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4화 : 위화감은 어쩔 수 없어 (4)
* * *
촌장집을 나오자마자, 로나와 위슨을 불러 창고로 향했다.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근처에 앉아 있던 메린이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보았다.
“다 끝났냐?”
“아니, 절반 끝났어. 저 놈들 중에 누구 깼냐?”
“글쎄? 몸 움직인 새낀 하나 있긴 했는데, 입 연 새낀 하나도 없어.”
한 놈이 연기를 펼치고 있군.
지금 아마 속이 덜컥했을 거다.
“누구?”
“이 새끼.”
메린이 한 놈을 발로 툭 건드렸다.
놈의 몸이 흐느적흐느적, 힘없이 흔들렸다가 다시 축 늘어졌다.
“흠……”
아마 뺨을 때려도 계속 연기할 것이다.
더 큰 고통을 준다면 항복하겠지만……
자꾸 힘과 폭력에 의지하면 안 되지.
심성이 고약해진다구!
간지럽히는 게 제일 좋지만, 지금은 새 잡아올 시간도 아깝다.
“위슨, 불 좀 켜줘.”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창고 안이 확 밝아지며 눈이 부셨다.
아마 그 스라소니를 꺼낸 거겠지.
나는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열연을 펼치고 있는 도적에게 약간 감탄한 후, 놈의 눈 하나를 까뒤집었다.
그리고 다른 쪽 검지손가락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떠진 눈으로 서서히 접근시켰다.
오.
떨린다, 떨린다.
내 손가락이 놈의 눈알 한치 앞까지 가자, 눈꺼풀이 아주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대로 물러났다가……
다시 직전까지 확 내밀면……!
“우와아아악! 저리 꺼져, 이 미친 새끼야아아!!”
“훗. 성공.”
고도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놈은 일개 도적이다.
통하지 않을 리가 없지!
나는 다시 몸을 펴고 일어나, 의기양양하게 놈을 내려다보았다.
“우와, 카엘 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손가락 한 마디씩 꺾는 게 어떨지 여쭤보려던 참이었는데!”
“난 가끔 네가 사제님이라는 게 정말 놀라워.”
다른 전투사제도 이러나?
“큭, 이 잔악무도한 놈 같으니……!”
도적은 굉장히 분통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나보다 약간 연상일 듯한 얼굴이 빛 아래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악마 같은 놈! 나한테 뭔 짓을 하든 소용없을 거다! 절대 입 안 열어! 곧 대장님이 네놈들을 싹 다 쓸어버리실 거다!”
“악마 같다니. 아무리 손가락 한 마디씩 꺾으려 했다 해도 사제님에게 그런 말을 하면 쓰나.”
“너 말야, 새꺄, 너!! 사람 눈 찌르려고 한 너, 이 미친놈아!!”
이건 굉장히 큰 오해이며 천부당만부당한 비난이다.
왜냐면 난 눈 찌를 생각 전혀 없었는걸!
제대로 그 직전에 멈췄는걸!
나는 놈의 두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답할지 말지는 알아서 해. 묻는다. 애들을 마차에 실었냐?”
“……”
“네 동료들은 전부 말 타고 떠났고? 야영지 있냐? 소뿔 투구 쓴 놈이 대장이냐?”
“……”
놈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흠흠, 도적치고는 훌륭한 충심이군.
하지만 눈과 얼굴이 훌륭하게 배신을 때리고 말았다.
이 놈 이거, 거짓말 못하는 성격이구만?핫핫하!
“알려줘서 고마워!”
“난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이, 이거 진짜 미친놈이잖아?!”
“답례로 편하게 재워줄게. 위슨, 수면물약 있어?”
작은 물약병을 전달받은 후, 놈의 턱을 잡고 입 안에 물약을 쏟아넣었다.
삼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놈의 입을 막는 동시에, 코를 꽉 쥐고 고개를 하늘로 젖혔다.
이내 놈의 목젖이 여러 번 꿀렁였고, 나는 그제야 놈을 놓아주었다.
콜록콜록, 놈이 거친 기침을 하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 악독한 새끼……!!”
“악독하다니.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약 먹이기’ 비술인데.”
