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77화 (77/475)

〈 77화 〉 75화 : 악연 멈춰!! (3)

* * *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엘프의 얼굴을 쳐다보던 내 고개가, 자연히 작은 사제님 쪽으로 돌아갔다.

제발, 아니겠지.

그런 작은 기대를 품었건만……

“……”

로나도 아연한 얼굴로 블루벨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바로 알 수 있는 사제님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다.

즉, 저 소리는 진실……?!

“로나, 저 말이 진짜야?! 난 인정 못해!”

“어어…… 이분이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아요……. 하지만…… 아니, 그래도!”

로나도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듯했다.

세상에,내가 용사라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소리가 또 있었다니!

숲의 일족, 그러니까 엘프라서 숲에 사는 짐승들 고기를 못 먹는다니, 이게 정녕 진실이란 말인가?

그럼 내가 봤던 그 엘프는 뭐였단 말인가?

숲에서 잡은 짐승의 고기를 한껏 굽고 끓인 요리들을 맛있게 다 퍼먹던 그 대현자님은 정녕 돌연변이였단 말인가?!

“지랄하네. 싸가지 없는 종자 아니랄까봐 별 개소리를 다 씨부리고 있어.”

“……”

엄청나게 격한 부정이 혼란에 빠진 우리를 구해주었다.

위슨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혼자 묵묵히 식사하고 있으니, 저건 순수한 파랑새의 발언일 거다.

……근데 말 나오는 시점에 뭐 먹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앉은 위치상 목깃에 얼굴이 가려져서 망정이지…….

사실은 숨길 생각 없는 건가?

“뭐? 꼬맹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지랄 말라고 했다, 왜? 내가 애들한테 들은 게 있는데 어디서 사기를 쳐? 엘프들이 날개사슴만 보면 침부터 질질 흘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예 방목장까지 하고 있다더만, 어디서 되도 않는 헛소리를……!”

뭐야, 역시 헛소리였잖아.

그럼 왜 로나가 알아채지 못한 거지?

……아, 그런 건가?

로나의 거짓말 감지 능력은‘말하는 사람의 죄책감을 감지’하는 거다.

그건 달리 말하면,

말하는 사람이 온전히 진실이라고 믿는다면,어떤 허무맹랑한 소리라도‘진실’이 된다!

그렇구나!

그래서 막 고문하는 거였구나!

제길, 알고 싶지 않은 지식이 늘었어!

참고로 날개사슴은 말 그대로 날개 달린 사슴이다.

자신의 길을 막는 놈은 죄다 발굽으로 걷어차는 악질적인 초식 몬스터로, 날아다녀서 그런지 일반 사슴보다도 육질이 부드럽다고 정평이 나 있다.

……그래봤자 몬스터이니까 일반 사슴고기가 건강에는 훨씬 더 좋다.

몬스터 고기는 기본적으로 독이 있으니까, 제대로 처리 안 하면 큰일난다고.

꿍, 블루벨이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 녀석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야! 숲의 일족에게 숲의 생명들은 모두 이웃사촌이라고! 그런 아이들을 잡아먹다니……! 나라도 고기는 절대 먹지 않겠어.”

“풀은?”

“하, 그 아이들은 원래 먹히도록 되어 있다고. 먹어주는 게 그 아이들을 살리는 거야!”

뭐, 과일 종류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저 녀석이 먹고 있는 빵의 재료인 밀은, 그런 종류가 절대 아닌데 말이지.

……아니지. 곡물 종류는 대개‘맛있다’고 느끼잖아.

그게 사실은 자신들을 더더욱 많이 기르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렇다면 저 웃긴 엘프의 말도 일리가 있긴 해.

흠, 좋은 고찰 주제인걸?

고기 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쌉소리지만.

이웃사촌은 개뿔.

지들끼리도 잡아먹는데.

“아, 그러셔? 안타깝네, 이거 양고기 그럭저럭 괜찮은데,”

덥썩.

눈 앞에서 고기 한 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맞은편의 엘프는 뭔가 우물거리고 있고!

블루벨은 입 안의 음식을 꿀꺽 삼키더니, 또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나 참, 고기를 먹는 야만적인 방식을 우리 일족이 어쩌다가 배워서는……!”

“저기요, 입가의 기름이나 닦고 말하시죠?! 고기 잘만 처먹는구만!!”

