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65화 (65/475)

〈 65화 〉 63화 : 위화감은 어쩔 수 없어 (3)

* * *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생각을 되풀이했다.

아까 뭐했더라?

물론 머리를 부딪쳤거나, 과도한 흥분으로 정신이 폭! 주! 한 후유증으로 기억이 안 나는 건 절대 아니다.

기억도 멀쩡하고, 손에 느껴졌던 그 감촉도, 내 눈에 비쳤던 풍경도 떠올리려고 하면 떠올릴 수 있다.

더럽게 하기 싫어서 그렇지.

……오늘 나는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였다.

누군가를 구했다.

이 손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베고, 목을 찌르고, 팔을 자르고, 뒷목을 때리고,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가고, 겁에 질린 사람들을 촌장집에 모으고, 그 문 앞을 죽어라 지켰다.

그리고 지금 그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허, 참.”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그 중에서도, 기분이 그리 끔찍하지 않다는 게 기가 막히다.

대충 닷새 전에 나처럼 생긴 생명체를 대강 사흘 전에 막 베고 찌르긴 했었지만……

그래도 그건 마녀고, 이건 가죽갑옷 걸친 인간이잖아.

“……”

하늘을 보던 시선을 내려 저 앞, 자그마한 광장을 바라보았다.

로나가 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그곳에 모아, 혼자 돌보고 있다.

원래는 나도 가서 도와야 하겠지만, 별로 의욕이 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어떤 수염난 남자가 껄껄 웃으며 로나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젊은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연신 흔들기도 했다.

지금은 어머니인지 누나인지 모를 젊은 여자가, 잔뜩 겁먹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로나에게 인사하고 있다.

“……하.”

더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땡땡이냐?”

눈앞에서 작은 손이 왔다갔다했다.

멍하니 시선을 돌리니, 위슨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저 퍼런 고무공과의 괴리감이 장난 아닌걸?

“퍼진 거 보니 완전 쫄았, 째짹! ……괜찮냐?”

“……어, 응. 괜찮아.”

진심으로 말한 건데 못 미더운 걸까?

위슨은 내 옆에 앉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 왜? 할 말 있어?”

“너 싸운 적 별로 없지?”

“당연하지. 너도 알겠지만 난 원래 두뇌파라고.”

……음?

위슨 이 녀석, 왠지 눈빛이 좀 뚱해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

“테라에게 들었어. 한 놈 한 놈 처리할 때마다 얼굴이 점점 더 새하얘졌다던데. 마지막엔 앞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넋을 놨다며?”

“……”

테라?

아, 지금 저기 사람들 사이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는 저 늑대 새끼, 아니 새끼 늑대?

아니, 도적놈들 물고 다니면서 그건 또 언제 다 봤대?

……아, 그렇구나.

위슨 녀석, 내가 그 충격으로 정신 놓은 줄 알고 있구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야, 네가 생각하는 거 아냐. 칼싸움은 살 떨려 죽는 줄 알긴 했는데, 사람 잡은 충격으로 이러고 있는 거 아니라고.”

“엉? 그러냐?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이런 거 아니야?”

“드문드문 들긴 했는데, 지금은 별 아무렇지도 않아. 그때도 몸은 잘만 움직이더라.

……이게 맞는 건가 싶다.”

마을 밖에서 도적놈을 죽였을 땐, 그 놈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얼굴을 똑똑히 쳐다봤다.

이 안에서 싸울 때는 두세 번을 제외하곤, 찌르거나 베자마자 딴 데 갔다.

차이점이라곤 그게 다인데.

사람을 공격하고, 죽였다는 사실은 똑같은데.

그런데 얼굴을 봤냐 안 봤냐에 따라, 고약한 기분이 드는 정도가 다르다니.

다 끝났다고 바로 기억 속에 묻어버리다니.

그래도 되는 걸까?

위슨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위슨도 처음엔 재칼로프 뿔 못 뽑았어. 그거 살아 있을 때 뽑아야 되거든. 근데 지금은 재칼로프 뿔이 뭐냐? 페어리 날개도 막 뜯어가요. 이젠 걔네가 얘만 보면 튄다니까.

어휴, 약재료만 보면 환장을 해선……,”

“……”

파랑새의 모습이 사라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위슨이 제 등에 녀석을 대고 벽에 눌러버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재칼로프는 사슴뿔 달린 토끼 모양 몬스터이다.

그 뿔을 산 채로 뽑는다니.

그거 그냥 머리가죽 뜯는 거나 다름없잖아.

어우씨, 살벌해라.

“어쨌든, 넌 그걸 즐긴 건 아니잖아?”

……소리가 위슨의 등에서 들리는 게 뭔가 기묘한 느낌이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문제없잖아.”

“그런가…….”