무려 내가 2대째 잇고 있는 비술이다.
초대(??)는 물론 우리 엄마이고.
고향 토박이로 평생을 사신 분이 어떻게 이걸 체득하고 계셨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지만, 원래 초대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이 방법 말고도 여럿 있다.
박하 잎을 씹게 한 후 먹이기, 스튜나 수프를 다 먹어갈 때 몰래 그 그릇에 붓기, 하품한다고 입 벌렸을 때 붙잡고 목구멍에 붓기 등등…….
당연히 다 내가 직접 체험한 거다.
그 치료사 물약의 쓴 맛이 덜했다면 이 비술이 탄생하지 못했겠지.
빌어먹을 아저씨 같으니라고.
정말 하나도 고맙지 않다.
“지라……마…….”
욕지기를 내뱉던 놈의 눈이 갑자기 풀리며 풀썩 쓰러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가슴이 움직이는 걸 보니, 진짜 잠든 듯했다.
“효과 빠르네.”
“즉효성이니까. 이제 어쩔 거냐?”
어쩌긴, 알 거 다 알았으니 움직여야지.
나는 세 사람을 찬찬히 보며 입을 열었다.
“네다섯 살 애들 열 명이야. 촌장님 말로는, 우리가 여기 왔을 땐 이미 애들을 데리고 간 뒤라고 했어. 이 마을로 오는 길에 마차를 본 기억은 없으니, 분명 애들을 안고 갔을 거야.”
“……말 탔겠네.”
메린이 중얼거렸다.
“그래. 말 타고 간 게 아니면 우리가 못 봤을 리가 없어. 그럼 놈들은 대강 몇 명일까?
여기 마을에 남은 놈이 대충 스물이었지. 애들 데려간 놈이 대충 열 명이라 치고, 대장에 호위까지 생각하면 대강 서른 예닐곱 되겠지.
귀찮으니 그냥 사십 명이라 쳐.”
그리고 놈들은 분명, 제대로 애들을 묶든 뭐든 해서 끌고 가기 위해, 중간에 한 번 멈췄을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도 저항했을 테니, 놈들 중에 부상자가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거기서부터 애들을 수레에 태웠을 수도 있다.
“촌장님 말대로 이틀 전에도 여기 왔었다면, 놈들은 분명 어디 야영지를 차렸을 거야. 나올 때 텅텅 비웠을 리는 없으니, 대충 열 명 정도는 남겼겠지.”
“그럼 대충 오십 명……. 근데 그 야영지를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그래.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위슨에게 물었다.
“늑대…… 테라도 냄새로 추적할 수 있지? 한 번에 하나씩이야?”
끄덕.
“좋아. 그럼 이 놈들 중 한 놈의 냄새를 쫓아가자.”
“엥? 애들 냄새가 아니고?”
눈을 동그랗게 뜬 위슨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 빼앗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쓸데없이 시간만 먹을 거야. 야영지로 가면 애들의 행방을 알 수 있겠지.”
마을에 있던 스무 명 중, 몇 명은 마을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최소한 한 명은 야영지로 돌아가서 우리에 대해 알렸겠지.
포로도 있겠다, 놈들은 우리의 습격을 예상할 것이다.
습격이 예상된다면, 잃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먼저 뒤로 빼는 게 상식일 터.
즉, 애들을 다른 데로 빼돌릴 것이다.
“일단 그렇게 준비하고 출발하자. 서둘러야 돼!”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로나가 촌장에게 도적놈들을 잘 보라고 당부하는 동안, 위슨은 그때까지도 광장에서 놀고 있던 늑대를 불러 창고 안에 들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을 입구 바깥으로 갔을 땐, 메린이 이미 말에 오른 채 말고삐 둘을 쥐고 있었다.
“그, 그럼 나그네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최선은 다하겠지만 너무 믿진 마세요. 위슨.”
엘크에 올라탄 위슨이 늑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늑대가 땅에 대고 냄새를 맡더니 길게 울부짖고 뛰기 시작했다.
“이랴!”
바로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으로 그 뒤를 따랐다.
늑대의 뒤를 따라 쉬지 않고 달렸다.
역시 정령은 정령이구나.