“양이라며? 양은 숲의 짐승이 아니잖아.”

“……”

그러니까 뭐야, 사슴이나 토끼 같은 짐승은 숲에서 사니까 안 되고,

소나 양 같은 건 사람이 키우는 짐승이니까 아무 가책없이 막 퍼먹을 수 있다?

아니, 뭐 이런 등신 같은 논리가 다 있어?

짐승 생명 존중할 거면 다 똑같이 해야지?!

“뭐, 사슴고기 먹으면 두드러기라도 나세요?”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잘못된 건 잘못된 거야. 원래 에……우리는 풀이든 고기든, 생명을 섭취하면 안 돼. 아침 이슬과 햇빛으로 충분해야 한다고.”

아침 이슬에 햇빛이라니 뭔 동화 속 얘기도 아니고.

……그래도 뭐, 먹는다고 죽는 건 아니구나.

그냥 신념으로 거부하는 거였군.

근데 아까 보니까 겉모습만으로는 무슨 고기인지 모르는 거 같은데……

이 고기들 죄다 소, 돼지, 양, 닭이라 해서 죄다 먹인 다음 실체를 밝혀버릴까?

저 콧대 높은 엘프가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한데.

“카엘 님, 하지 마세요.”

“……응?! 어, 하지 말라니 뭘?”

“지금 엄청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의 얼굴 딱 그대로이시거든요? 뭔지는 몰라도 하지 마세요!”

칫.

예리하긴.

……결국 저 웃긴 엘프를 위한 요리를 따로 주문해야 했다.

주인장의 싱글벙글한 웃음에 제대로 대응해줄 수 없는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

차갑다.

차가우면서 어딘지 향긋한 내음이 느껴진다.

그냥 촉촉히 물기 어린 흙과 풀내음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풀잎들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다.

좀더, 좀더 누워 있고 싶어……

바람도 마침 시원하고……

…………

……………엉?

바람? 땅바닥?

엥?!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은 팅팅 부었는지 잘 안 떠지는데, 그래도 여기가 밖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근데 왜?

왜 내가 밖에서 자고 있던 거지?

“……으윽…….”

어우, 머리야……

어디 부딪쳤었나?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네.

어제 분명히……

분명히……

“……”

기억이 안 나!

그 웃긴 엘프 몫으로 밥 더 시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이씨, 뭐지?!

“어, 뭐야, 일어났네.”

어딘지 실망한 듯한 목소리다.

열심히 마른 세수를 하고 눈두덩이를 누른 후, 힘겹게 눈을 떴다.

메린이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을 손에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은 덤덤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더니,

착!

“……푸후.”

내 얼굴에 물을 뿌려버렸다.

깊은 샘이라도 있었는지 물이 굉장히 차가워서, 눈이 확 떠지긴 했는데……

“……야, 너 나 일어난 거 보지 않았냐?”

“봤지.”

“……근데 왜……?”

“눈 뜨라고.”

“……아, 그래…….”

대충 손바닥으로 물기를 닦은 후, 고개를 들었다.

화창하고 푸르른 하늘 아래, 자고일어난사람 얼굴에 물을 뿌린 사악한 자식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말야.”

“……?”

“그 물, 그냥 세수하라고 두고 가도 되지 않았을까? 내 생각엔 그게 상식적인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응?

어떠냐고, 이 나쁜 자식아, 왜 다짜고짜 물 뿌리고 지랄이야, 지난번에 한 번 그러더니 재미 들렸냐?!”

차분히 얘기하려 했는데, 결국 속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오는 빡침을 막을 수 없었다.

“오, 잠 다 깼네! 역시 효과가 좋다니까.”

“웃지 마, 새꺄!”

“야, 것보다 너, 어젯밤 기억나냐?”

갑자기 녀석이 실실대면서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뭐지? 뭔가 불길하다.

어젯밤 기억이 뚝 끊겼는데,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건가?

혹시 그 엘프 관련인가?

메린 녀석, 그 엘프와 별로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설마.”

설마 메린 녀석, 결국 손을 댄 건가?

짜증과 빡침을 참지 못하고 엘프를 보내버린 거 아냐?

그래서 여기 근처에 파묻으러 온 거고?!

그 엘프 활 쓰니까, 분명 독 같은 것도 쓸 거야.

어쩌면 나한테 독 같은 걸 먹이는 등 어떤 해코지를 해서……!