다른 사람도 이 정도의 마음가짐인가?

수틀리면 이 마을처럼 도적이나 몬스터가 쳐들어오는 시대인데, 싸우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그래, 임마, 피에 미치거나 즐기는 게 아니니 괜찮지. 위슨은 약재료만 보면 눈을 뒤집,”

위슨의 등이 완전히 벽에 닿았고, 파랑새는 연기가 되었다가 다시 그의 어깨 위에 퐁 나타났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흔들며 째짹, 울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절대 인정 못해.

저 혼돈의 주둥아리에서 왠지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것 따위 죽어도 인정 못해……!

“아무튼 뭐, 걱정해줘서 고마워. 진짜 괜찮아.”

“고맙긴 뭘. 어차피 겸사겸사였어.”

“겸사겸사?”

내 물음에 위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살짝 찌푸린 눈썹에서 씁쓸한 기운이 풍겼다.

“위슨이 저기 있으면 다들 불편해하거든.”

“……아~”

도적놈들이 후퇴한 후,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불을 껐는데, 이때 위슨의 정령이 큰 활약을 했다.

그 미친놈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역청을 쓰는 바람에, 물만으로는 전혀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스라소니가 불을 삼켜버리고, 늑대가 흙을 뿌려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죄다 잿더미가 될 뻔했다.

……그런데도 위슨이 받은 대가는 형편없었다.

그가 정령을 다루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아무 말없이 그를 슬금슬금 피할 뿐이었다.

입 밖으로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저 사람들은 확연히 위슨을 꺼리고 있다.

단지 마법을 썼다는 그 사실만으로.

“……”

……기분 더럽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녀들이 온 대륙을 쏘다니며 아이들을 납치했으니까.

백여 년간 쌓인 원한과 공포가, 고작 몇 년의 공백으로 지워질 리 없지.

겉모습이 어떻든 상관없는 거다.

마법을 쓰는 사람, 그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얘 아니었으면 죄다 홀라당 다 타버렸을 텐데.

늑대가 시선을 끈 덕분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으면서.

고맙다는 말 하나 하는 게 그렇게 힘든가?

“째짹, 그래도 위슨은 나은 편이지. ……야, 그 언니는 대체 뭘 했길래 다들 그러냐?”

“……”

……그래, 위슨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우리 네 사람 중 한 명은 아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뭐하긴. 나랑 똑같지. 사람 구했어.”

“전혀 그런 눈치가 아닌데?”

“……”

그래.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남자가 공포에 질리던 것을.

여인이 아이를 끌어안으며 살려달라고 외친 것을.

여자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뿌리치고 도망친 것을.

……그렇게 목숨을 구해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메린을 보았다.

녀석은 지금 붙잡은 도적놈들을 감시하겠다며 촌장집 창고에 있다.

문이 닫히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안도하던지.

그리고 그 얼굴들은 지금 활짝 피어 있고, 그 입에선 감사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로나 쟤도 놈들 사지 박살낸 건 똑같은데.

로나를 돕지 않고 이렇게 떨어져 있는 건 그런 이유도 있다.

저 썩을 양반들 얼굴 봤다가는, 그때처럼 또 한바탕 할 것 같아.

“……별 거 아냐. 그냥 평소대로 놈들을 슥슥 상대했을 뿐이지. 죽인 것도 서너 명 밖에 안 돼. 걔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평소? 아아……. 그럼 뭐, 겁먹을 만하네.”

“……”

인정하기는 싫다.

하지만 얘도 단박에 납득한 것처럼, 메린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한번 상상해보자.

내 눈앞에서, 누군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검을 휘둘러 다른 누군가를 해친다.

그리고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이번엔 나를 내려다본다.

……더럽게 무섭긴 해.

나라도 비명 지르겠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잖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할 거 아냐.

거지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그때, 광장에서 촌장과 이야기하던 로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카엘 님, 촌장님과 직접 이야기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왜?”

되도록이면 더 엮이고 싶지 않은데.

로나는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은 건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돌아가신 분이랑 관련된 이야기라서요. 카엘 님, 그거 때문에 여기 오신 거잖아요?”

“……”

그럼 여기가 그 지도에도 안 나오는 윈플이 맞구나.

집이 열 채 될까 말까 한 정도이니 당연히 지도에 안 나오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작은 거 아닌가?

게다가 요즘 세상에 자경단도 없이 살다니, 그냥 목숨 내놓은 거나 다름없잖아.

차라리 근처 마을과 합치는 게 훨씬 낫겠네.

아무튼, 여기가 그 윈플이 맞다면 촌장을 만나야 한다.

“……하아.”

나는 한숨을 한 번 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로나의 뒤를 따라 갔다.

이 마을의 촌장은 생각보다 젊었다.

