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73화 : 악연 멈춰!! (1)
* * *
다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도에 따르면 요 앞에 커다란 강과 다리가 있는데, 건너편으로 가려면 무조건 그 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다.
정 더우면 그냥 물에 발 담그며 강을 건너도 되지만, 물살이 제법 빠른 데다 깊이가 꽤 되어서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다.
애초에 난 그러기 싫다.
……그러고보니 전에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옛날에 이 주변, 그러니까 다리를 포함해, 강 이편과 저쪽을 아우르는 나라가 있었다고 했던가?
작지만 제법 풍요로운 나라였는데, 몬스터 때문에 멸망했다고 적혀 있던 것 같다.
이렇게 버려진 땅은 원래 근처의 다른 영주가 갖기 마련인데, 이 주변에 있는 거라곤 강 밖에 없다.
그러니 농사야 잘 되겠지만, 굳이 그거 때문에 땅을 가져갈 영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몬스터도 우글대고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 없겠다 싶은 거겠지.
그 탓에 꽤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다리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질 만큼.
그걸 보다못한 우리나라 전대 국왕이, 이 주변을 국유지로 편입시켰다.
왕가의 실록엔 이미 만들어진 문명의 산물마저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 몰린 것을 통탄하며 내린 결정이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은 다리가 무너져 있어서, 강을 직접 건너다가 빠져 죽을 뻔해 빡치신 거라고 한다.
‘이거 하나 자발적으로 안 돌보냐? 이런 우라질, 거지 같은 귀족 새끼들! 오냐, 그냥 내가 한다, 새끼들아, 내가 해!’
……라는 말을 남기셨다는 소문이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덕분에 다리도 더 튼튼한 걸로 다시 생겼고, 주변에 살던 몬스터도 정기적으로 소탕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강과 다리는 지금 유일한 인간 왕국인……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래, 올레이스.
올레이스 왕국의 소유인데, 그 사실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돈독 오른 영주 것이었으면 통행요금 엄청 뜯겼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왕국에서도 관리비 명목으로 요금 청구할 수도 있지만, 뭐, 그래도 저렴하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야.”
“흐흥~”
“아니, 당신 진짜 뭐냐고.”
아무도 없는 다리 앞을, 웬 수상쩍은 자가 떡 막아서면서 돈을 요구했다.
말에 치이든 말든 그대로 달리려 했는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선 교묘~하게 말의 얼굴을 지나갔다!
거듭 말하는 건데, 말은 겁이 많다.
그래서 저 날강도 덕분에, 나는 맘에도 없는 로데오를 한 판 해야 했다.
젠장,진짜 죽는 줄 알았네.
다시 생각해도 식은땀 난다.
창조주가 내게 말 타는 재능이라도 준 건, 다 이때를 위한 거였는지도 몰라!
참고로 다른 두 아가씨는 말이 날뛰자마자 땅으로 뛰어내렸다.
정말 치사하지 않나?
위슨의 엘크는 더하다. 화살을 뿔로 가볍게 튕겨내더니 입으로 텁 받는 묘기를 선보였다!
……하, 진짜 부럽다니까.
아무튼, 우리는 그 탓에 바닥에 내려서 저 날강도와 대치해야 했다.
일단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내 방침대로 다들 가만~히 있긴 한데……
……솔직히 나도 좀 빡친단 말이지.
고운 말은 안 나올 것 같다.
“뭐냐니, 지나가는 사람인데?”
“그럼 그냥 가지, 왜 돈 뜯냐고.”
“돈 뜯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그냥 작~은 도움 좀 달라는 거지.”
활 쏘면서 말이지.
자주 말하는 건데, 세간에선 그런 걸 강도라고 한다.
그리고 난 강도가 싫다.
그래도 대화를 하기로 했으니, 일단 호칭부터 정해야 하는데……
……이 날강도, 성별이 뭐지?
얼굴은 후드를 깊게 눌러써서 안 보인다.
머리는 긴데……
내 뒤의 남자애도 머리 길고.
목소리가 가느다랗긴 한데……
내 뒤에 있는 남자애가 데리고 다니는 파랑새도 그렇단 말이지.
아니, 파랑새는 상관없나?
허리선도 가늘긴 한데……
내 뒤의 남자애도 해당되니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아이씨, 쓸데없이 헷갈리네.
위슨 녀석한테 근육 키우라고 하든가 해야지, 진짜!