그래, 그럼 내가 여기서 자고 있던 것도 말이 되지!

……젠장, 이 무슨 추태냐, 카엘 에스트렐!

네놈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이 녀석이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사람 목숨을 끊게 만들다니, 안 그래도 삐끗하면 끝장인데 이 쓸모없는 멍청이가!!

“머리 아프냐? 아, 하긴……”

쪼그려 앉아 있는 메린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메린, 너, 왜…… 왜,”

“엉?”

“왜 그랬어! 아무리 그 엘프가 지랄맞아도 그렇지, 감정 때문에 사람 죽이면 안 된다고 했잖아, 멍청아! 이 구제불능 자식!!”

빠악!

……눈앞에 별이 뜨다 못해 폭발하며, 몸이 풀썩 쓰러졌다.

아, 이건 진짜 제대로 들어왔는데?

다시 일어나려면 좀 걸리겠군.

덤으로 내 정수리에, 오랜만에 동산이 하나 솟아오를 거 같다.

기억해두기 바란다.

어떤 사람의 주먹은 때로 길가의 돌보다도 더 단단하며, 통나무보다도 더 묵직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항상 발언을 조심하는 게 좋다.

사람 목숨은 단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으니까.

나? 난 괜찮지.

왜냐면 난 용사니까……!!

“너 아직 술 안 깼냐? 뜬금없이 뭔 쌉소리를 하고 있어.”

“……예? 술이라뇨?”

웬 술?

밥이랑 같이 맥주 먹긴 했지만,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먹진 않았을 텐데?

“기억 안 나?”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던 그녀는, 갑자기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어제 그 엘프랑……”

메린의 이야기는 이랬다.

저녁을 먹은 후, 무슨 흥이 올랐는지 블루벨이 술 마시기 내기를 하자며 꼬드겼고, 내가 거기 홀라당 넘어갔다고 한다.

말도 안 돼!

“야, 말이 안 되잖아, 내가 그런 거 할 놈이냐?!”

“엘프가 몇 마디 하니까 바로 수락하던데?”

메린이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딱 봐도 비리비리하긴 해? 사내 자식이 술도 하나 제대로 못 먹다니, 푸흐흡!

­­오냐, 함 뜨자, 여장남자 새꺄!!

말도 안 돼…….

“내가 진짜 그랬다고?”

“진짜라니까. 너 그때 좀 취했었을걸?”

“엉? 아니 뭐, 평소보다 좀 마신 거 같긴 하지만……”

희한하게 맥주가 잘 들어가긴 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전혀 믿기지 않지만 어쨌든 술 마시기 내기가 열렸고, 나와 블루벨 둘이서 술통 하나를 다 비웠다고 한다.

내기는 내가 이기긴 했는데, 중요한 건 그 이후라면서 메린이 킬킬거렸다.

“이야~ 진짜 진국이었어! 간만에 실컷 웃었다니까!”

“왜? 왜 웃었는데? 내가 뭐했길래?!”

“푸흐흐, 너 뭐했냐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따금 웃으면서, 이따금 숨 쉬다가 사레 들리면서, 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청년이 잔뜩 취해서는,

거기 모인 다른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되도 않는 팔씨름을 걸고는 팔이 홱 꺾인 채 바닥을 구르면서 깔깔거리며 웃고,

술기운에 엎어진 엘프의 머리 위에 빈 술잔으로 탑을 쌓고,

여종업원에게 치근덕거리다가, 사제님의 손날치기가 뒷목에 작렬해서 엎어졌다는……

……그런 무척이나 슬픈 이야기.

그렇다. 이건 슬픈 이야기이다.

저 녀석처럼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릴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지만!

아무튼! 슬픈 이야기라고!

“푸하하하, 아, 너 진짜 웃겼어!”

“……”

아까부터 메린 녀석은 내가 그런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말도 안 돼, 그게 나였을 리가 없어.

왜냐면 난 기억이 없는걸!

뒷목이 욱신거리는 건 여기 찬 바닥에서 자러 그런 것일 뿐인걸!

아무튼 나 아닌걸!!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웃던 메린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또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더한 게 뭔지 아냐?”

“무, 뭔데?! 뭐가 또 있어?!”

저 입 막아버리고 싶다, 진짜!

아니야, 아무튼 나 아니야!

“너 여기까지 네가 직접 말 몰고 왔어.”