백발머리와 수염을 휘날리는 할아버지일 줄 알았는데, 이제 막 얼굴에 주름이 지기 시작하는 정정한 남자였다.

그의 주변엔 크고 작은 천막들이 펼쳐져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이고 있다.

노인과 아이들은 죄다 천막 안에 눕혀 놓은 건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죄다 그럭저럭 젊은 사람들뿐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무덤 만들 때도 노인은 없었던 것 같은데.

여기 펼친 천막들도 다 이 마을 사람들 거고……

흠, 정착민들이 아닌 건가?

혹시 난민……?

생각에 잠겼던 나는, 촌장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촌장은, 나를 보더니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아까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부라도 제 사람들이 살아남았네요.”

“……예에, 그…… 이런 일을 겪으셔서 유감입니다.”

“예. 정말…… 유감이지요.”

일그러진 그의 표정에선 슬픔과 분노가 마구 뒤섞여 있는 듯했다.

이내, 촌장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사제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보신 그 사람은…… 제 둘도 없는 친구였어요. 제 부탁으로 수도로 가는 중이었죠. 설마 그렇게 갈 줄이야…….”

“……”

나는 말없이, 찢어진 배낭을 촌장에게 건네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귀중품들도 품속에서 꺼냈다.

“앗.”

미처 손 안에 들어가지 못한 편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촌장이 대신 주우려는 순간, 로나가 그의 손이 닿기 전에 편지를 홱 낚아채고 제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촌장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생긋 웃으며 먼저 단호하게 말했다.

“촌장님이 보실 건 아니에요.”

“……로나?”

얘가 지금 뭐하는 거래?

그러나 그녀는 빙긋 웃을 뿐, 편지를 다시 꺼내려 하지 않았다.

“카엘 님, 이제 다 끝났죠?”

“어, 그렇지…….”

나는 뺨을 긁적인 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촌장에게 말했다.

“저희는 그 물품들을 돌려드리려 온 것뿐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겹쳐서 힘드시겠지만, 힘내시라는 말 밖에 못 드리는 점 죄송합니다.

저 도적놈들을 넘기시면 포상금 얼마라도 아마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자, 다 끝났다.

나는 살짝 고개를 까닥여 인사한 후 돌아섰다.

대강 두 발짝 정도 떼었을까?

굉장히 억센 힘이 내 팔을 붙잡았다.

돌아보니, 촌장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저흴 좀 도와주세요!”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돈이 별로 없어서……”

“아니요, 나그네님! 그 넘치는 무력을 빌려주세요!”

쳐다도 보기 싫을 정도로 무서운 녀석에, 되도록 가까이하기 싫은 녀석이 있긴 하지만 필요한 데가 있으니 좀 도와달라?

이거 참, 굉장히 친숙한 광경이구만.

더 엮이기 싫어졌다.

그냥 홱 뿌리치고……

“……”

……가고 싶은데 촌장의 간절한 눈빛을 봐버렸다!

친구도 잃고, 마을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데가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 팔을 꽉 붙들고 있다.

……그런 심정이 아주 팍팍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아…… 망할.

“……네. 그럼 이야기는 듣겠지만,”

“정말이십니까?! 예, 감사합니다!! 다들 들어봐! 이분이 우릴 도와주시겠대!”

멋대로 내 뒷말을 잘라먹었다!

뭐야, 이 사람, 멀쩡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잖아?!

“아니, 잠깐, 전 아직 돕는다고,”

황급히 말을 덧붙였지만,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여보, 우리 애들을 찾을 수 있어요!”

“제 동생을 꼭 좀 구해주세요!”

“젠장~ 믿고 있었다고!!”

“자네에게 내 모든 걸 걸겠어!!”

마을 사람들까지 내 뒷말을 멋대로 잘라먹었다.

뭐 어떻게 돼먹은 곳이야, 여기?!

걸긴 뭘 걸어, 미쳤나, 걸지 마!!

기가 막히다못해 정신이 아찔해져 있는데, 촌장이 내 손을 덥썩 쥐고서 흔들었다.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자세한 얘기는 안에서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전 아직!”

“자자, 안으로 드시지요!! 아마 차가 남아 있을 겁니다!!”

내 항의를 더 큰 목소리로 묵살한 후, 촌장은 그대로 억센 팔로 나를 집 안으로 잡아 끌고 가더니 의자에 앉혀버렸다.

“……놈들이 습격한 건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돌겠네, 진짜.

“이틀 전에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저희 얼마 없는 가축과 양식을 약탈해갔죠. 그래서 제가 왕성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들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놈들이 또 쳐들어왔다.