돌겠네, 날강도 이 새끼 이거 남자야, 여자야?!
최후의 보루인흉부도 평평하고!
아, 그래, 그냥 이 새끼로 부를까?!
“어머머, 당신, 어디를 쳐다보는 거야?”
“……”
강도 새끼가 여자처럼 흉부를 팔로 감쌌다.
왠지 모르게 빡침이 올라온다.
말해버릴까?
아니, 그건 역시 좀 그렇지.
그런 말을 하는 건 역시……
“아직 어린 거 같은데, 그래도 사내다 이거지? 흐흥~ 엉.큼.하.긴!”
“……”
교양 있는 문명인으로서 좀……
“너무너무 무서우니까 배상해줘. 금화 한 닢 추가.”
“미쳤나, 위에 아무것도 안 달렸으면서 지랄하네, 남자 새끼가!! 억울하면 바지 까봐, 미친 새끼야!”
앗.
이런,돈 얘기에 참지 못하고 터뜨려버렸다!
……근데 진짜 남자 아냐?
내 바로 뒤에 엄청나게 비슷한 사례도 있고…….
“야, 이 새끼야, 지금 뭐라고 했어?! 그것도 눈이라고 달고 다니냐?! 이 완벽한 몸매를 앞에 두고 어떻게 그딴 망발을……!”
흠, 길길이 날뛰는 거 보니 여자로군.
다행이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반 상식이 살아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사고방식은 완전 글러먹었지만.
“완벽……? 자신감 한 번 엄청나네. 아주 흘러넘치는구만.”
“중간에 걸릴 게 없으니 쭉쭉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양심이랑 같이요. 메린 님 같은 분도 자랑 전혀 안 하시는데 기가 막히네요.”
“……”
그리고 내 옆의 로나는 나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휘두르는 철퇴만큼 묵직한 공격이었다.
“이, 이이이이, 이런 굴욕 참을 수 없어!! 메린? 거기 여자?! 저 여자도 가슴 작잖아! 나랑 별반 차이 없구만!”
저 날강도 새끼가 감히!
이건 절대 못 참아!!
“지랄하네, 얜 움직임에 방해되니까 일부러 누르고 있는 거라고! 너른 벌판 주제에 감히 어딜 갖다 대?!”
“야, 왜 네가 열 받아 하는 거냐?”
위슨의 지적은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이 세상엔 절대로 부정해서는 안 되는 진리라는 게 있다.
그리고 동료의 명예를 폄하하는 망언은 용사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카엘 님 말씀이 맞아요! 메린 님은 벗으면 굉장하단 말이에요! 황무지의 돌멩이 주제에 나서지 마세요!”
로나까지 내게 합세해주었다.
큭, 이 얼마나 뜨거운 동료애란 말인가……!
……위슨이 어딘지 한심해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는 제대로 남자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 모르는 거다.
정작 당사자인 메린은, 별 관심 없는 눈으로 조용히 날강도를 주시하고 있지만.
아무튼 이건 중요한 거다.
엄청 중요한 거라고!
날강도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나, 나도 일부러……!”
“거짓말이네요!”
“크으으윽?!”
로나의 결정타에 부들부들 떤 채, 날강도는 그 이상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왠지 불쌍해.
그래도 불합리한 요금을 낼 순 없지.
한 사람당 금화 두 닢이라니, 금화가 어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아니고.
“아무튼 못 내니까 다치기 싫으면 저리 가쇼.”
“아무튼 못 비키니까 죽기 싫으면 얌전히 내시지?! 내 정신적 충격에 대한 배상으로 금화 다섯 닢 추가해서!”
이거 진짜 완전 날강도 아냐?
아니, 이미 날강도이지.
“아니면……”
날강도가 갑자기 나를 보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저, 저거저거, 저 나쁜 행동 어디서 많이 봤는데!
여자는 풀밭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왔다.
보통 사람이 아니야.
아니,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야……!
뒷걸음질치는 내 움직임을 묶어버리듯이, 여자가 내 턱을 잡았다.
“누나랑 좋~은 거, 할래……?”
이 구도……!
좋지 않은 기억이 확 떠올랐다.
적갈색머리라든가,
뾰족한 귀라든가,
질척질척한 목소리라든가……!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으악!”
“꺄악?!”
나도 모르게 날강도를 홱 밀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기습을 당한 여자가 맥없이 뒤로 밀려났고,
“……!”