“……뭐?”

오싹,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너 평소 출발시간 되니까 곱게 내려오더니, 진짜 자연스럽게 말 끌고 가서는 말 달렸다니까?

처음엔 너 바로 떨어지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평소랑 완전 똑같아서 그냥 냅뒀어.”

“……”

“한참 가다가 혀 꼬인 목소리로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고 하더니, 말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서 자더라. 그리고 이제 일어난 거고.”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난 전혀 기억 안 나는데?!

아, 아니지. 과장일 거야.

상식적으로 술이 안 깬 상태로 어떻게 말을 타, 말이 안 되잖아?!

“아, 카엘 님. 일어나셨네요.”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던 건지, 로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어쩐지 메린 님이 늦으신다 했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 응. 저기, 로나, 근데 내가 진짜 여기까지 직접 말 타고 왔어?”

로나는 커다란 잿빛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더니, 곧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대단했어요! 카엘 님이 드러누우실 때까지 전혀 눈치 못 챘다니까요! 역시 카엘 님, 일류 전사보다도 뛰어난 승마 솜씨,”

“으아아아아아아!!”

……사제님이 눈을 반짝이며 던진 칭찬은 내 절규 소리에 무참히 묻혀버렸다.

아…… 누가 그랬던가?

술을 먹어야지, 술에게 먹히면 안 된다고.

정말이지 뼈아프게 통감하는 교훈이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땅바닥을 구르며 절규한 후,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내 머리에 붙은 풀잎을 떼며 굉장히 즐겁게 웃는 이 녀석과,

늦은 사춘기 때문에 히죽거리고 있는 로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다음에 또 그러거든, 그냥 기절시켜.”

“큭크크, 푸히히히!”

“야, 나 진지하거든?! 목 부러져 죽기 전에 말려 달라고!”

“아, 알았어, 알았다고. 큭크흐흐흐!”

젠장, 그게 그렇게 웃긴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웃는 거 아냐?

아니, 그전에 내가 갖은 추태를 부리는 걸 왜 아무도 안 말린 거야?

“아~ 그게, 왠지 굉장히 즐거워 보이셔서…… 카엘 님, 굉장히 많이 쌓이셨구나~ 싶어서……. 헤헤, 죄송해요.”

“……”

그렇게 대답하는 로나는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 너도 즐겼구나.

저~기 혼자 책 읽고 있는 위슨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유쾌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로나는 혼자 킥킥 웃으며 위슨이 있는 곳으로 먼저 돌아갔다.

하……나도 가야지…….

“햐~ 실컷 웃었다!”

“거 참 잘됐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 잠깐. 뒤쪽에.”

메린 녀석이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 등을 툭툭 털어주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뭘? 술 마시기 내기? 안 해. 상금 걸려도 안 할 거야.”

“그거 말고.”

“그럼 뭐.”

고개만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직 희미하게 웃음이 남아 있는 녀석의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혼자 술로 삭히지 말라고.다음부턴 그냥 하던 대로 해.세상 무너진 것처럼 지랄하든가, 바닥에 축 늘어져서 꿍얼거리든가.”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라고 물으려는 내 말마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내 얼굴 어두웠잖아. 그럼 뭔가 있다는 거지. 말 안 하길래 그냥 냅뒀더니, 술통에 대가리를 처박은 꼴이 되고 말야. 쯧쯧.”

덕분에 실컷 웃었지만, 녀석은 또 킥킥 웃었다.

……티가 다 났었구나.

말해도 별 소용없는 거라서 일부러 안 했던 건데.

생각보다 마음이 무거웠던 모양이다.

어쩐지 맥주가 잘 들어가더라.

“……주인장이, 한 달 전쯤부터 ‘불구덩이’가 다시 타올랐다고 하더라.”

“‘불구덩이’?”

“여기서 북쪽에 있는 거. 먼 옛날, 드래곤이 토해낸 불꽃이 이 대륙에 처음 닿으면서 생긴 구덩이. 몰라?”

놈의 주둥이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은 땅을 녹이며‘불의 호수’를 만들었고, 그 호숫물이 흘러 넘치면서 남쪽으로 가, 그 일대를 깡그리 태워버렸다.

그 탓에 대륙 남쪽엔 숲도, 냇물도, 심지어 작은 언덕조차 없다.