늑대의 다리로 말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뛰는 데다, 뭣보다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이러다가 말이 먼저 나가떨어지겠는데?
초원을 달리다가 방향을 틀어 언덕으로 향하기 시작할 무렵, 꼭대기 부근의 나무 사이로 무언가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메린이 곧바로 외쳤다.
“천막 같은데!”
“바퀴와 말발굽 소리, 포착 완료. 훨씬 멀리 있어. 어쩔 거냐?”
바로 귓가에 들린 목소리는 분명 파랑새일 거다.
소리의 정령이니까 마차나 수레바퀴 소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해두었던 것이다.
의외로 순순~히 들어준 게 놀라웠는데……
뭐, 위슨이 시켰겠지.
그나저나, 놈들이 역시 애들 먼저 출발시켰군.
참 고맙기도 해라.
“바퀴 소리를 쫓아가자! 근데 애들이 타고 있는 거 확실해?!”
“애 울음소리가 여럿 들리니 맞겠지.”
“일단 가보자!”
늑대가 다시 한번 울며 방향을 살짝 틀었다.
언덕 꼭대기가 아닌, 그 옆을 빙 돌다가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는데, 덤불이 울타리마냥 길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내리막길에서 덤불 넘는 건 일도 아니지.
고삐를 살짝 당겨 말이 뛰어넘게 한 후,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메린은 그냥저냥 괜찮았고 로나는……
……우와, 아슬아슬했다!연습 좀 시킬까?
위슨의 엘크는굉장히 가볍게 퐁 뛰어오르더니, 전혀 흔들림없이 사뿐히 착지했다.
제길, 정령 진짜 부럽다.
“……!”
덤불 울타리가 또 하나 보였다.
늑대가 앞서 펄쩍 뛰어 넘었는데, 전보다 약간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땅을 달렸다. 저 너머 지대가 여기보다 낮다는 뜻이다!
“조심해! 약간 아래로 떨어진다!”
뒤의 녀석들에게 외친 후, 말을 시켜 덤불을 뛰어넘었다.
하늘을 향해 붕 떠오른 몸은,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는 중에, 시야가 좌우로 확 트였다.
마차.
애들을 실은 짐마차가 보였다!
“히히잉!”
훌륭히 착지하자마자, 말이 크게 울었다.
……이 녀석, 어째 신난 것 같은데?
뒤쪽에서 비슷~하게 흥분한 울음소리가 둘 들린 걸 보면, 의외로 말들이 이런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카엘!”
“마차를 빼앗는다!”
당연하게도, 마차 주변엔 말을 탄 놈이 여럿 있었다.
맨 뒤에서 보조를 맞추는 놈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늑대가 크게 울부짖었다.
“우우”
우리 말들은 저 정령에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아 하고 있지만, 말은 원래 겁이 많은 동물이다.
길가의 돌뿌리에도 가끔 놀라는 놈들인데, 포식자의 포효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놈들의 말이 갑자기 멈춰 서서, 두 발을 쳐들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다!
“메린!”
메린과 나는 마차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졌다.
메린이 마부석에 뛰어내려, 고삐를 쥐고 있던 놈을 던져버리는 것과 동시에, 내가 놈이 잡고 있던 고삐를 쥐었다.
“카엘 님! 출발하세요!”
바로 등 뒤에서 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가 짐칸에 올라갔으리라 믿고, 고삐를 흔들어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랴!!”
두 마리의 말이 크게 울며, 튀어나가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돌아가는 바퀴 소리를 뚫고, 뒤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놓치면 안 돼! 쫓아! 쫓으라고!!”
“크워어엉!!”
“햐아아악!!”
“으아아아악!”
뒤쪽에서 늑대와 스라소니, 말,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뒤섞여서 들려왔다.
발굽 소리도 간간이 들리는 것 같은데, 시선이라도 끄나?
위슨과 그의 정령이 만드는 광란의 소리는 점점 멀어져, 마침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 뒤를 쫓아오는 말발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경쾌한 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위슨이 마차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향해, 엘크가 입을 열었다.
“어이! 여서 서쪽으로 틀으쇼잉! 숲이 있응께 거서 숨 좀 돌리라고!”