그 사이를 메린이 검을 뽑은 채로 끼어들었다.
“경고는 충분히 했어. 제압한다!”
“아.”
더 무어라 하기도 전에 녀석이 날강도에게 매섭게 달려들었고,
“……”
날강도는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땅바닥에 처박혔다.
완전히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메린은 날강도를 발로 툭툭 건드려본 후, 검을 거두며 돌아섰다.
“가자.”
“……어. 응.”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와, 이걸 물에 안 던지시네요.”
“……가끔은 네가 쟤보다 더한 거 같아.”
다시 말에 오르려는 순간, 메린이 갑자기 다시 돌아섰다.
“엉? 왜……윽?!”
메린은 다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엔 반쪽이 난 화실이 하나 떨어져 있다.
메린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잘라버린 것이다.
누가 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녀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강도년이?!”
“칫……!”
날강도의 손에는 짧은 활이 들려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어떻게……!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로나 역시 심각성을 느꼈는지 곧바로 철퇴를 손에 들었다.
“메린 님!”
“아, 괜찮아, 괜찮아. 활 따위 별 것 아니잖아.”
“아니, 너만 그렇거든?”
뭐, 저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거니 그냥 맡겨도 되긴 하겠지만…….
“별 거 아니라고……? 아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여자의 목소리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날강도이긴 하지만, 자신의 활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다.
날강도이지만.
“역시 이 느낌…… 엘프구만?”
“엘프?”
파랑새의 말에, 나뿐 아니라 위슨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 엘프. 왜 이런 데 있는 거지? 숲에 처박혀서 안 나오는 싸가지 말아먹은 종자들인데.”
“……”
그, 뭐냐, 엘프는 정령과 친한 거 아니었나?
그 대현자도 정령과 친했었고.
……혹시 파랑새 녀석, 그냥 위슨이랑 네이멜을 뺀 모든 생물은 죄다 싫어하는 거 아니야?
아무튼 저 여자가 엘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날강도가 화살 세 개를 한꺼번에 시위에 걸었다.
“벌집으로 만들어주마!!”
“……!”
엘프는 모두 활의 명수일 터……!
아무리 메린이라도 엘프의 활 앞에선 그리 쉽게……
“끝.”
……쉽게 끝나버렸다.
그렇구나.
날아오는 화살을 자르고 피하면서 접근하면 되는 거구나.
그렇구나…….
……저게 어떻게 되는 거야?
그래도 죽이거나 팔을 자를 정돈 아니라고 여겼는지, 메린은 축 늘어진 날강도의 몸에 더 칼을 대진 않았다.
대신, 여자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홱 벗겨버리더니 그걸 밧줄 삼아 여자의 손목을 꽁꽁 묶어버렸다.
자연히 망토의 후드 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여자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주황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듯한, 낙엽이 생각나는 빛깔의 긴 머리카락,
오뚝한 코,
가느다란 목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특징인 뾰족한 귀.
……누가 봐도 엘프였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저 얼굴은 정말이지……
“……윽.”
……그 적갈색머리 엘프가 생각나서 몸서리가 쳐졌다.
젠장, 나중에 엘프의 나라도 가야 되니까 그 전에 이 끔찍한 기억이 없어져야 할 텐데.
그보다 그 엘프 마녀도 그렇고, 하나 같이 음란…… 아니, 방정맞네.
네이멜이 엄청 특이한 부류였던 걸까?
“가자.”
“어, 그래.”
다시 말에 올라타,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날강도 엘프를 묶어버린 채 두고 온 게 좀 걸렸지만……
뭐, 자업자득 아니겠어?
나 카엘 에스트렐, 굉장히 관대하지만 강도 새끼에게 베풀 자비 따윈 없다.
여자이건 말건 알게 뭐야.
돈 뺏는 놈은 크든 작든, 엘프든 드워프든 죄다 나쁜 놈이다.
무사히 다리를 건넌 우리는 다시 길을 따라 달렸고, 오후가 되어 한 마을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기 때문에 좀더 가도 됐지만……
마티아스의 부탁도 있으니 그냥 마을에 묵기로 했다.
그렇게 큰 맘 먹고 결정을 내렸건만,
“흐흥~ 또 만났네~?”
“……아잇.”
여관 앞에서 또 날강도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 엘프라는 종족이랑 엄청난 악연이 쌓여 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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