인지 딸기즙인지 모를 빨간 물을 슥 닦으며 나무패를 살펴보았다.
“……윈플?”
어디야, 그거.
처음 들어보는데?
혹시 몰라서 나보다 눈 좋은 메린에게 읽어보라며 건네주었더니, 녀석은 읽는 대신 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W, I, N, N, P, L, E
맞는데?
하긴 내가 이 나라 마을 이름을 다 외우고 다니는 건 아니니…….
“으음~”
지도를 꺼내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윈플’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은 없다.
세상에, 우리 고향 말고도 지도에 잘 안 나오는 촌동네가 있었다니!
나는 나무패 주인이 가지고 있던 지도를 펼쳐 보았다.
어느 한 지점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음……이거 자신의 마을 위치를 표시한 거겠지?
“어디 보자…….”
두 지도를 나란히 놓고, 지금 우리 위치를 대충 가늠해보았다.
호숫가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남서 방향으로 난 길을 대충 반나절쯤 달렸으니까……
“……엥? 여기서 가깝네?”
대강 한두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확실하냐?”
“아마도.”
오차가 있어봤자 반 시간 정도일 것이다.
나는 나무패를 품속에 넣은 후, 나머지 물품 중에서 비누와 부싯돌만 집어 챙겼다.
그리고 옷가지들을 도로 찢어진 배낭에 넣은 뒤, 말 안장에 실었다.
메린이 그런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 옷들도 갖다주려고?”
“어.”
자고로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되는 법이다.
특히 죽은 사람 것이라면 더더욱.
불길하잖아.
무엇보다도……
“장례식에 쓸지도 모르니까.”
이 사람에게 남은 가족이 있다면, 없는 시신 대신 묻을 게 필요할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무덤만 만드는 건 좀, 쓸쓸할 테니까.
물건들을 대강 정리했을 즈음, 장례식을 하러 갔던 로나와 위슨이 돌아왔다.
나는 로나의 얼굴을 살펴보며 말을 걸었다.
“사제님, 수고하셨어요.”
“……네. 헤헤.”
예를 갖춘 내 인사에, 로나는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여전히 약간 가라앉아 있긴 해도 아까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
……역시 오늘밤, 이야기를 해봐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낮.
감상에 젖기보다 몸을 움직여야 할 때이다.
로나에 대한 건 일단 마음 한편에 두고, 나는 두 사람에게도 나무패와 마을 이름을 알려주었다.
“처음 듣네요.”
“몰라.”
“아, 그래.”
역시 못 들어봤군.
나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대강 한두 시간 가면 될 것 같아. 가서 이 사람 가족이나 촌장에게 유품 돌려줄까 하는데, 어때?”
위슨은 별 이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고, 메린은 맘대로 하라는 듯이 손만 내저었다.
로나는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을 거에요. 지금 바로 출발하실 거죠?”
“응? 넌 아직 안 쉬었잖아.”
로나는 빙긋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반나절 달린 것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좋은 일은 서두를수록 좋다고 하잖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 그럼.”
……밤까지는 가능한 성질 건들지 말자.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나무에 묶은 말고삐를 풀고 안장에 올라탔다.
다른 세 사람이 준비된 걸 확인한 후, 아까 봐 둔 방향으로 달리려던 때였다.
느긋하게 풀을 뜯던 위슨의 엘크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어어……그짝 이름이 뭐랬지? 아따, 기억이 안 나부네. 암튼 뭐, 그 갈라는 마을이 요 근처에 있다 혔능가?”
“……”
어어……
지금 저 엘크가 뭔가 굵직하면서 구수한 말투로 말한 거지……?
내 착각 아니지……?
“뭘 그리 멍청~하게 보고 그런댜? 짐승 말하는 거 첨 보는 것도 아님서.”
“……워매, 진짜 아녀!”
“그라믄 진짜지, 뭐 가짱가? 됐고, 대답이나 하쇼. 기여, 아니여?”
세상에, 살다 보니 진짜 별 걸 다 보네!
아니 뭔 정령이……!
아냐아냐, 진정해!
이런 사소한 걸로 동요하지 마, 카엘 에스트렐!
정령이라고 꼭 표준말을 쓴다는 법은 없잖아.
암, 그렇고 말고.
어째 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잖아?
그래, 아무 문제없는 일이야.
나는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어, 응. 아마 그럴 건데, 왜?”
“요 근처 마을에서 지금 칼부림 나고 있다는디?”
“……뭐? 그걸 어떻게 알아?”
엘크는 혀를 낼름 내밀어 코를 핥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나가 바람의 정령 아니여. 쌔고 쌘 게 내 동포지라. 시방 한 놈이 지나가다가 나불대고 갔당께. 워쩔껴? 가볼텨?”