“알았어!”
엘크가 퐁퐁 뛰면서 마차 앞을 달리기 시작하더니, 서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를 몰아, 그 뒤를 따라갔다.
숲 속에 마차를 세운 후, 고삐를 쥔 채 그대로 주우욱 녹아내리듯이 드러누웠다.
“얌마, 일어나.”
“……좀 있다가…….”
긴장이 풀리면서 온 몸에 기운이 쭈욱 빠져버렸다.
메린에게 고삐를 넘기고 멀거니 저 앞을 쳐다보고 있으니, 방금 전의 일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와아아…….”
진짜 어떻게 되긴 됐구나.
그것도 우리 중에 다친 사람 하나 없이.
애들도 열 명 전부 데려왔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매끄럽게, 완벽하게 처리했다.
……우리 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삐끗했다면 꽤 골치 아팠겠지.
어쩌면 말 타고 칼싸움을 했을지도 몰라.
어우, 끔찍해…….
“……아.”
그러고보니 마차에 올라타느라 말 버렸잖아.
어떻게 찾지?
아, 망할, 짐 거기 다 있는데.
음……
휘파람 불면 올까?
파랑새가 드러누운 내 이마에 앉아 콕콕 쪼았다.
“말? 좀 있으면 올 거야.”
“엉?”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수수께끼는 금방 풀렸다.
우리가 이 숲에 들어온 방향과 전혀 다른 쪽에서 말 울음소리가 셋 들린 것이다.
이내 늑대와 스라소니가 말 세 마리와 함께 나타나, 위슨 옆에서 몸을 푸르르 털었다.
“헉. 진짜 왔네.”
“훗훗훗.”
“왜 네가 우쭐해하냐?”
나는 몸을 일으켜, 한창 두 맹수를 어르고 있는 위슨을 불렀다.
나를 쳐다보는 두 검은 눈동자엔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역시 정령들이 움직일 때 위슨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체력이 소모되는구나.
그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진짜 수고 많았어. 너희 덕분에 수월했다. 좀 쉬어.”
위슨은 고개를 끄덕이고 늑대와 스라소니를 돌려보낸 다음, 엘크 등에 그대로 풀썩 엎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저래도 엘크 등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겠지?
젠장, 진짜 부럽다.
나는 한숨을 쉰 후, 뒤쪽 짐칸을 살펴보았다.
열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짐칸에 타 있던 로나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수고하셨어요, 카엘 님. 성공했네요!”
“응. 로나도 고생했어. 메린, 너도.”
고삐를 쥔 채, 메린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짐칸에 앉은 아이들의 얼굴을 슥 훑어보았다.
다들 잔뜩 겁을 먹고 있긴 해도, 어디 다치거나 하진 않은 듯했다.
하나 같이 두 눈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그러고보니 파랑새가 ‘애 울음소리가 여럿 있다’고 했던가?
“우…… 으으……”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는 여자애의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나는 최대한 웃으면서 아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집에 데려다줄게.”
“……지, 징짜?”
“그럼! 대신 천막에서 자야 돼. 마침 숲도 가까우니까 부모님이랑 소풍 나온 셈 쳐.”
차마 너네 집 불에 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응? 아닝데.”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집 숲이랑 먼데?”
“응? 바로 코앞에 있던데?”
“아니야, 오빠!숲 없다니까!”
…………허?
장난치는 것 같진 않은데……?
소녀는 자신의 둥근 턱에 작은 손가락을 대고 몸을 천천히 앞뒤로 흔들었다.
흔들의자에 앉은 할머니처럼.
“우응, 으으응~ 뭐더라, 그거 있엉. 물 많은 거. 호, 호오…… 뭐였징?”
등골이 점점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내 굳어버린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환히 웃으며 외쳤다.
“아! 호수! 호수호수!우리집 앞엔 호수 있엉!”
“밀리도! 밀리 사는 집도 호수 있어여! 물고기 많아여!”
“우리집은 풀밭!”
“우리집은 바다!”
아이들이 제각기 왁자지껄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시계탑이니 신전이니 시장이니 방앗간이니,
무서운 기억 따위 이미 저 멀리 날려버린 채,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세상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입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