……어떤 전설적인 정원사 덕분에 그나마 풀이라도 있지, 아니면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로 남아 있었을 거다.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불의 호수’는 드래곤의 불꽃을 너무 받은 탓에, 놈이 봉인된 후에도 식지 않고 계속 부글부글 끓어올랐어. 그래서 이 부근 사람들은 수도로 가려면 빙 돌아서 가야 되지.”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불구덩이’ 때문에그 버려진 마을에서 말리스까지 바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쓸데없이남쪽으로 빙 돌아가고 있으니까.

물론 다들 바보가 아니니‘불구덩이’위에 다리를 놓고 싶어 했지만, 구덩이 속‘불의호수’가 너무 뜨거워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호수’가 굳어버렸다.

식은 게 아니라,딱딱하게굳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다들 기뻐했다.

적어도, 이제 비가 올 때마다‘호수’가 넘치는 거 아닐지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그 불이 다시 타올랐다잖아. 또 흘러넘쳐서 대륙을 태우는 거 아니냐고, 다들 불안해한대.”

한 달쯤 전이라면, 성검이 나타났을 때다.

……드래곤의 봉인이 갑자기 풀리고, 갑자기 계시가 떨어지고, 갑자기 성검이 나타나면서 ‘불구덩이’도 다시 깨어난 것이다.

­­아트라토스를 내년까지 물리치지 않으면 세계멸망이에요! 물론 갑자기 콱 멸망하는 건 아니고, 서서히 여러 문제가 생길 거래요.

서서히, 여러 문제가 생길 것이다.

주인장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새삼스레 저 말이 무겁게 훅 다가와버렸다.

“네 탓 아니잖아. 왜 네가 그래?”

“……아니, 그래도…….”

“하, 그딴 쓸데없는 걸로 고민할 정도로 한가하다는 거지? 그래, 좋아. 한동안은 계속 여관에 묵겠다, 그딴 잡생각 안 들도록 아주 그냥 진을 쫙 빼줄게!”

그 말은 설마……!

메린 녀석이 나를 향해 씨익 웃고 있다.

오한이 느껴지는 저 웃음.

망했어.망했다고!

“저녁에도 대련하자고.”

“싫어어어엇!!”

“고맙긴, 뭘.”

고맙다니, 누가?!

“팍팍 굴러야 팍팍 실력이 오르지! 나한테 맡기라고.”

“싫어어엇! 죽고 말 거야아!”

“죽겠냐, 멍청아. 하여간 엄살은…….”

녀석은 바닥에 엎드리며 절규하는 내 팔을 잡더니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그런 건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

불쑥, 녀석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멍청이는 이 녀석이다.

무력 말고는 도움 안 되는 줄 알고 있으니까.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외쳤다.

“너 솔직히 말해! 그냥 나 패고 싶은 거지?!”

“으응~? 에이, 내가 그러겠냐? 하, 새끼, 날 뭘로 보고.”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술을 퍼 마시고 한숨을 쉬더라도, 이미 마음속에 자리한 부담감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아.

“웃기고 있네! 매번 딱 정확히 15분 정도에, 딱 열 대만 때리는 걸로 조절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오, 알아차리고 있었냐? 그럼 좀더 세게 해도 되겠네.”

“세게 하다뇨? 아, 대련이요? 저도 끼워주세요! 저도저도저도저도!”

“싫어어어엇!!”

지금처럼 실없는 소리를 나누며 눈을 돌릴 수 있으니까.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야, 야, 그만하고 일어나라. 가야지.”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무엇보다도 나에겐 이 손이 있다.

나보다 작으면서도, 나보다도 억센 힘을 가진 손.

항상 나를 지탱하며 일으켜주던 손.

“하아…… 오냐…….”

그 손을 붙잡았다.

굳건한 힘이 나를 홱 잡아 끌며 일으켜세웠다.

……언젠가 내가 그 무게에 눌려 쓰러지더라도, 이 녀석이 날 붙잡아주겠지.

지금 그런 것처럼.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괜찮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블루벨은?”

“누구? 엘프? 몰라, 그냥 왔어.”

뭐, 굳이 챙길 필요는 없으니…….

“갑자기 어디서 또 튀어나오는 거 아냐? 귀쟁이년들은 꼭 그러더라고.”

“재수없는 소리하지 마!!”

악연은 한 명으로 충분하다고!

온 힘을 다해 속으로 외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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