무엇을 내놓으라고 위협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칼을 뽑아 덤벼들었다.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우릴 완전히 죽일 작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까 보았던 도적놈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다 합쳐서 열 채 정도 되는 이 코딱지만 한 마을을, 대략 스무 명 정도가 습격해선 사람을 보는 족족 죽이고 있었다.

사람 죽이는 거야 원래 도적이란 게 그런 놈들이긴 하지만…….

굳이 스무 명이나 올 필요가 있었나?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만히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같은 놈들인 게 확실합니까?”

“예. 확실합니다. 그 놈들 대장이 소뿔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는데, 그 놈을 두 번 다 봤어요.”

“얼굴도 똑같고요?”

“아니요. 얼굴은 못 봤습니다. 그 투구, 얼굴을 거의 다 덮는 형식이라서요.”

소뿔 장식이 달린, 얼굴 다 덮는 투구…….

도적놈이 쓸 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갑옷은요?”

“예? 갑옷? 어어…… 온 몸을 철로 덮은 것 같더군요. 뭔가 문양이 그려진 조끼 같은 것도 입고 있었고.”

“……!”

문양이 그려진 조끼?

이런 망할. 귀족이잖아!

그래서 역청으로 불을 질렀구만?!

들어본 적이 있다.

귀족 중에는, 다른 영지나 왕성에 복속하는 걸 거부하고 도적이 되어서 떠도는 썩을 놈이 있다고.

그 도적놈이 다른 데서 훔치거나 빼앗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딴 건 그냥 희망사항일 뿐이다.

십중팔구 귀족, 아니면 그 밑에서 일하는 기사다!

촌장은 내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인상을 썼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아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이건 제 추측인데……”

나는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다.

그 대장은 아마 귀족이나, 그 밑에서 일하는 기사일 거다.

잡아 죽인다고 공식 처벌을 받진 않겠지만, 그 놈이 귀족이 아니라 그냥 일개 기사라면 놈의 주인에게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

‘보복’이라는 말에 촌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애석하게도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이끄는 도적단의 규모가 대부분 크다는 거죠.”

귀족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교육을 받는다.

이건 왕국 구석, 지도에는 빵가루 한 알보다도 더 작은 점으로 찍힌 영주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고, 검을 배우며, 전술을 익힌다.

전쟁 경험이 있는 놈들은, 이에 더해 전략안까지 갖추겠지.

아무리 돌머리로 태어났더라도, 귀족이 도적이 되는 것과 일반 평민이 되는 거랑은 시작부터 차원이 다르다.

……늘 그렇듯이.

“그, 그럼 손 놓고 있어야 합니까?! 그 놈들, 오늘은 저희를 그냥 죽이려고만 한 게 아니에요! 저희 마을 아이들을 죄다 잡아갔습니다!”

“네?”

아까 마을 사람들이 내 말 잘라먹었을 때, 애들 어쩌고 한 것 같긴 한데…….

그럼 애들이 안 보였던 게, 천막 안에 눕힌 게 아니라 끌려갔던 거였나.

하지만 마을 바깥에 있던 위슨은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야 여러분들이 오셨을 때는, 이미 애들은 거의 대부분 끌고 갔으니까요! 지금 이 마을에 남은 아이는, 올리비아의 자식 딱 하나뿐입니다.”

아마 메린이 구한 그 아이겠지.

“끌려간 애들이 전부 몇 명이죠?”

“열 명이요. 전부 네다섯 살쯤 된 애들입니다. 나그네님,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제, 제 딸도 잡혀 갔는데 그 어린 것이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촌장이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두 손을 테이블 위에서 두고 주먹을 쥐었다.

네다섯 살쯤 된 어린애가 열 명, 도적들에게 잡혀갔다.

그 결과, 마을엔 아이가 딱 하나 남았다.

다른 노인은 없다.

그런 일도…… 있나?

“크흐흑…… 죽은 아내가 이런 내 꼴을 보면 대체 뭐라고 할지……!”

“……”

……그래, 지금 그게 뭔 상관이야?

애들이 잡혀갔다는데!

하지만……

하, 이거 미치겠네.

아무리 봐도 우리 넷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같은데?

아니, 고작 네 명이서 거의 군대나 다름없는 도적단을 어떻게 찾아서 끝장낼……

…………필요는 없지.

그래. 중요한 건 그 놈들이 아니야.

귀족이라는 거에 충격 먹어서 너무 그쪽으로 생각해버렸지만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아무도 그 도적단을 끝장내달라고 하지 않았어.

그냥 애들을 찾아달라고 했지.

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에 끌려간!

그렇다면, 못할 거 없다.

“방법이 있습니다.”

단호히 말하자, 절망에 찬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떨렸다.

“저, 정말인가요?”

“그럼요.”

희망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한 그 눈동자를 마주보며, 나는 확신을 담아 선언했다.

“애들을 찾아드리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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