“……”
어……
방금 다른 바람의 정령이 지나가다가 이 엘크에게 속삭대고 갔다는 뜻인가?
아, 몰라, 맞겠지.
“그 마을이 어느 쪽에 있는데?”
“조쪽.”
“……!”
원래 내가 가려던 방향이다!
나는 서둘러 고삐를 잡은 후, 외쳤다.
“서두르자! 엘크, 네가,”
“벤투스여.”
“어, 그래, 웬투스! 길 안내 좀 해줘! 위슨, 부탁할게!”
위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꽉 붙잡자, 엘크가 튀어나가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질주를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놓칠 것 같다.
아까는 일부러 우리와 속도를 맞춘 거였구나.
괜히 바람의 정령이 아니구나.
으으, 진짜 부럽다!
엘크의 뒤를 따라 샛길을 달리고 숲을 빠져나오자, 초원 멀리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카엘!”
“봤어!”
점점 더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쇠붙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뻘건 불꽃이 집을 태우고 있는 것이 보이면서……
“……아아아아아아……”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메린! 놈들 보여?! 뭐야?!”
“기다려봐! ……인간이야!”
인간.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도적이든 뭐든, 마을을 공격하는 놈들이니 분명 대화로 풀 수는 없다.
그럼 결국 싸우게 될 텐데……
“……칫!”
그래도 할 수 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다.
마을 입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할 무렵, 엘크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
그래.
여행 중인 이상,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맞닥뜨릴 일이다.
메린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각오를 다져야 한다.
검을 뽑아 들고 세 사람, 특히 메린을 향해 말했다.
“무기를 든 놈만 상대해. 공격하기 전에 꼭 경고하고. 싸우거든,가급적 살려.”
가급적.
그래, 가급적이다.
이제 곧 싸운다는데도, 다행히 세 사람 중에 겁을 먹은 듯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거 진짜 다행인 건가?
섬에서 한 번도 안 나간 열 다섯 살짜리 애도 얼굴빛 되게 멀쩡하네, 나 이거 참.
“……가자!”
한 손에는 철검을,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쥔 채, 불타고 있는 마을을 향해 달렸다.
비명 소리가 말발굽 소리를 뚫고 마구 들려왔다.
그 탓에 마을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점점 더 높고 격하게 두근거렸다.
검을 쥔 손에 진땀이 흘렀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 싸움은, 이게 처음이니까.
입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막 젊은 여자를 덮치는 사내 새끼가 보였다.
속이 끓어오르며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이 풀어졌다.
“멈춰, 새꺄아아!!”
놈이 여자의 옷을 찢다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칼을 꺼내 들었다.
나는 말을 달리며 놈의 대가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헉!”
정확히 어디를 벴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놈이 붉은 피를 흩뿌리며 저 멀리 굴러가버렸다.
나는 놈의 근처까지 말을 달린 후, 안장에서 뛰어내리며 놈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어…… 어으억…….”
투박한 얼굴에 붙은 두 눈이 나를 향해 부릅뜨고, 파르르 떨더니, 곧 축 늘어졌다.
감기지 않은 눈동자가, 가쁜 숨을 쉬는 내 얼굴을 허망하게 비추었다.
“……”
………….
……이제 시작이야.
정신 차려야 돼!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다시 말을 타고 그 여자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흑, 으흐흑!!”
“이제 괜찮아요, 자매님. 진정하세요.”
로나가 여자를 달래며 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는 굳은 목을 움직여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자매님, 하나만 말씀해주세요. ……도적인가요?”
“그, 그런 거 같아요! 가, 갑자, 갑자기 쳐들어와서, 그 새끼가, 제 가족을……!”
여자는 다시 공포에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기 시작했다.
로나는 굳은 얼굴로, 위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위슨 씨, 이 사람이랑 같이 근처에 숨어 계세요.”
위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리병 두 개를 땅에 던져 늑대와 스라소니를 불러냈다.
그는 두 짐승을 하나씩, 한 걸음씩 여자에게 다가가게 한 후, 늑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째짹, 파랑새가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테라가 같이 갈 거야. 말은 걱정 말고 다녀와.”
“……말? 아.”
그렇구나.
말 타고 싸우기엔 마을이 너무 작구나!
……젠장.
위슨에게 고삐를 넘긴 후, 나는 메린과 로나,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무덤덤한 얼굴과 굳은 얼굴이 나를 마주보며,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운 건 처음 한 번뿐이야.
뭐든 그런 법이라고.
……그리고 처음은 이미 끝났다.
나는 재차 심호흡을 하고, 칼자루를 부서져라 꽉 쥐었다.
“가자!!”
나 자신을 일갈하듯 소리치며, 마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